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184화
“홉스?”
찬영이 반사적으로 그 단어를 따라했다.
샤브레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께서 지휘하신, 비밀리에 활동한 단체죠.”
“그럼 그 조직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으신 겁니까?”
“그래요. 제가 알기로는 폐하께서도 용인만 하셨을 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해요. 아, 한 가지 더.”
“어떤?”
“교단의 유물 중 하나가 한 고위 신성 기사에게 도난당한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도난이 아니었죠. 그가 성물을 가져갈 거라는 신탁이 성녀께 있었고, 폐하께서는 알고도 묵인하셨으니까요…….”
찬영은 그가 라인쉐리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인쉐리어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맞습니까?”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그 이름을 어떻게?”
“그 역시 베아트리체 성녀처럼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억 일부가 제게 보였죠. 그럼 혹시 베오 루퍼라는 자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음……. 아뇨. 폐하께서도 전대 갓피스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전부 알 순 없었어요.”
“공주님도 그러실 테고요.”
“그래요. 그저 그들이 전대 갓피스라는 걸 알게 된 건 성녀님의 언급 덕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자세한 건…….”
말끝을 흐린 공주가 고개를 젓자 찬영은 내심 아쉽기도 했다.
‘그럼, 그의 이름도 당연히 모르시겠군.’
별의 속삭임 속 보았던 기억의 중심인물.
“그럼 메테우스도 모르시겠지요?”
“메테우스?”
“예.”
“애석하게도요.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네요. 전대 갓피스들의 영혼이 함께 한다니…….”
놀라워하는 공주와 함께 찬영은 아쉽긴 했으나 쌓여 있던 의문 하나가 완벽히 풀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 베오 루퍼 사이의 공통점. 그건 단순히 뉴 빌드가 아니라 그들이 한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는 거였어.’
오랫동안 품어 온 의문이 완벽히 풀린 지금, 찬영은 앞으로 뽑아 들 카드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찬영이 그 생각에 이른 사이 공주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일에 동의한다고 할 순 없었죠.”
“명분 때문입니까?”
찬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아요. 겉보기엔 왕국의 유산을 훔쳐간 것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테고, 교단의 분열을 폐하께서 장려하시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교황이 교단을 동원해 그 기사를 쫓을 때 쉽게 나서지 못하셨던 거군요.”
“네, 그리고 그때쯤 성녀께서 수도를 떠나셨고, 폐하께서는 용단을 내릴 준비를 하고 계셨죠.”
찬영은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교황과의 다툼을 준비했을 거다.
‘그것도 아주 큰…….’
그 예상대로 공주의 입에서는 교황의 실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용단을 내리시기 전에 나라의 정세가 현격히 나빠졌어요.”
다음 수순이야 뻔했다.
“후크 백작이 움직였군요.”
“그래요. 그의 진군은 빠르게 진행됐고 수도 곳곳에 숨어 있던 뉴 빌드가 그에 동조했죠. 하지만 모든 마법 통신이 마비되어 버렸고, 폐하께서는 다른 영주들을 소집하실 수 없게 됐어요. 최후의 성전은 그때부터 시작됐죠.”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상황 전개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찬영이 공주에게 물었다.
“혹시 사라졌던 성녀님과 홉스의 일원들이 그때 나타났던 겁니까?”
“네.”
“들을수록 혼란스럽군요.”
찬영은 나직이 읊조렸다.
오래토록 그 전투에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 왔다.
대체 성전은 어떻게 이뤄졌던 걸까?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찬영에게 공주가 중요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하지만 알아 둘 게 있어요.”
“.......”
“최후의 성전은 대륙에서 벌어진 게 아니에요.”
“예?”
“폐하가 보는 앞에서 모두 다른 세계로 떠났어요. 그대는 그걸 내게 차원 다리라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 당시 보았던 그 문은 차원 다리로 통하는 문이었던 게 틀림없어요.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고 그 일이 와전되어 최후의 성전이 대륙에 벌어진 것처럼 전해져 온 거죠.”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이전에 베이콥 영주에게 들었던 얘기와 달리 최후의 성전은 대륙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얘기인데…….
‘내가 아직 가 보지 못한 차원 다리로 향했던 걸까?’
정황상 그게 확실해 보인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진군하는 후크 백작에 대항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들은 동참하지 못했어요. 대신 성녀께서는 대의를 위해 떠나야 한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제게 남기신 게 있어요. 언젠가 때가 되면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
찬영이 그게 뭔지 물어보려던 찰나, 공주가 그럴 틈도 없이 그때의 상황을 전달해 줬다.
“교황은 그 일이 있은 후 움직였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성녀님께 대항하는 움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요.”
찬영은 잠시 질문을 접어 두고 그녀의 이야기부터 다 듣기로 했다.
“네, 그때쯤 교황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섰던 거죠. 파베르로요. 저는 파견이라는 명분 아래 그와 함께 나섰고.”
“공주님은 위험한 그 길을 어째서…….”
“십안의 기사들을 정말 도와야 했기도 했고, 무엇보다 교황이 하려는 일을 누군가 감시해야 했어요.”
“아.”
잃어버린 모든 기억이 제자리를 찾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공주에게 미리 들어 안다.
‘교황은 공주님을 납치하려 했고, 공주님은 무사히 피신해 여기 비커까지 오시게 된 거지. 그 뒤 회색빛 멸망이 시작됐고.’
찬영은 마치 그때 당시의 기억을 모두 가진 사람처럼 자신이 겪은 경험들과 함께 모든 사건들이 정리되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은 많았다.
“그럼 전대 갓피스들이 차원 다리를 건너간 이후 이야기에 대해 아는 건 없으신 거군요.”
“없어요.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알 수 있는 길은 없을 거예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성녀와 국왕 사이에서 교류 역할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했을 그녀는 자신이 만나길 고대했던 브라이트의 부단장인 로덴 공작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여기서 그녀를 만난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이 안 돼.’
높은 등급의 박스를 얻었을 때보다 훨씬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모든 일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전달해 줄 수 없는 고급 정보다.
마셰로프의 후예인 로레인조차 이런 얘기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그때 공주가 물었다.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것 같네요.”
“그렇게 보셨습니까?”
“아닌가요?”
“맞습니다.”
찬영은 순순히 인정하며 방금 전 그녀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를 바로 꺼냈다.
“성녀께서 남겼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리켰다.
“이 안에 있어요. 홀리 루즈.”
찬영의 눈은 점점 커졌다.
그녀의 손끝이 신성력을 일으키자마자 그녀의 오른쪽 눈의 동공 색이 변한 것이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녀의 흰 동공이 보였다.
동공 색을 신성력으로 감추고 있었던 거다.
‘이제야 무슨 얘기인지 알겠군.’
찬영은 그녀의 오른쪽 눈이 성녀가 남겼다는 흔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다음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공주님 오른쪽 눈이…….”
당장의 호기심보다 그녀의 실명이 신경 쓰이는 게 더 컸다.
만약 눈을 잃은 거라면 그녀에게 상처로 남은 흔적일지도 모르니까.
주저하던 찬영에게 공주가 괜찮다며 담담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실명은 오래 지난 일이랍니다. 마음 써 주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다…….”
“성녀께서 신탁을 받으셨고 그때의 성녀님은 여신을 모시는 그릇이 되셨지요. 그 곁에 내가 있었습니다.”
찬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신탁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 순간 성녀님의 입을 빌린 여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물으셨죠. 이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받아들이신 거군요.”
“그래야 했습니다. 그게 여신께서 보는 운명의 그림 중 제가 맡아야 할 소임이 있다면 기꺼이.”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돌고 돌아 그대를 만난 것이 여신께서 원하신 것이었다면…… 제 선택은 옳은 것이었겠죠.”
그 대답에 찬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나와 공주님이 만난 것이 여신이 원했던 뜻이었다면? 생각해 보면 공주님은 사명이 찾아왔다고 신탁까지 받았어. 그게 지금의 이유와 관련이 있던 거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불쑥 솟은 찬영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녀가 가진 오른쪽 눈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를 만난 이후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뇨, 실명 상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이유는 아직 모르겠군요.”
“그렇군요…….”
찬영은 여전한 그녀의 실명이 안쓰럽기도 했고 동시에 의아하기도 했다.
‘대체 뭘 위한 흔적이기에?’
성녀의 몸을 빌려 현신한 여신의 흔적이다.
저 눈이 가지고 있을 비밀이 작을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
이제 눈의 비밀을 풀어야 할 열쇠를 찾아야 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숨겨진 조건으로 인해 그 흔적이 제대로 발동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예, 만약 그렇다면……. 다양한 조건이 공주님의 눈을 일깨우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내가 갓피스로서 각성하는 일이겠죠.”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요.”
갓피스로서의 각성을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 건지는 찬영도 뚜렷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내 곁에서 갓피스로서 각성한 모두들 각자의 사정과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는 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것뿐……. 아마 그때가 오면 전대 갓피스들의 마지막 흔적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찬영은 그날이 기대됐다.
전대 갓피스들의 흔적을 찾게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들이 상대했던 올드원에게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막연하기만 했던 적들이 점점 윤곽이 드러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공주가 말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당시 그들의 흔적에 다가가고 있다고 그대도 느끼고 있나요?”
“예,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전대 갓피스들의 이야기를?”
“예.”
“조속히 그럴 수 있겠다면 좋겠군요. 대륙이 치른 대가는 무척 컸으니까요.”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대륙은 멸망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왕국은 뉴 빌드와 손을 잡는 자들에 의해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다른 두 개의 나라는 멸망의 봉인도 풀리지 않고 있다.
잠자코 그 이야기에 동의하는 찬영에게 공주가 말했다.
“후일 대륙이 복원된다면 다른 나라들 또한 혼란스러울 거라고 봐요.”
“아마, 그럴 겁니다. 다시 살아 돌아온 것부터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오딘 제국은 황제와 그 중심인 네 개 귀족이 워낙 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서 그들만 잘 결집했다면 금방 혼란을 정리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멸망 전의 상황은 그러기 쉽지 않아 보였지만…….”
“좋지 않았나봅니다?”
“대외적인 정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깊게 알진 못하지만 4개 귀족에게 반기를 든 저항군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워낙 큰 사건이었으니까.”
공주의 말을 듣다 보니 찬영은 대략 오딘 제국이 어떠할지 예상됐다.
‘몬스터에 저항군까지……. 무척 혼란스럽겠어.’
찬영이 그 생각을 하며 토르잔 밀림 왕국에 대해 물어보려던 찰나, 기척이 느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병사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공주마마……. 마법 통신구가 복구되었다고 합니다!”
찬영이 미소 지었다.
공주와 재건을 시작한 두 영주의 통신이 최초로 이뤄지게 된 날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어서 가야겠군요.”
다시 신성력으로 눈동자를 감춘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 희망이 가득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