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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83화 (183/248)

# 183

183화

* * *

어마어마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짙은 먼지바람이 가득했다.

먼지바람 안쪽의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건 강대한 힘의 여파였다.

‘믿을 수 없는 힘이었어.’

모든 걸 목격한 프치키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날아오던 골렘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땅을 헤집고 나온 배관들이 모조리 힘을 잃었다.’

힐끗 뒤를 돌아본 프치키의 시야에 잡힌 건 축 늘어진 배관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높이 솟았던 검은 배관들은 다시 힘을 잃고 함몰된 지하에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끝난 건가?’

프치키는 늘어진 배관들을 노려봤다.

아직은 어떤 것도 명확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함께 있던 그의 부하들이 소리쳤다.

“저, 저기 누군가 나오고 있습니다!”

프치키는 대답 대신 공주를 쳐다봤다. 침묵하던 공주가 입을 연 것과 동시였다.

“느껴져요,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의 공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 * *

터벅터벅.

샤브레 공주 말대로 찬영은 먼지바람을 뚫고 나왔다.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찬영의 눈가에 피곤이 실렸다.

하지만 딱히 다친 곳이 있진 않아 보였다.

반면 골렘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찬영이 방금 전까지 차원의 돌이 박혀 있던 골렘의 배를 내려다봤다.

골렘의 배는 뒤쪽까지 휑하니 뚫려 있었다.

‘연구가 가능할지 모르겠어.’

그런 면에서 온전하게 골렘을 보존한 채 생포하려 했던 건 완벽한 실패다.

하지만 처음 목적으로 했던 오리엔트의 구출과 공주를 지키는 것 등은 해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만큼 까다로운 녀석이었어.’

찬영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고생시킨 골렘과의 사투를 떠올려봤다.

홀리 스트라이크가 작렬했던 순간만 해도 싸움이 끝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다중 분열 형태에서 다시 엘프 골렘의 형태로 돌아왔을 뿐이었지.’

골렘은 일격 후에도 계속 움직이려했고 바인드와 중력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놀라운 방어력이었다.

중력을 온몸으로 이겨 낸 것도 모자라 홀리 스트라이크를 정면으로 타격당하고도 버텨 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타격이 없었던 건 아닌지 놈은 다시 다중 분열을 일으킬 생각은 못했다.

그때 즈음 놈이 스스로 떠들어댔다.

-구역 이탈, 구역 이탈, 위험 감지, 구역 이탈로 인해 효력이 상실된다. 신속히 복귀한다.

그 후에야 알았다.

녀석이 끊임없이 배관들이 있는 감옥 구역으로 가려는 이유를!

‘녀석에게 주입된 올드 원의 주문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해제되는 거였던 거지.’

그 생각에 확신이 들자마자 중력과 바인드를 더 가중시켜 녀석을 있는 힘껏 옭아맸다.

찬영은 타격을 가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건 녀석의 원동력을 없애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잘한 일이야.’

그로 인해 올드 원의 주문을 해제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차원의 돌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흡수 여파로 인해 골렘의 배 일부가 작은 폭발을 일으키긴 했지만, 어쨌든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아니, 크게 보면 중요한 성과를 달성했다.

-네 번째 차원 다리까지 개방도 83.4%

흡수율이 80%를 넘긴 것이다.

이제 뉴 빌드 측도 당황할 게 분명하다.

자신이 돌을 흡수하는 만큼 뉴 빌드가 가용하는 차원의 돌도 그만큼 적어질 테니, 그들이 진행하는 여러 연구들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또 없다.

‘아직 6인의 선지자는 얼굴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찬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생각하며 골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어차피 더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게 아니다.

계속 전진하며 진실을 캐내야 한다.

‘원하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길었던 비커 전투가 끝이 보이고 있었다.

다시 도시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찬영은 골렘의 잔해를 인벤토리에 수집했다.

* * *

장벽 안에는 중소 규모 혹은 대규모 도시가 갖춰져 있기에 각 장벽에는 행정을 통제하는 관청이 있다.

물론 비커의 행정 실무를 맡았던 관청에는 이제 피비린내만이 가득하지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야 해.’

창가에 서 있던 에머리 경은 과거에는 한 행정관의 집무실이었을 곳을 빠져나갔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오고 있단 얘길 들었다. 나가 봐야 했다.

그 후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간 에머리 경은 다시 수복한 관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무리를 맞이했다.

“공주마마.”

“일어나세요, 에머리 경. 그대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일어나는 에머리 경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프치키 경, 이리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감격한 그녀의 눈빛에 프치키가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반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뇨, 당연히 그래야지요.”

에머리 경은 환히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지어 보는 환한 미소, 그도 그럴 게 그의 생환은 많은 걸 의미했다.

“마마, 앞으로 오리엔트가 재정비되었다는 소식이 비커를 휩쓸면 다른 장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테지요. 하지만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저항 세력이 군집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한편…….”

듣고 있던 에머리 경의 표정이 굳었다.

“예, 적들이 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게 되겠지요.”

그때 가장 늦게 장내에 들어선 찬영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럴 틈도 없이 장벽을 수복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에머리 경은 찬영과 눈짓으로 인사를 교환한 후 물었다.

“더 큰 병력과 합류해서 앞뒤로 장벽들을 수복해 나가는 겁니다.”

그의 얘기에 공주와 에머리 경은 찬영의 의도가 뭔지 어느 정도 파악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원군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프치키는 놀란 눈빛을 보였다.

“원군이 있었습니까?”

“예.”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곳에 오는 동안 찬영은 바뀌어 버린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계획을 바꿨다.

‘비커 안에서의 통신부터 복구시킨다.’

원군 얘기를 꺼낸 것도 통신이 가능해진 것을 전제로 한 거였다.

프치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러려면 설명할 게 좀 많아 보였지만, 어쨌든 꽤 긴 설명을 시작했다.

얘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디스펠 역장이 관청 아래에 있다는 얘기인가요?”

“예, 그곳에서 감지됐습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렌즈로 확인되는 첨탑의 존재를 찾았다.

이번 역시 로일 성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신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만 제거한다면 다른 영지들과의 마법 통신은 금방 복구될 겁니다.”

“그 후엔 원군과 합류할 시기를 잡을 생각이군요.”

공주가 뒤이어 말했다.

“예,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기반만 된다면 충분히 장벽들을 빠르게 수복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판단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공주가 현재 실질적인 책임자 자리에 있는 에머리 경에게 물었다.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에머리 경이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갓피스의 말대로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단, 그가 선봉에 서야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라 봅니다. 우릴 계속 도울 생각인가요?”

“굳이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시원하게 자기 입장을 표명한 찬영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좌중을 바라봤다.

“통신부터 살려 보죠.”

* * *

관청 지하에 숨겨진 네 개의 첨탑을 파괴한 후, 공주는 찬영에게 차를 끓여 주었다.

“마크롱 잎이에요. 마침 양이 좀 많이 있기에 끓여 봤어요. 목에 쌓인 먼지를 해소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한 왕국의 공주가 끓여 주는 차를 마셔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찬영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에게 받은 호사를 몇 초간 누렸다.

박하향이 느껴지는 이 차는 코끝에 시원함을 안겨 줬다.

찬영은 한결 상쾌해진 기분이 드는 듯했다.

“시원한가요?”

“예, 무척 시원합니다.”

미소 지으며 대답한 찬영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에머리 경은 통신이 해제되자마자 베이콥 영주와의 교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 정도면 다시 끊어졌던 교신이 연결될 거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끊어져 있던 마법 통신을 복구시키는 데 꽤 많은 마나 충전이 필요했다.

관청에 남아 있는 마나 탱크를 통해 충전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정도면 완벽히 충전이 끝날 것이다.

“잘됐네요.”

공주가 미소 지었다.

“예, 큰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게 원군이 빠르게 올 수 있는 건 오로지 해로를 통한 상륙뿐이다. 정보 없는 상륙과 정보가 있는 상륙은 전혀 다른 얘기다.

‘판이 뒤집히고 있어.’

찬영은 확신했다.

그는 그러면서 공주의 눈빛을 살폈다.

참 담담하다 싶다.

‘당장 가족들이 위험할 텐데.’

말이 왕이지, 그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일 거다.

그런 아버지의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녀는 그럼에도 아직 침착했다.

‘괜히 왕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은 이렇게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규복의 죽음만으로도 크게 흔들렸었으니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모든 사력을 다해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공주가 말을 걸어 왔다.

“이제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군요.”

“예, 기다렸습니다.”

찬영은 그녀가 자신이 모르는 진실 이면의 것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 왔다.

그만큼 그녀의 위치는 지고했다.

“우선 듣고 싶군요. 이곳으로 오며 겪은 모든 이야기를…….”

찬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금의 감춤도 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굳이 감출 이유도, 감출 필요도 없었다.

단순히 그녀를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목적이 자신과 같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대한 간략이 전한다고 했지만 대화를 끝냈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네요.”

“이 일을 겪은 저 역시도 아직 적응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한 줄기 떨어져 내렸다.

흔들림 없던 그녀의 눈물이 의아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성녀께서 여전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으시다는 게 제 마음을 울린 것 같네요.”

“성녀 베아트리체와 각별한 사이셨나 봅니다.”

“네, 그랬죠. 하지만 그분은 늘 외로우셨어요. 그러실 수밖에 없으셨죠. 여신의 뜻을 온전히 여린 몸으로 받아 내셔야 했을 분이니까요.”

이때부터 찬영은 조용히 숨죽이고 경청했다.

지금부터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몰랐던 왕실과 교황의 숨겨진 얘기를…….’

그녀만이 아는 얘기를 들을 차례다.

그사이 눈물을 닦은 공주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교황이 야욕을 드러내기 전 성녀께서는 대륙의 드리워진 절망의 암운들을 걷어 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때쯤 폐하께서 로덴 공작과 함께 브라이트를 창설하셨지요. 하지만 이들만으로 뉴 빌드의 뒤를 쫓는 건 쉽지 않았답니다.”

“그랬군요…….”

“예, 그리고 그때쯤 교황이 야욕을 보였어요. 신탁이라는 명분하에 교황이 가지지 말아야 할 권력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이를 눈치채신 성녀께서 폐하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인 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하셨죠.”

이런 얘기는 처음이다.

첩보 기구는 브라이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황의 야욕을 제어하기 위해 조직된 집단이 있었다?’

찬영은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봐 온 모든 기억들이 떠올랐다.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 베오 루퍼 등.

자신의 영광과 재산 등 모든 걸 뉴 빌드에게 잃고 베아트리체의 편에 서서 다시 싸우기 시작한 이들.

‘설마?’

서서히 입이 벌어지는 찬영과 함께 공주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성녀님의 모든 독자적인 움직임을 묵인하셨고 성녀께서는 여신께 받은 신탁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시작하셨죠. 그럴수록 그분의 곁엔 수많은 갓피스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체 그 조직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참다못한 찬영이 물은 순간.

“홉스.”

공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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