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걸음을 옮기던 찬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샤브레 공주가 한 얘기로 인해 마음이 복잡했다.
냉담히 돌아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당장 눈앞에 남은 전투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샤브레 공주는 꽤나 고집스럽다.
‘그렇게 두지 않으실 모양이군.’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샤브레 공주가 가까이 다가왔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직면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적들과 싸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겠죠. 두려움은 점점 커지기만 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 질문을 던지며 찬영은 샤브레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완벽한 대답 같은 게 없다는 것은 찬영도 잘 안다.
하지만 그냥 정답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샤브레 공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세요.”
찬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얼핏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의 자신에겐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고,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합니다. 또 다시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될 줄 몰랐나요? 누구도 죽지 않고 화목하리라 생각하고 이 일에 뛰어드셨나요?”
“아뇨, 하지만 동료가 죽은 게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다쳤으니까요. 아이가 넘어져서 우는 것처럼…….”
그녀가 찬영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걷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항상 생각하죠.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고.”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론 같아요. 넘어지기 두려워서 다시 걷기를 두려워하는 거죠.”
“그건……!”
찬영은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두렵고 나아가기가 힘들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혼자 길을 나섰다.
‘그래, 그렇게 혼자 싸우는 게 그들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이르렀을 때 샤브레의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에겐 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 때가 찾아와요. 혼자 바동거려도 일어날 수 없죠. 그때가 도움이 필요할 때이죠. 그 후에 우린 알게 돼요. 손을 잡으면 더 쉽게 걸을 수 있겠구나…….”
샤브레는 찬영의 대답을 바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단숨에 설득되고 감명 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그가 스스로 깨닫는 데 도움이 됐으면 했다.
“그것만 알면 돼요. 만약 그래도 손을 잡는 게 어렵다면……. 한 번쯤은 손을 건넨 이를 올려다봐요.”
샤브레 공주의 말이 끝난 순간, 찬영의 머릿속에 영주와 제이나 그리고 글로리, 로레인, 지수 등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손을 잡지 않는다면 당신도, 손을 건넨 이도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기다려야 하니까요. 서로 지쳐 버릴 수도 있겠죠.”
찬영은 그들의 잔영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날 걱정하면서 기다리겠지. 그러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함께 가지 않은 것에 그들은 죄책감을 느낄 테고, 자신처럼 후회하고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한 선택이 오히려 그들을 더 망가트려 버린다면?’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그들을 지키기 위한 게 아니고 내 편협함과 두려움을 지키기 위한 거지.’
찬영은 어느새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샤브레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계속 걷는 건 주어진 운명이지만,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는 건 자신의 선택이죠. 언젠가 당신의 손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이들이 생길 거예요. 그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내가 손을 건넬 준비…….”
“그래요, 모두가 불확실한 운명 위를 걷고 있으니까요. 누구든 넘어질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찬영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 한편엔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은 이기적인 선택이라 할지라도, 홀로 떠나는 게 그들을 지키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가올 결과는 암담했고 참혹했다.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규복은 절대로 이런 선택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처럼 이기적으로 굴었을까?’
아니, 이렇게 바보같이 굴지는 않았을 거다.
이미 한 번 소중한 사람을 잃어 봤기에 더욱 잘 알았을 거다.
손을 잡아야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그래야 계속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갔겠지.’
주위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받으며, 사력을 다해서라도 그는 이 일을 끝마쳤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게 이규복, 그가 내게 남긴 제대로 된…….’
찬영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사명!”
동시에 찬영도 모르는 새, 그의 동공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착용하고 있던 렌즈마저 덮어 버릴 정도의 강한 빛이었다.
띵! 띵! 띵!
막상 빛이 물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찬영은 그 대신 빠르게 여러 개의 창이 눈앞에 나타나는 걸 확인했다.
분명 낯선 변화가 시작되는 게 틀림없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사명으로의 첫걸음, 인내의 업적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신성력이 3,000 상승합니다. 또한 소울 카드 1장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사명의 첫 걸음으로 인해 별들의 속삭임, 1/10을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별들의 속삭임이 5/10가 되었습니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은 후 신체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사명의 첫걸음이라고?’
찬영은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내가 한 모든 고민이…….’
사명을 향한 첫 걸음이었으며, 새로운 속삭임을 깨운 열쇠였던 것이다.
“윽……!”
그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별들의 속삭임이 찾아왔다는 신호다.
‘익숙해지지 않는군.’
별들의 속삭임이 들려올 때면 함께 찾아오는 어지러움과 통증은 아무리 견뎌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겨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젠 잘 알고 있다.
‘목소리에 집중하자.’
찬영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힌 채로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집중했다.
츠츠!
처음엔 바람소리처럼 들리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명확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안개처럼 한 장면이 눈앞에 들어왔다.
* * *
두 사람이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두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한 이름이 낯익었다.
-베아트리체…… 정말 그곳에 도착한다면 우린 멸망을 막을 수 있소?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의심을 버려요, 메테우스. 여신께서 내리신 유일한 신탁이에요.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여신은 이미 우리를 버리셨소. 그런데도 그 신탁이 정녕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그녀가 당신을 따르지만 않는다면 난 진작 당신과 다른 길을 갔을 거요.
밀실에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나가고 남은 사람이 깜깜하던 밀실 안에 초를 밝혔다.
찬영은 서서히 밝혀지는 불빛 속에 얼굴이 드러난 게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
그때 촛불을 응시하던 베아트리체의 고개가 관망하던 찬영의 시선과 부딪쳤다.
‘분명 나를 보고 있어.’
그걸 느끼자마자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달싹였다.
-잊지 말아요. 의심이 우릴 분열시켰어요.
‘내게 하는 말이야.’
그걸 인지하자마자 찬영은 다시 온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경험해야 했다.
* * *
그사이 지켜보던 밀실 풍경이 사라지고, 찬영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찬영은 방금 전의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이제껏 별의 속삭임은 도망친 별들의 일과 그 별들로 인해 정령계에 생긴 여파를 알려 줬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한때 베아트리체가 살던 세상의 일부를 보여 줬다.
‘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걸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별의 도주, 그리고 그 여파로 시작된 전쟁…….
그 전쟁 안에 속해 있던 베아트리체와 메테우스라는 존재를 보았다.
‘그렇다면 분열된 둘의 관계가 별의 속삭임에 포함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얘기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이 추측이 맞다면 별들의 속삭임은 언젠가 멸망 끝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사라진 별들의 정체, 그들의 힘을 깨울 방법,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알고도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전대 갓피스들의 이야기까지…….
찬영은 흐릿하던 것들이 점점 구체화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조언이 이 모든 걸 시작하게 만들었어.’
찬영은 자신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는 샤브레 공주를 바라봤다.
단언컨대 샤브레의 조언으로 하여금 시작된 생각이 ‘사명’으로서 가져야 할 어떤 조건을 완성시킨 게 틀림없다.
그게 별들의 속삭임을 불러온 것이겠지.
‘시스템은 늘 내 의지에 따라 성장해 왔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지금처럼!
찬영은 다가온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신성력 10,000 업적 달성으로 인해 신성력과 연관 있는 소울 카드의 영혼들이 10%씩 상승하였습니다.(단, 현재까지 보유된 영혼에 한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갖가지 변화들 중, 신성력의 유입으로 인한 성과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계속 커져 가고 있어!’
생각하던 중에도 손끝과 발끝에서 시작된 신성력의 파도가 팔과 다리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한계치 이상으로 나아간다.’
신성력의 갑작스러운 수치 상승에 몸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여신의 힘을 빌려다 쓰는 개념이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주체는 나이니까.’
찬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목표가 있기에 참을 수 있었다.
당연히 이전의 한계치보다 높은 양의 신성력을 신체가 견디게 되리라!
‘잠깐이야.’
찬영은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내 신성력의 파도를 견뎌낸 것이다.
그 덕분에 몸속에서는 여신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신성력이 바다처럼 느껴졌다.
‘이제 이 정도라면 6급 신성 마법을 여러 번 사용하고도 남겠어.’
감탄하고 있는 동안 샤브레가 다가왔다. 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는 걸 감지한 것이다.
“괜찮나요?”
“아…….”
찬영은 잠시 나머지 창을 놔두고 다가온 샤브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제가 느낀 그 힘은……?”
“느끼셨다시피 신성력입니다.”
대답과 함께 샤브레를 바라보았다.
별들의 속삭임부터 신성력까지 그녀 역시 이 힘을 확연히 느꼈을 거다.
놀라고도 남았을 텐데…….
하지만 샤브레는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다.
“제가 신성력을 쓰는 것에 놀라진 않으셨습니까?”
“놀랐습니다. 하지만 여신께서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하셨으니, 힘을 내주신 것도 당연한 일이죠. 제가 놀란 건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그게 아니면 무엇 때문에?
찬영의 의아한 눈빛 속에 샤브레가 말했다.
“사실 변화가 올 만큼의 기대를 가지지 않았답니다. 조언은 그저 조언일 뿐, 달라지는 건 선택의 문제이니까요. 그런데, 선택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군요. 여신께서 아무 이유 없이 힘을 내려 주진 않으셨을 테니까…….”
샤브레는 찬영에게 꽤 인상 깊었다.
선택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쉽지 않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봐야 중요한 기회의 순간에 자신을 바꿀 수 있다…….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거지.’
샤브레는 찬영의 안정된 눈빛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불안정하고 흔들린 감정들이 이젠 씻은 듯이 사라져 있다.
그는 나아갈 준비가 된 거다.
“공주님 덕분입니다.”
“아뇨, 이미 답을 알고 계셨어요.”
“예, 어쩌면…….”
그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영주, 로레인, 제이나 등 수많은 동료들이 많은 조언과 손을 내밀어 줬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 언저리에 박혀서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미 난 알고 있었어.’
언젠가 그들의 손을 잡아야 제대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선택이 사명의 시작을 가져왔어.’
찬영은 입술을 꾹 닫았다. 이젠,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또 흔들린다면…….’
주저 없이 손을 잡을 것이다.
찬영이 공주에게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 후 찬영이 다시 장벽으로 돌아섰다.
이제 가야 한다.
클린트의 귀환이 늦어질수록 장벽을 지키는 적들은 의심할 거다.
그러니 아직 해야 할 일, 공주와 할 얘기가 산더미 같지만 잠시 뒤로 미뤄 둔다…….
그때 찬영이 샤브레에게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샤브레 뒤에 긴장하며 서 있는 홀랜드 경이 보였다.
* * *
비커로 진입하는 장벽의 입구 중 하나인 동쪽 통행로를 지키는 한 병사가 저 멀리 먼지구름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