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찬영은 원통형의 복도를 지나 바람 한 점 없이 고요에 잠든 곳에 다가갔다.
‘……여기인가?’
찬영의 눈동자가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
지상에서 가늠했던 것보다 거대한 홀이었다. 건물의 외벽엔 수십 개의 거대한 원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였다.
홀의 바닥에는 수천 개의 다양한 색의 타일이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천장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매끈한 반원 형태로 이뤄졌다.
얼핏 볼록 렌즈처럼 솟아오른 거 같기도 했다.
‘여기가 중앙 홀. 그리고 이곳을 가로질러야 이 홀의 끝에 있는 문으로 갈 수 있다.’
마침 반대편에 있는 검은 테두리의 문이 보였다.
그렇게 주위를 살피던 그때 공주가 말했다.
“트랩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요. 앞장설게요.”
“공주님께서요?”
너무 의외라 잠시 할 말을 잃고 선 찬영에게, 샤브레 공주는 전혀 표정 변화 없는 눈길로 물었다.
“놀랐나요?”
“예, 트랩에 일가견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많은 시간 적들에게 추격당하면서 그동안 많은 걸 배웠답니다. 삶은 늘 배움의 연속이죠.”
말을 마친 그녀는 벽을 더듬고 바닥을 느끼며 그동안 쌓아 온 트랩 탐색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발견된 트랩은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같은 라인에 있는 회색 타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트랩이었는데, 잘못 고르면 연쇄 트랩이 발동하는 식의 트랩이었다.
공주는 트랩이 있다는 걸 타일이 다른 바닥과 미세하게 동떨어져 있다는 걸 금방 알아냈다.
꽤 많은 트랩을 경험하지 않고선 몰랐을 차이.
그녀 덕분에 트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찬영은 렌즈에 체크되는 차원의 돌이 하필 트랩 아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트랩 아래에 골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걸?”
의아해하는 공주에게 찬영이 렌즈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럼 타일의 구조상 연쇄 발동이 골렘을 가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네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찬영의 대답에 공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트랩 해체를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찬영은 그녀의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예상한 대로라면 지금까지의 생각이 전부 틀린 걸 수도 있다.
‘트랩이 발동되는 게 골렘의 가동 조건이라면…….’
클린트만이 골렘 가동 조건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소문이 났던 게 아니었을까?
‘클린트가 공격당하지 않는 권한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고, 녀석만이 이곳을 통과할 트랩의 정답을 알고 있었던 거지.’
일직선으로 쭉 나열된 같은 색의 타일들.
이 중 하나만이 정답이다.
타일을 잘못 고르면…….
‘골렘이 깨어나겠지.’
최대한 싸움을 피하는 게 물거품이 되는 거다.
‘부디.’
찬영은 최상의 시나리오가 나오길 기다렸다.
* * *
“어렵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가 말했다.
“그렇군요.”
하긴, 어려운 일이다.
찬영은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골렘과 싸우러 들어오겠다고 각오하고 들어온 길이다.
‘원래 생각해 뒀던 계획이 시작됐을 뿐이야.’
실제로도 그렇고.
찬영이 막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샤브레 공주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성공 확률은 낮지만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요.”
“골렘을 피할 수 있다면 뭐든 동의합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골렘을 깨우는 일이다.
그녀 말대로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해 봐야 한다.
“그럼, 골렘을 깨워 보도록 하죠.”
“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묻는 찬영에게 공주가 미소 지으며 똑같이 말했다.
“네,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우리 손으로 깨우는 거예요.”
찬영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골렘을 피할 방법을 찾자는 게 아니고 골렘을 도리어 깨우자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린 이 트랩을 해제할 수 없어요. 장비도, 인원도 부족하고, 통상적인 마나로 구동되는 트랩도 아니에요. 암흑 마력으로 구동되는 트랩이죠.”
“그래서 무작정?”
“단순히 정면 돌파를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랍니다.”
찬영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흘렀다.
그녀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시지?’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공주가 다시 말했다.
“우리 생각이 맞다면 타일 아래 있는 골렘은 침입자인 우릴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거예요. 하지만 골렘의 동선은 한정되어 있죠.”
찬영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거대한 홀에.”
찬영은 이제야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다.
“그래요, 하지만 골렘이 이 홀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데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봐요. 모든 트랩들은 대개 유기적이니까요.”
“이 타일들을 붕괴시킨다면 골렘이 그만큼 큰 타격을 입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고 있는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추측이에요. 모든 트랩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유기적이죠. 골렘이 트랩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면…….”
“트랩의 통과 대신 파괴가 골렘 가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제가 잘 이해한 게 맞습니까?”
“맞아요. 다만 갓피스, 그대가 있기에 가능한 계획이라는 게 유일한 허점이죠.”
찬영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했다.
“확실히 겉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군요.”
대답을 마친 찬영이 면밀히 타일들을 살폈다.
‘견고해 보여. 일반적인 쇠처럼 보이진 않는다.’
찬영은 뒤에 얌전히 서 있는 타우린을 쳐다봤다.
혹시 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타우린이 저 타일들에 타격을 줄 순 있지 않을까?
“타우린, 저 타일들을 움직일 수 있겠어?”
-음모오!
타우린이 두 발을 걸어 나아가 타일을 노려봤다.
하지만 몇 초 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타일엔 암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안 되는 모양이네.”
괜찮다며 타우린의 목을 툭툭 두드려 준 찬영은 아슬란을 곧바로 꺼냈다.
지잉!
보유한 장비들 중 가장 절삭력이 강한 건 역시나 아슬란이다.
‘여기에 오라를.’
찬영이 집중력을 가해 오라를 일으켰다.
전력을 다해 세 가지 심법을 전부 활용했다.
마나가 세 줄기로 나뉘어 전신을 휘돈다.
근본이 같기에 부딪치지 않고 서로 뒤섞이며 보완해 나가는 마나는 점차 아슬란의 칼날 위로 구현됐다.
츠츠츠!
곧이어 검을 두르는 것도 모자라 검 위로 치솟는 한 치 이상의 오라.
아니, 그 이상이었다.
두 치까지 오른 오라는 금색, 붉은색, 푸른색이 뒤섞여 있었다.
“소드…… 마스터?”
지켜보던 샤브레 공주는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갓피스인 그가 강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에 이른 존재일 줄이야…….
“그대는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만드는군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인 찬영이 다시 타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우.’
호흡을 다스리며 앞으로 벨 것에 집중해야 한다.
찬영의 호흡이 점차 고요해졌다.
‘보인다.’
자신의 호흡이 고요해지자 주위 모든 것의 호흡이 들려온다.
살아 있는 것에만 호흡이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검에 집중하고 흐르는 선을 쫓다 보면…….
‘호흡이 들려.’
이게 무엇 때문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불현듯 드는 생각 하나는 있다.
‘들려오는 이 수많은 호흡들을 검에 녹여 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갈 수 있다.’
하나 지금은 당장 선을 쫓는 것만도 힘든 일이다.
찬영은 잠깐 스친 생각을 털어 낸 뒤 눈을 빛냈다.
준비는 끝났다.
“물러나 계셔야 합니다.”
아슬란에서 일어날 강한 마나 방출이 그녀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타우린이 찬영의 뜻을 알고 공주와 함께 멀리 물러나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구구구구!
그러자마자 찬영이 밟고 있는 바닥이 울렸다.
흐르는 공기와 마나가 부딪치며 발생한 현상이었다.
방출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홀이 흔들렸다.
치치칙!
최대 방출된 오라가 두 치 반까지 솟아오른 순간.
찬영이 타일을 향해 땅을 박찼다.
파밧!
부웅, 솟아오른 찬영의 오라가 타일을 일도양단했다.
슥! 슥!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타일은 베이는 족족 종이가 칼에 베인 것처럼 반으로 쩍쩍 갈라졌다.
탁, 탁!
탄력이 붙은 찬영은 점점 빠른 속도로 검무를 추며 홀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홀의 양쪽 갓길을 제외한 가운데 타일들이 금세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갔다.
마치 바둑판의 한가운데가 사라진 모양새.
그때였다.
‘음?’
찬영의 시야에 밑으로 연결되어 있던 검은 호스가 보였다.
‘이건?’
검을 휘두르던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타일을 하나둘 베어 내며 안쪽으로 이동할수록, 떨어지는 타일과 연결되어 있던 배관 수백 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이동하는 자신과 함께 점점 늘어나고, 또 폭이 좁아지고 있다.
‘끝으로 향하고 있어.’
이 배관들은 문 앞으로 향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탁.
잠시 걸음을 멈춘 찬영이 자신이 파괴한 타일 아래를 힐끗 내려다봤다.
타일 아래는 검은 배관들이 넝쿨처럼 서로 엉켜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이것들은 뭐지?”
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 외관만 봐선 모르겠다.
하지만 찬영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골렘과 관련 있는 가동 장치일까?’
그게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이다.
‘타일, 골렘, 그리고 저 검은 배관들까지.’
찬영의 시선이 배관들이 향하는 방향을 향해 이동했다.
“이곳에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지?”
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것들이 전부 골렘과 관련이 있다면…….
‘공주님의 선택은 옳았어.’
타일 게임에 응하지 않고 그들이 만든 틀 자체를 부숴 버린다.
그건 아직까지 통하고 있었다.
‘적어도 골렘이 깨어나고 있진 않으니까.’
생각을 마친 찬영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점점 렌즈에 확인되는 차원의 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그렇게 문 앞에 놓인 타일 위에 도달한 찬영은 할 말을 잃고 섰다.
문과 6m 정도 떨어진 위치 아래에 검은 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 관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관이 아니었다.
4m쯤 이르는 높이의 관이었다.
동시에 관은 빼곡히 자리를 채운 검은 호스들 속에 파묻히듯 자리 잡고 있었다.
차원의 돌은 관 안에서 감지됐다.
‘타일을 순차적으로 밟으면 검은 배관들이 가동을 시작하고, 배관들이 열리면 저 관이 개방되는 식일 거야.’
찬영은 트랩에 대한 조예가 없긴 했지만, 얼핏 겉으로 보이는 것들로 정황상 추정되는 건 있었다.
하지만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
찬영이 공주를 향해 외쳤다.
“공주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양옆에 타일이 아직 살아 있긴 하지, 그 타일 또한 배관과 연결되어 있다.
“배관을 끊어야 합니다! 배관이 장치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찬영은 더 두고 볼 것 없이 배관 위로 뛰어내렸다.
그 뒤 배관을 끊는 건 타일보다 어렵지 않았다.
“됐습니다!”
찬영의 외침에 타우린과 공주는 차분한 걸음으로 옆에 남아 있는 타일을 밟고 반대편으로 가로질렀다.
‘됐어.’
끊어진 배관 한 가운에 있던 찬영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고대하던 오리엔트를 풀어 줄 시간이다.
찬영은 훌쩍 뛰어 올라 다시 그녀를 쫓았다.
검은 관과 그 안에 있는 차원의 돌 흡수가 남아 있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야.’
경계심이 들었다.
이 안에 추가적인 트랩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당장은 그녀를 도와 오리엔트를 구출하는 게 우선이다.
‘넌 나중에.’
찬영은 차원의 돌을 일별하고는 공주를 뒤쫓았다.
* * *
문을 지난 후부터 트랩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골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방어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구출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찬영 일행은 목적지에 금세 도착했다.
찬영은 3층 높이인 공동 아래에 밧줄을 늘어트리고 그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 후 갇혀 있던 그들의 눈빛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걸 직접 본 순간, 찬영은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수백 명에 이르는 오리엔트 소속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공주의 안내에 따라 감옥 바깥으로 순차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츠츠.
하지만 기뻤던 나머지, 땅의 미약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