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화
* * *
대열을 맞춰 오리엔트 소속 병사들이 줄지어 감옥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벌써 삼백여 명 정도가 빠져나갔습니다.”
지켜보던 찬영이 샤브레에게 말했다.
그녀는 미소로 화답한 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프치키를 쳐다봤다.
사각턱의 호남인 그는 제대로 영양 공급이 되지 않아 비쩍 마른 몸이었다. 하지만 골격만으로도 찬영에 비견될 만큼 체격이 좋았다.
“프치키 경.”
“예, 공주마마.”
프치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찬영도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풀려난 병사들에게 들은 프치키는 오리엔트 사이에서 영웅 같은 존재였다.
평민 출신으로 남작 작위까지 받았으며, 오리엔트 부단장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리고 후크 백작과 응전했던 상황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한 인물이라고 한다.
‘병사들이 영웅이라고 존경 하고도 남지…….’
그의 어마어마한 정신력과 의지가 아니었다면 결단코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치키가 있다는 건 우리 쪽의 행운이다.
찬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공주가 말했다.
“보급과 무장에 신경 쓰세요. 클린트 무리가 남긴 보급 창고는 에머리 경과 상의하면 될 겁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저희 사단은 에머리 경의 휘하로 배속되는 것입니까?”
공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치키의 말대로 같은 ‘부단장’의 직함이라 할지라도 기사는 병사보다 더 높은 지휘권을 가진다.
십안의 기사단이 오리엔트의 상관인 이유다.
“알겠습니다.”
에머리 경과 오랜 친분이 있는 프치키는 오히려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기어코 해내셨군요. 에머리 경.’
에머리는 프치키와 함께 끝까지 항전했던 동료다.
그녀가 멈추지 않고 결국 비커를 다시 수복한 것이 프치키는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맙소. 정말.”
자리를 뜨려던 프치키가 찬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찬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여러 차례 감사 인사를 받았지만, 받을 때마다 그들의 진심이 더 느껴졌으면 느껴졌지 적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럼 이만.”
병력 인솔을 위해 자리를 뜬 프치키를 보며 찬영이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께서도 이만 이곳을 떠나시죠.”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대는 같이 가지 않을 건가요?”
찬영의 뉘앙스에서 남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그녀가 물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남기고 온 검은 관을 떠올렸다.
무사히 일을 처리한 덕에 별 탈 없이 르리에로 타우린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끝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차원의 돌의 흡수, 그건 이 전쟁의 끝을 위해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일이다.
* * *
-골렘을 깨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요.
차원의 돌을 흡수하기 위해 남겠다고 얘기한 후 공주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설마?’
이미 가동 장치로 보이는 검은 배관을 전부 파괴했다.
운이 나쁜 게 아니라면야…….
‘골렘이 깨어나진 않겠지.’
그 생각과 함께 찬영은 검은 관으로 다가갔다.
관의 겉은 매끈했다.
다만 양옆에 배관이 빠져나간 자리엔 주먹 만 한 구멍이 수백 개가 나 있다.
손을 뻗어 관을 열었다.
‘무거워.’
들어 올린 관의 뚜껑은 예상을 뛰어넘은 높은 무게였다. 근력이 지금처럼 높아지지 않았다면?
‘못 들어 올렸을 거다.’
그 생각과 함께 뚜껑을 완벽히 들어 올린 찬영은 그제야 그 안에 곤히 잠들어 있는 존재와 마주했다.
‘이게……. 골렘이라고?’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이제껏 많이 봐 온 엘프 여성과 비슷한 체형과 생김새였다.
순간 도레인이 떠오를 정도…….
이쯤이면 엘프와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창백하다 못해 밀가루를 발라 놓은 것 같은 피부와 검은색 손톱, 그리고 체형을 두르고 있는 검은 피부였다.
얼핏 검은 페인트를 얼굴 아래, 두껍게 칠해 놓은 거 같기도 했다.
‘엘프를 골렘으로 제작해 버린 건가?’
이제껏 그들이 보여 준 이식 결과물들을 보면 차원의 돌은 그런 결과를 내고도 남았다.
‘별 괴물들이 다 있었지.’
폭발물부터 몬스터의 장점을 취해 버린 괴물까지.
‘만약 이 골렘이 정말 엘프를 통해 제작된 거라면…….’
뉴 빌드의 차원의 돌을 활용한 이식 개발은 이미 궁극에 달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원의 돌만 있으면 엘프, 사람 등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를 이식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겠지.’
그 생각을 하자 입안이 썼다.
앞으로 그들에 의해 희생당할 존재들이 얼마나 더 늘어날까?
‘더는 안 돼!’
찬영은 배 위에 깊이 박혀 있는 차원의 돌을 노려보다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손을 뻗은 찬영의 팔목을 뭔가가 잡아챘다.
“이건……?”
팔목인 잡힌 찬영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엘프 골렘을 쳐다봤다.
그러자 지금껏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엘프 골렘이 보랏빛 안광을 일으키며 서서히 눈꺼풀을 올렸다.
동시에 들려오는 감정 없는 탁한 목소리.
-손상률 한계치에 이르렀습니다. 비상 충전이 완료됩니다. 감옥을 붕괴시키는 침입자를 즉시 제거합니다.
골렘의 음성을 듣자마자 찬영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쿠쿵’ 하며 천장이 흔들렸다.
쾅! 쾅!
지축이 흔들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 곳곳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공주가 발견하지 못한 비상 시 폭발 트랩인 게 분명했다. 그러자 벽면에서 검은 배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
배관은 타일 바닥에만 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찾지 못했을 뿐, 배관은 감옥 벽면을 모두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배관들은 중심부로 이어진 다른 배관들과 이어져 있을 거다.
‘그렇다면 문제없어. 타일 아래 배관은 전부 끊어 놨으니까.’
그 순간 골렘이 찬영의 팔을 잡은 채 스스로 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드득!
그러자 연결되어 있던 배관들이 자연스레 보였다.
검은 관과 골렘의 등 사이에 숨겨진 비상용 가동 배관이 있었던 것이다.
‘배관을 전부 끊어 낸 게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런.’
동시에 팔을 쥐고 있던 엘프 골렘의 검은 손톱이 찰나 간 형태 변화를 일으켰다.
지잉!
순식간에 열 개의 손톱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길어졌다. 당장 팔이 찢겨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착용하고 있는 금강신장의 효과 E인 복마伏魔 덕분.
찬영은 엘프 골렘을 노려봤다.
‘21,400이라…….’
녀석의 공격은 자신에게 아무 피해도 일으킬 수 없다.
몸을 휘도는 황금불괴신공과 전신을 아우르는 금강신장의 방어력은 가치가 낮은 녀석에게 절대적이다.
오히려 골렘의 기습 실패로 인해 놈의 빈틈이 보였다.
찬영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슬란.’
소환된 검을 쥐자마자 골렘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골렘이 반대편 손을 들어 아슬란을 막아섰다.
위력을 모르고 덤빈 꼴이다.
쾅!
아슬란에 부딪친 골렘이 그 충격으로 인해 쥐고 있던 찬영의 손을 놓치며 날아갔다.
‘몰아붙여야 해!’
찬영이 그 뒤를 쫓기 위해 발을 떼려던 그때였다.
발밑에서 솟아오른 배관들이 뱀처럼 발목을 휘감았다.
“뭐지?”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찬영의 시야에 끊어 놓았던 배관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배관들을 따라 벽면까지 이동했다.
‘함께 움직이고 있다.’
끊어 놓은 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꿈틀거리고 있었던 거다.
‘잠깐, 설마……?’
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잘못 생각해도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배관은 단순한 가동 장치가 아니었어. 배관이 곧 골렘이었다!’
어느새 다리를 둘둘 말아 꽉 옥죄어 오는 배관을 보며 찬영이 아슬란을 재차 휘둘렀다.
쐐액!
그러는 사이 튕겨 나갔던 골렘이 다시 일어났다.
구구구.
일어난 골렘의 주위로 배관들이 하나 둘 뒤섞이며 골렘을 위로 들어 올렸다.
-침입자를 제거한다.
골렘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찬영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배관들이다. 아무리 베어도 끝도 없이 날아온다.
-꺄아아악!
설상가상, 골렘이 소리를 질렀다.
“윽!”
대기가 울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괴성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호흡해야 해.’
급히 심법들을 통해 귀 주변 마나를 흘려서 공격적인 음파를 차단했다.
흐려지던 초점이 다시 정상을 찾았다.
‘……까딱했으면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쓰러질 뻔했어.’
역시나 가치 측정은 객관적 수치이긴 하지만, 전투엔 많은 변수가 있다.
‘방심하면 죽는다.’
찬영은 이 와중에도 아슬란으로 날아오는 배관들을 베며 땅을 박차고 가변에 있는 타일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마자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해일처럼 높이 솟아오른 배관 언덕 위로 내려다보는 골렘의 눈빛이 보였다.
‘광속섬뢰보光速閃雷步’
찬영은 땅을 박찼다.
뒤로 배관들이 계속 쫓아왔다.
사방을 봐야 했다.
찬영은 전후좌우 날아오는 배관들을 이리저리 베며 벽을 타고 달렸다.
엘프 골렘이 위에서 자신을 지켜본 채 배관들을 제어하고 있는 게 보인다.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
그 순간 달리는 찬영의 모든 방위가 배관에 의해 막혀 버렸다.
더 달릴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된 상황.
‘결국…….’
입술을 굳게 다문 찬영의 머리 위로 배관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배관들이 충돌해 오던 그 찰나.
‘블링크.’
순식간에 찬영이 사라지며 배관들이 서로 부딪쳐 충돌했다.
콰쾅! 츠츠!
찬영이 나타난 건 배관이 있는 골렘의 등 뒤, 그의 시선이 골렘의 등 뒤에 박혀 있는 수많은 배관들을 향했다.
하지만 목표로 하는 건 그게 아니다.
서걱!
찬영은 아슬란으로 골렘의 본체를 노리지 않았다.
그 대신 배관들을 한꺼번에 베어 버렸다.
“키에에에에!”
골렘이 귀곡성을 일으켰다.
귀가 요동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놈과 이어진 배관을 전부 베어 버렸다.
하지만 그래 봤자 언덕 노릇을 하던 배관들이 다시 골렘과 이어지려 꿈틀거리며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막, 배관들이 다시 골렘과 일체화가 되려 하던 순간.
찬영의 반대편 손에 작은 마법봉이 들렸다.
‘라일라의 완드.’
손에 쥔 완드의 데이터 창이 스쳐 지나갔다.
-라일라의 완드
-가치 : 4 400
-설명 : 반경 5m의 원하는 목표물에게 ‘석화’ 저주가 가능하다. 저주 해제가 가능한 건 소유자뿐이며 1분 후 즉시 석화 해제. 단, 석화 상태가 된 적에게 1분간 ‘절대 의 시간’이 부여됨. 절대의 시간 사용 시 상대는 어떤 공격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라일라의 능력은 양날의 칼이다.
적을 묶어 둘 게 아니라면 턱 없이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도 남는다.
상대를 석화시키는 것까진 좋지만 대신 절대적 무효화를 선물해 주는 거다.
‘하지만 목적이 죽이는 게 아니라면…….’
효용성의 가치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물건의 가치 높낮이가 달라지듯.
“생포해 주지.”
찬영이 완드를 골렘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골렘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골렘의 몸을 뒤덮은 검게 칠한 전신 위로 기묘한 문자들이 나타났다.
그러자마자 검은색의 얇은 막이 빠르게 번져 온몸을 덮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놈이 분리되고 있어.’
골렘의 몸이 빠르게 분열되며 흩어졌다.
목표한 타깃이 수백 개로 나뉜 것과 같았다.
‘이러면 석화가 제대로 통할 리 없어.’
조금만 늦으면 놈을 놓쳐 버릴 것이다.
‘석화.’
그와 동시에 완드 끝의 회색 구슬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찬영마저도 앞을 계속 볼 수 없었다.
‘이런.’
눈을 질끈 감은 찬영의 귀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볼 수가 없었다.
늦은 걸까?
반신반의하며 찬영이 다시 눈을 떴다.
이제 둘 중 하나다.
놈이 도망쳤든지, 아니면 석화가 통했든지…….
찬영이 완전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