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씩씩!
타우린이 콧김을 뿜었다. 이를 본 찬영은 이젠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타우린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신장이 190cm을 좀 넘은 체격이 된 것에 비교하자면 타우린의 신장은 이제 2m를 훌쩍 넘은 거 같다.
‘이 정도면 무게도 2톤은 훌쩍 넘겠어.’
상당한 덩치를 갖게 된 타우린을 보며 찬영은 녀석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음모오!
타우린이 긴 혓바닥을 내밀어 얼굴을 핥았다.
‘평소보다 유독 많이 핥는 것 같은데…….’
확실히 짚이는 게 있긴 했다.
‘걱정하는 거구나.’
타우린은 찬영 혼자 정령계로 떠났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찬영이 목숨을 건 위험한 선택을 하려는 걸 모를 만큼 무지한 녀석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를 기억하고 찬영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그렇게 멍청한 짓 안 해. 그러니까…….”
찬영이 목을 안고 있던 타우린에게 한 걸음 물러나며 흠뻑 젖은 옷을 내려다봤다.
‘……그만 좀 핥아.’
그쯤 되자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에머리 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거, 거대한 소는 처음 보네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에머리 경과 달리 샤브레 공주는 조심스럽게 타우린과 찬영에게 걸어왔다.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예, 공주님이라면 녀석도 허락할 겁니다. 우리 이야기를 다 알아듣는 녀석이거든요.”
“그런가요?”
“예, 타우린은 돌의 정령입니다. 자신이 살던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친구죠.”
“돌의 정령이라니, 정말 놀랍네요! 어릴 적 신화로만 듣던 게 정령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타우린을 무척 예뻐했다. 여신의 힘 아래 있는 이들이라 그런 걸까?
타우린도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고 금방 따랐다.
‘그나저나…….’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에머리 경은 여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다가오려면 한참 걸리겠어.’
그런 생각이 들던 중에 타우린과 놀고 있던 샤브레 공주가 말했다.
“이 아이가 그대를 돕는다는 얘기인가요?”
“예, 공주마마.”
“믿기 힘들군요. 순하기만 한데.”
“저를 여러 번 지켜 준 친구입니다. 이번에도 제 등을 맡길 생각이고요.”
생각해 보면 타우린은 정말 많은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왔다.
거기다 녀석은 디스펠 결계를 무시하는 않는 방어력을 갖췄다.
차원의 돌을 핵으로 움직일 게 예상되는 골렘과 맞설 동료로 타우린만큼 믿을 만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없지.’
확신하는 찬영을 보며 샤브레는 ‘오호’ 놀라워하며 타우린의 숙인 이마 위에 얼굴을 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에게 따뜻함이 느껴져요. 여신의 뜻이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요.”
“그럴지도요.”
이 대답엔 꽤 많은 의미가 있다.
별들의 속삭임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정령계는 별의 힘을 필요로 한다.
만약 도망친 별들이 대륙의 여신이라면…….
‘둘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거겠지.’
찬영은 이것 역시 언젠가 그녀와 긴히 얘기를 할 때 나눠봐야 할 이야기 중 하나라 생각했다.
‘당장엔 포로들부터 풀어 줘야 해.’
급한 불부터 좀 끄고.
* * *
이윽고 열 명 남짓의 팀이 꾸려졌다.
타우린과 찬영, 그리고 샤브레 공주였다.
물론 샤브레 공주의 합류를 가지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에머리 경은 그녀가 합류하길 원치 않았다.
“공주마마의 안위는 나아가 왕국의 안위입니다.”
……라며.
하지만 샤브레 공주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제 선택이 달라지진 않습니다.’라고 하며 왕국을 위해 언제든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찬영은 공주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도 했고, 이건 모두의 싸움이라는 걸 이젠 확실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공격 계열 신성 마법이 없을 뿐이지…….
‘보조 계열 신성 마법은 어떤 고위급 신관보다 탁월해!’
그녀의 성품상 총 추기경의 직함은 거저 받은 게 아닐 것이다.
그만한 신성력의 힘을 갖췄단 얘기다.
어쨌든 그 논쟁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남은 자리는 크라이 워커들로 채웠다.
감옥 부근에 자리 잡고 탈출할 수감자들을 안내할 팀이었다.
그러는 동안 에머리 경은 클린트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비커의 관청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 * *
그렇게 찬영을 필두로 이동한 그들은 지하 감옥, 알카스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도시 외곽에 위치했기에 가면서 두 개 정도 되는 통행소를 지나야 했다.
통행소를 지나며 몇몇 클린트 잔당을 처리한 건 짧은 헤프닝 수준.
어쨌든 마지막 통행소를 지나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언덕을 넘어섰을 때, 찬영은 비로소 작은 동산 위에 자리 잡은 회색 건물과 직면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며 생긴 노을빛에 드리워진 6m 정도 되는 벽이 둘러져 있는 소규모 성채였다.
“확실히 누가 봐도 감옥인 듯하군요.”
찬영의 말처럼 알카스는 문을 제외하고는 창문 하나 없이 회색 벽으로만 빼곡했다.
‘미니 맵.’
찬영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 갖춰져 있는 성채 주변을 살폈다.
에머리 경으로부터 받은 지도를 통해 얻은 구조도다.
‘정문 옆에 감시탑 한 개. 그 뒤엔 문을 지나야겠지.’
찬영은 미니 맵을 보며 그다음 수순을 떠올렸다.
문을 지나 초소 두 개를 거쳐 가야 하는 이 성채는 지상이 아닌 지하의 면적이 더 넓었다.
‘특이한 구조야.’
지하 1층엔 우물처럼 나 있는 구멍이 여덟 개가 있는데, 그 구멍 안엔 밧줄이 있다.
수감자들의 식량을 주는 통로다.
수감자들은 지하 3층 높이 아래의 커다란 공동空洞 아래 있는 감옥에 갇혀 있다.
빠져나올 수 없다.
‘밧줄 없이 혼자 나오려면 손가락을 걸칠 틈 하나 없는 매끈한 통로를 기어 올라와야 해.’
더군다나 통로는 철로 이뤄져 있다.
‘오라라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등반이 불가능해.’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찬영은 미니 맵 중에서도 성채 한가운데에 나 있는 커다란 홀을 응시했다.
홀의 높이는 6m.
지상에 나 있는 성채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골렘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규모야.’
거기다 문 노릇을 하는 구멍들이 위치한 지하 1층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지상의 홀이다.
수문장이라면…… 놈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다.
“움직이죠.”
이미 오면서 어떻게 움직일지 얘기를 나눴다.
“공주님께서 잠시 쉬시며 신성력을 유지해 주시고…….”
선봉은 자신과 타우린이 향하기로 했다.
“가자.”
찬영이 타우린의 목을 툭툭 두드렸다.
씩씩.
콧김을 뿜은 타우린이 네 발을 박찼다.
* * *
오리엔트와 기사들을 구하는 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알카스를 지키는 병력들은 전부 감시탑 한 개와 문 뒤의 초소 두 개에 모여 있다는 전제를 둔 덕분에 가능했다.
여기엔 대규모 병력이 없다.
‘정면 승부다!’
그도 그럴 게 알카스 홀 안으로는 클린트 말고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건 안쪽에 골렘 말고 별다른 수비 병력을 갖출 수 없다는 얘기겠지.’
찬영이 착용하고 있는 렌즈를 통해 주위를 확인했다.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주변엔 차원의 돌이 이식되거나 사용하는 자가 없다는 말.
‘좀 더 수월하겠어.’
감시탑 반경 안에 도달하자 열댓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타타타탕!
힐끗 날아오는 화살을 보자 타우린이 속도를 더 냈다. 피하거나 막을 필요도 없다.
지금은 말 그대로 속도전.
두두두두!
더 빨리 달려서 감시탑에서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하게끔 달리면 된다.
그럴수록 감시탑은 분주해졌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서두르고 있을 거다.’
어림없는 일이다.
그 순간 감시탑 위에서 커다란 2m 정도 되는 발리스타가 보였다.
‘왔군.’
감시탑의 최종 병기를 내놓은 것일 터였다.
때가 됐다.
“타우린! 준비해!”
찬영이 타우린의 등에 앉아 있다 말고 갑자기 곡예사처럼 두 발로 섰다. 흔들림과 속도를 감안하면 초인적인 균형 감각이었다.
“저, 저게 뭐야?”
“허…… 저게 가능하긴 해?”
뒤따르던 일곱 명의 크라이 워커들이 혀를 내둘렀다.
괴물이 따로 없었다.
빨리 달리는 거대 소도 놀라울 지경인데, 기함할 속도를 가진 소 위에서 두 발로 서 있다니…….
샤브레도 무척 놀랐다.
그는 뛰어난 신체를 가진 데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이 가능한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과거에 제법 마주쳤던 갓피스들을 떠올리면…….
‘그는 독보적인 존재야.’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갓피스들이 전부 사라져 버리기 전의 시대를 떠올려 봐도 찬영은 두각을 보일 존재란 판단이 선다.
‘여신께서는 우릴 버리지 않으셨어.’
그를 볼 때마다 절망 아래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때, 워커들이 소리쳤다.
“공주마마! 저, 저길 보십시오!”
그 외침과 함께 타우린의 주위로 거대한 돌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콰쾅!
감시탑 병력은 발리스타를 손 쓸 기회도 얻지 못했다.
감시탑이 통째로 무너지는 게 보였다.
‘엑시스 퀘이크.’
레벨 8이 된 타우린의 엑시스 퀘이크는 이제 20m의 반경까지 늘어나 있다.
으아악!
그러는 사이 찬영은 타우린과 함께 계속 앞으로 달렸다.
쿠쿠쿵!
땅이 울린다.
타우린의 가속도가 얼굴을 스쳐 가는 강한 풍압으로 확실히 와닿았다.
쐐애애액!
정면에 나 있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쇳덩어리를 보던 찬영은 꼿꼿이 서 있던 두 발을 그제야 움직였다.
“타우린!”
그 순간 달리던 타우린이 급제동을 걸며 방향을 전환했다.
쐐액!
찬영의 몸이 기우뚱하며 앞으로 몸이 쏠렸다.
쐐애액!
방금 마주했던 바람보다 두 배는 더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가속이 붙은 몸과 함께 찬영이 오른손을 들었다.
단 몇 초 사이 최대의 스피드를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도구로 스툼만 한 게 없다.
‘에어 펀치.’
중첩된 가속력이 가져온 무지막지한 파괴력은 클린트의 종말을 알려 주듯 알카스의 문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콰콰콰!
정문이 종이 찢기듯 세 동강으로 갈라지며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문 뒤에서 도열하고 있던 적들이 휩쓸린 문에 휩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순간 먼지바람이 휘몰아치며 주위에 정적이 일었다.
꿀꺽.
적들 중 일부는 주저앉고 일부는 마른침만 삼켰다.
다른 누군가에게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이젠 다가올 두려움을 걱정하고 있었다.
“오, 온다!”
그 한마디에 살아 있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저벅저벅.
찬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찬영의 실루엣이 일렁이자 남아 있는 적들이 소리쳤다.
“놈을 죽여!”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그들의 머릿속엔 자신들이 해 온 악행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릴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시선을 부딪친 그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와아아!
적들이 일제히 먼지바람을 향해 달려 나갔다.
찬영도 먼지바람 사이로 우르르 몰려드는 쉰여 명의 적들을 본 후 뒤를 돌아보았다.
타우린의 실루엣이 먼저 곁으로 다가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 뒤로 말을 탄 샤브레와 일곱 명의 워커들이 하나둘씩 옆에 섰다.
……이젠 안다.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소환한 아슬란을 두 손으로 쥔 찬영이 일행들을 향해 씩 웃어준 뒤 달려 나갔다.
* * *
그 후 남아 있는 포로는 없었다.
적은 궤멸됐고, 알카스는 완벽히 수복됐다.
남은 건 골렘뿐.
함께 들어가지 못하는 일곱 명의 워커들이 안절부절했다.
“아무래도 함께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워커들 중 한 명이 찬영에게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골렘은 쉽게 상대하기 힘든 초월적 존재라고 압니다. 저 역시 그동안 쌓아 온 갓피스의 능력들이 아니었다면……. 선뜻 싸울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모두 그 뜻을 이해했다.
각자 주어진 힘의 역량이란 건 있기 마련.
워커들도 그 차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가시지요. 공주님.”
찬영이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얘기하면서도 놀랐다.
공주의 눈빛은 전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걱정…… 안 되십니까?”
찬영이 묻자 공주가 미소 지었다.
“그래야 하나요?”
그 반문에 찬영은 문득 자신을 신뢰해 주던 제이나가 떠올랐다.
‘반드시…….’
미안했다고 얘기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다.
잠시 후 성채의 비어 있는 초소를 지나 광산의 입구와 흡사한 둥근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