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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85화 (185/248)

# 185

185화

* * *

원반형의 탁자 위에 마법 구슬이 놓여 있었다. 지름 40센티미터에 달하는 구슬에는 영사기처럼 밝은 빛이 새어 나왔고, 그 안에는 베이콥 영주가 감격스러운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공주마마, 이제껏 먼저 찾지 못한 소신을 탓하시옵소서.

“백작님의 탓이 아닙니다.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암운은 대륙에 가득했고 그건 베이콥 영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작님의 탓이 아니니 마음을 가벼이 하세요. 탓이 있다면 우리의 적에게 있겠지요.”

-그 말씀, 깊이 새기겠나이다.

그 후 함께 있던 로일 영주가 뒤이어 샤브레 공주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간 왕국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래서 현재 수도는 큰 위협으로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황의 배신, 그리고 현재 후크 백작이 수도를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두 영주는 분개했다.

그렇게 공주에게 자세한 전황에 관한 얘기를 들은 뒤에 베이콥 영주가 말했다.

-어젯밤 로일 영주와 저는 수도로 향하기 위해 재정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해로를 통해 진격할 계획입니다.

“아직 해군이 건재하다니 다행인 일이군요. 두 분께서 건재하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을 거예요.”

-과찬이십니다.

이번엔 로일 영주 대신 레지앙 백작이 대답했다.

그때 공주가 물었다.

“그럼 혹여 발렌시아 항구로 향하실 건가요?”

-예, 맞습니다. 두 번째 장벽인 폴리스 안으로 진입할 계획입니다.

레지앙 백작이 입을 열자 공주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잠시 후 공주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폴리스로 직행하시면 안 됩니다.”

통신 마법구 화면에 비춰지는 두 영주의 표정이 덩달아 굳었다.

베이콥 영주가 나직이 물었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현재 칼룬 영주는 교황과 뉴 빌드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어요. 이미 그 근처의 해안가는 그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을 겁니다. 오히려 해안가에 자리 잡은 공성 병기들로 인해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요.”

두 영주는 침묵했다.

적은 자신들이 올 줄 알 테니 당연히 대비할 테고 뻔히 예상되는 해로로 가면 그에 따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사실 당연한 얘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장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통곡의 산을 넘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른 지방을 우회해 진군하기엔 다른 지방의 상황을 모르긴 마찬가지…….

위태로울 수도를 방치하기보단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상륙해서 정면으로 맞설 생각이었던 것이다.

-공주마마, 혹여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로일 영주가 물었다.

“네,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군은 비커를 수복 중에 있고 무장 중에 있지요. 에머리 경?”

“예, 공주마마.”

“얼마나 걸릴까요?”

“다른 장벽으로의 진출을 준비해 온 클린트 무리가 남겨 둔 보급 덕분에 무장은 두 시간 이내로 끝날 것 같습니다.”

“좋아요.”

미소 지은 공주가 다시 마법구를 쳐다봤다.

“방금 들으신 대로 우리 군은 9번과 8번 장벽을 지나 북동쪽으로 진출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트리븐 지방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진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트리븐 지방의 북동쪽이라면 해안가가 있겠군요. 하지만 그곳은…….

레지앙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공주는 그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뭘 염려하시는지 알고 있어요.”

공주는 4번 장벽 루아를 떠올렸다.

루아 북쪽에는 해안가가 있는데 그 해안가는 배가 수백 척 정박할 만큼 넓지만, 항구로 개척되지 않은 덴 한 가지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다.

작은 섬 두 개가 협곡처럼 해안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늘 평화로운 샤이닝 해의 유일한 칼날 해안가로 불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지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블레어’라 불리는 이 해안가는 섬 사이로 밀려드는 해류와 해안가를 휘돌아 몰아치는 해류가 늘 부딪친다.

“해안가를 가로막고 있는 섬들 아래에 주기적으로 소용돌이가 돌기 때문이지요.”

그 소용돌이들이 해류를 예상할 수 없게 휘몰아쳐 배들을 서로 부딪치게 만드는 것이다.

레지앙 백작도 이에 대해 잘 알았다.

-예, 하오나 그 소용돌이의 근원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자연법칙처럼 굳어진 초자연현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건 듣기에 오만한 얘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켜보고 있던 찬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감함이 필요한 때야.’

그녀 말대로 그런 해안가라면 적들의 예상을 깨는 진격 루트가 된다.

‘북동쪽의 루아는 2번 장벽인 폴리스를 지나 적을 기습할 수 있는 요충지야.’

대군이 상륙만 성공한다면 왕국군과 함께 후크 백작을 양쪽에서 포위할 수 있게 된다.

‘가능만 하다면…….’

찬영은 조용히 공주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자신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공주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야 했다.

‘뭐든.’

그런 사이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걸 최근 깨달았습니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으셨군요.

베이콥 영주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공주가 고개를 끄덕인 후 찬영을 바라봤다.

“단, 갓피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순식간에 좌중의 시선을 받게 된 찬영이 마법구 앞으로 걸어 나와 두 영주와 인사를 나눴다.

베이콥 영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구먼.

“예, 공주님 덕분에.”

방황했던 그간의 일들을 떠올린 찬영이 쓰게 미소 지은 후 공주를 바라봤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대가 날 구할 때 홀랜드 경이 보았던 그 검의 힘이 필요해요.”

아슬란을 얘기하는 게 틀림없었다.

찬영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섬을 지나는 통로를 전부 얼려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가능하다면요. 가능한가요?”

“제가 갓피스라서 가능하다고 믿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무모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껏 힘의 여파로 비를 얼리고 대기의 흐름을 뒤흔든 아티팩트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 힘을 다룰 능력의 소유자라면……. 믿어 보고 싶군요.”

공주도 일종의 도박을 거는 거였다.

가능한지 물어보고 있는 거다.

찬영은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그사이 공주가 다시 말했다.

“소용돌이로 인해 해류가 끊임없이 바뀌는 지점은 섬과 섬 사이의 일부이며 수심이 대체적으로 낮죠. 그곳만 지날 수 있다면 괜찮아요.”

“설사 그렇다 해도 섬과 섬 사이의 바닷길을 전부 얼려 버릴 수 있을지는 확답 드리기 힘듭니다.”

“그런가요.”

공주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찬영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해류를 최대한 저지하는 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류를?”

“예.”

고개를 끄덕인 찬영이 아이스 램파트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마나가 전부 소진될 때까지 얼음 방벽을 중첩시켜 최대치로 끌어올려 얼음 장벽을 세운다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 한 계획에 두 영주마저 할 말을 잃었다.

그쯤 되자 로일 영주가 경악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미쳤군. 얼음 장벽으로 소용돌이치는 해류를 배들이 지날 때까지 방파제처럼 막아 버리겠다는 건가?

“예, 바다를 전부 막을 순 없지만 배가 지나갈 통로 주변 정도는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배만 지나가면 된다. 찬영은 오로지 그 생각에 집중했다.

‘현재 마나는 18,820(B).’

A 수치에 도달해 가고 있을 만큼 높은 수치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자랄 가능성이 높으니까.’

대략 생각해 봐도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아이스 램파트다.

배마저 박살 낼 수 있는 해류 한가운데에서 자신은 배들이 지나갈 통로를 확보하고, 배들이 다치지 않을 방파제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자면 열댓 개를 세워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아이스 램파트의 수는 다섯 개 정도……. 다섯 개로는 힘들어.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찬영이 나직이 말했다.

“공성 마법진에 사용되는 마법진을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성 마법진을?

“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마나 탱크를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공성 마법진이 필요합니다.”

이제껏 수많은 마법을 각인하듯 익혀 오며 마법에 관한 지식을 쌓아 오지 않은 게 아니다.

제이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그녀의 곁에서 마법을 보고 배우며 사용해 왔다.

마법진 구축 방법에 대해선 아는 지식이 없지만, 조언을 듣거나 배우게 된다면 적어도 5서클 이하의 마법진을 이해하는 건 이제 어렵지 않다.

‘아니, 가능해야만 해.’

마음을 단단히 먹은 찬영에게 베이콥 영주가 응답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곧이어 마법구 안에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제이나.’

마른침을 삼킨 찬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이나는 핼쑥해져 있긴 했으나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사이 그녀는 공주에게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한 뒤 찬영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찬영은 크게 흔들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어서 보고 싶다고?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

마음과 달리 찬영의 대답은 짧았다.

제이나도 그 마음을 아는 걸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필요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나 탱크를 활용해 공성 마법진을 완성하려면 공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곳에 공학자가 있나요?

“마법사도, 공학자도 없어요.”

-그렇군요…….

말끝을 흐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안 좋은 상황이다.

-우선 어떤 마법을 펼칠지 말해 주겠어요?

찬영은 아슬란을 통해 각인된 아이스 램파트에 대해 설명했다.

조용히 그 마나의 흐름과 수식에 대해 들은 제이나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슬란이 없으면 불가능한 수식이네요.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라 아티팩트가 있어야 가능한 마법이에요. 아티팩트와 소유자가 전부 그릇이 되어야 가능한 마법이네요.

“까다롭죠.”

-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방법이 생겨요. 마나 탱크들을 찬영이 아닌 아슬란과 잇는 마법진을 설계할 수 있게 되죠. 다만…….

찬영은 말끝을 흐린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아티팩트나 저…… 둘 모두 마나량을 견디지 못한다면 ‘엑스’가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엑스’라면 언젠가 그녀가 이야기해 줬던 마나 충돌이다. 체계가 다른 심법을 동시에 다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이번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다.

-맞아요.

그 예상대로 제이나는 마법구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못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나량을 늘리는 건 수많은 한계를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이 일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힘을 끌어내야 해요. 성공 확률은…….

“괜찮아요. 확률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찬영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래, 확률 게임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번엔 확률 이상의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다.

‘해야만 하는 일이야.’

매 순간 한계를 극복해야 했던 상황들이 스쳐갔다. 이번에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긴장하지 말고 하나만 집중하자.’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찬영이 제이나를 바라봤다.

“위험하지만 이번 일만 해내면…….”

찬영이 제이나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공적인 자리라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지만 찬영은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니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다.

-사력을 다해 도울게요.

평소라면 만류했을 제이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고마워요 제이나…….’

찬영은 비로소 환히 웃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때를 기다리며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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