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찬영이 기관실을 나갔다.
환한 빛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함성이 들렸다.
홀랜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눈부시군.”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부신 햇살 한가운데, 개방된 동문 통행로 양옆에 붙어 있는 장벽 위엔 크라이 워커들이 전진하는 모습과 쿠에르노 소속 병사들이 후퇴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눈에 띄었다.
“우아아!”
도망치기 위해 장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도 있었다.
숫자는 쿠에르노 쪽이 많았다.
하지만 사기 면에서는 크라이 워커의 완승이었다.
* * *
“샤브레 공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여신의 가호가 우릴 따른다!”
클린트를 비롯한 모든 지휘관을 잃은 쿠에르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거기에다 왕가의 피를 이은 공주이자, 총 추기경의 직함을 갖고 있는 공주가 그들의 곁을 지키고, 에머리 경이 완벽히 병력을 지휘했다.
크라이 워커의 압도는 당연했다.
“저, 정말 고맙소. 갓피스여……!”
찬영의 시선이 다시 홀랜드에게 향했다.
“더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입을 뗀 찬영은 공주를 찾고 있었다.
그녀라면…….
‘그를 치료할 수 있어.’
홀랜드가 그녀를 찾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는 찬영의 손목을 피 묻은 손으로 꽉 쥐었다.
“내 평생, 오늘 같은 날을 직접 볼 줄은 몰랐소. 정말로…….”
홀랜드는 울고 있었다.
마음 속 쌓여 있던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형의 배신, 형제임에도 기어코 서로에게 검을 겨눠야 했던 지난날…….
그리고 이젠 공주에게 진 빚을 갚았다는 안도감…….
모든 게 뒤섞였다.
찬영은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아 줬다.
저 멀리 찾고 있던 공주가 보였다.
* * *
“후우…….”
땀방울을 닦은 샤브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절해 있는 홀랜드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질 겁니다.”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뗀 그녀는 조금 지친 기색을 보였다.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찬영이 홀랜드를 쳐다봤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와 공주를 지킨 찬영은 상처 부위에서 흐르던 피들이 멎어 있는 걸 확인했다.
‘놀랍다.’
그녀가 시전한 신성 마법은 기적이 따로 없었다.
먼저 상처 부위에 남아 있던 독소들을 홀랜드의 몸에서 배출해 냈고, 곧장 홀랜드 스스로의 자생력을 극대화시켜 치유력을 높였다.
‘배울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신성 마법의 치유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었다.
‘이걸 배울 수만 있다면…….’
전투에서 누군가가 부상을 입어도 찬영이 곧바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 생각을 하던 중, 일어나려던 샤브레가 멈칫하며 비틀거렸다.
“이런.”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괜찮습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다.
‘신성력을 한계까지 사용하신 모양이야.’
이렇게 보면 신성력 또한 마법과 같다.
신체를 담보로 견뎌야 하는 부분이 있다.
공주는 사력을 다해 신성력을 쓴 게 틀림없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괜찮습니다. 홀랜드 경을 살린 것으로 충분합니다. 자, 그럼…….”
샤브레가 찬영의 곁에서 떨어졌다.
찬영은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들이 왜 충성심을 버리지 않는지 알 것 같군.’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왕국에 충성하는 존재들이 대다수다.
베이콥 영주를 비롯해 지금껏 왕국에서 만난 모두가 그랬다.
지구에서 왔기에 이해가 좀 안 가는 부분도 있었으나, 이젠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왕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을 만나 봐야 알겠지만, 공주를 이렇게 가르쳤을 왕이라면 그 성품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소탈하고 품위 있으며 왕족이라는 위치를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래 보이니까.’
찬영은 힘겹게 걸음을 떼는 그녀의 발걸음을 쫓아 눈을 돌렸다.
‘샤브레 왕가라고 했나……?’
왕가에 속한 그녀에게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큰 빚을 졌군.’
찬영이 걸어가는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나란히 걸었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시선을 돌렸을 때, 찬영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얘기를 들은 샤브레가 뭔가 얘기를 하려 입을 벙긋거렸을 때.
찬영은 이미 난전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있었다.
위치로는 열 번째 장벽이지만, 이제 왕가가 수복한 첫 번째 장벽이 된 비커의 재건이 다시 시작됐다.
* * *
“부상자는 삼십 명, 사망자는 없습니다. 그 대신 쿠에노르 측은 부상 입은 포로는 이백이십 명, 나머지는 전부 사망했습니다. 대승입니다!”
힘찬 보고에 에머리 경은 환하게 웃었다.
곳곳에서 함성을 지르는 동료들이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을 바쳐 온 용맹한 전사들이다.
‘기어코 이 에머리가 해냈습니다. 단장님…….’
그녀는 십안의 기사단의 단장, 베레스를 잠깐 떠올렸다.
고아 출신인 자신을 귀족에 가까운 기사까지 만들어 준 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명령을 저버렸으며, 급박하게 이뤄진 퇴각에도 함께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다.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하고 있으신지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승리가 믿기지 않아 그랬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꼬집어 봐도 믿기질 않는군요. 다시 장벽 안으로 돌아오다니!”
한 크라이 워커의 흥분에 에머리 경은 미소 지은 후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들의 기쁨은 당연히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첫걸음일 뿐이다.
“아직 쿠에르노의 잔당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도심 안으로 진격해서 그들을 마저 제압해야 해요.”
비커는 장벽을 뜻하는 단어만이 아니다. 도시가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비커는 완전히 수복된 게 아니기도 했다.
‘완벽히 승리하기 전까지는 멈춰 있을 수 없어.’
특히 왕국의 존망 위기가 걸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십안의 기사는 스스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그렇게 훈련해 왔다.’
에머리 경은 들뜬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녀의 뜻을 이해한 크라이 워커도 다시 긴장된 눈빛으로 물러났다.
그 후 에머리 경은 찬영에게 다가갔다. 이번 대승의 핵심이며 일등 공신이다.
‘경이로울 지경이야.’
중력을 마음대로 다루는 마법, 거기에다가 놀라운 위력을 가진,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아티팩트들까지!
특히 물의 원소를 다루는 검법을 처음 봤을 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처음 홀랜드 경이 그를 데려왔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기어코 장벽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끝났군요.”
“네, 적어도 장벽 부근까지는.”
때마침 그녀가 다가온 걸 느낀 찬영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그의 가세가 아니었다면 장벽을 수복하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그녀의 인사에 찬영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실 것 없습니다. 모두가 이뤄 낸 쾌거니까요.”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겸손 같은 게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아직 도시에 클린트 무리의 잔당이 남아 있는 걸 압니다.”
“예, 그렇지요.”
“돕겠습니다. 많은 분들께 저야말로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여러모로…….”
샤브레 공주를 떠올리던 찬영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난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홀랜드 경이 제게 말하길, 비커 장벽을 완벽히 수복하려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정예병의 구출이 시급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맞아요. 그들은 십안의 기사단과 함께 장벽을 지키는 주둔 병사들이죠. 우린 그들을 오리엔트라고 부릅니다. 후크에 의해 갇힌 병력만 대략 천 명 정도 될 거예요. 한 개 사단 규모의 절반 수준이죠.”
“확실히 그만한 숫자라면 클린트가 탐을 냈던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다른 장벽까지 뻗어나갈 세력을 갖췄겠죠. 그의 욕심은 그러고도 남았을 거예요.”
같은 부단장이었기에 에머리는 클린트를 잘 알았다.
냉정하면서도 탐욕을 가진 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아버지까지 비정하게 베어 버린 괴물이다.
홀랜드와 같은 배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찬영이 다시 말했다.
“장벽 가까이 있다면 당장 그곳부터 들러야겠군요.”
그런데 에머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문제가 있어요.”
“홀랜드 경에겐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장벽부터 장악한 뒤 그다음 계획에 있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홀랜드는 그다음 수순이라고 얘기했지, 바로 장악해야 한다고 하진 않았다.
‘비커를 다시 수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찬영에게 에머리 경이 말했다.
“그곳에는 골렘이 있어요.”
그건 지하 감옥을 지키는 수문장에 관한 얘기였다.
* * *
골렘.
본래는 마나를 활용해 자연 재해 속의 인명을 구출하기 위해 상아탑, ‘노블로스’에서 최초로 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골렘을 전쟁이나 학살에 동원하는 등 악용하는 사례가 많이 생기자, 왕국과 노블로스는 골렘에 관한 연구를 금지하고, 모든 골렘을 폐기하기로 법을 제정한다.
법은 무리 없이 제정됐고, 대륙 전역에 퍼져 노티스 여신의 뜻을 설파하는 신관들이 왕국의 결정을 대륙 전역에 알렸다.
토르잔 밀림 왕국과 혹한의 오딘 제국도 이 뜻에 동의하고 협약했다.
골렘 연구 등과 같은 마법 분야에 선두 주자를 달리는 신성 왕국이 연구를 먼저 나서서 연구를 포기한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마법 연구 수준이 낮은 그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지된 소환체인 골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칼룬 영주와 틀림없이 관련이 있을 테지요.”
칼룬 영주, 줄여서 후크 백작.
왕국의 일곱 번째 검인 그의 배신에 수도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지난날을 떠올린 샤브레 공주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현재 모인 곳은 장벽을 지키는 쿠에르노 병사들이 머무르던 작은 주점이었다.
기다란 바에 앉아 있는 건 찬영, 에머리 경 정도.
홀랜드 경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골렘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건, 찬영을 제외하고 사실 전 병력을 쏟아 부어도 힘든 일이었다.
“칼룬 영주가 이곳을 지나며 골렘을 그곳에 심어 놓은 모양이군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찬영이 오랜만에 말했다. 샤브레와 에머리 경으로부터 들은 얘기들로 인해 지하 감옥이 어떤 상황인지 전부 알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감옥에 갇힌 오리엔트들을 구할지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누면 된다.
“골렘의 위치 관련해 감옥 구조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에머리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둘둘 말린 지도를 내놓았다.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감옥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입수한 얘기가 있는데…….”
“뭡니까?”
“그곳에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로지 클린트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찬영은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한 때 심비를 불러들였던 녀석도 그랬지.’
심비와 정신이 연결된 녀석의 생명이, 바로 심비의 구속을 끊어 내는 고리였다.
그 말은 놈이 죽기 전까진 구속을 하는 제어 역할을 했단 얘기일 테고…….
‘그럼, 골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가능성 있는 얘기다.
‘다른 게 있다면 골렘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이지’
골렘은 자유 의지가 있던 심비와 달리, 제작될 때부터 지하 감옥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게끔 입력되어 있을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면서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클린트의 죽음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게 말이 된다.
‘결국 클린트는 골렘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정도의 권한만을 갖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클린트 본인에게만 한정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클린트 혼자만 그곳에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겠지.’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찬영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골렘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우린 비커 장악에 큰 어려움을 겪겠군요. 맞습니까?”
“아무래도 숫자가 적으니까요.”
대답하는 에머리 경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비커는 중소 도시다.
추가적인 지원이 없으면 완벽히 장악하긴 힘들 거다.
한 손이 열 손을 막아 내긴 힘드니까…….
찬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끝났다.
“제 친구를 불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