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찬영은 부서진 마차 안을 힐끗 쳐다봤다. 쓰러져 있는 공주의 몰골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개새끼.’
얼핏 몰골만 봐도 얼마나 고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대로 주물러 대며 공주를 마치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찬영은 이가 갈렸다.
뿌드득!
순간 찬영의 머릿속에 이규복의 잔상이 스쳤다.
요즘 들어 매일 드는 그에 대한 생각은 마음이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조금만 빨랐다면! 놈들의 앞길을 자신이 가로 막았다면……!’
그때의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자연스레 생각의 끝은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너희들만 없었다면……!’
불꽃을 휘감은 주먹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린트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파파파팟!
그간 상승해 온 근력과 강한 마나 등을 바탕으로 펼친 염왕권의 파괴력이 가져온 결과가, 찬영의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구구구구!
찬영의 주위로 땅이 울리고 바람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펑! 펑!
일 권, 일 권이 클린트의 가슴을 뚫고 땅을 내리찍을 때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바닥에 가해졌다.
쩌저적, 클린트가 누워 있던 자리가 함몰되었다. 비산하는 불꽃 회오리가 그 주위를 벽처럼 둘렀다.
츠츠츠!
그러자 근방의 땅거죽이 뒤집어지는 것도 모자라 땅이 사방팔방으로 갈라졌다.
멀리 서 있던 홀랜드에게도 화끈거리는 불길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
반사적으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전멸했어!’
그가 뛰어들자마자 마을을 휘저었던 클린트의 별동대는 꼼짝 없이 쓰러졌다.
그들이 자랑했던 투명화도 소용없었다.
어떻게 아는 건지 찬영은 사라진 그들을 쫓아 전부 찢어 버리듯이 베었다.
그의 검 끝에 닿는 모든 존재가 쓰러졌다.
‘단신으로 이게 가능한 얘기인가?’
직접 보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큼, 홀랜드는 도통 이 모든 광경이 믿기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렵다.’
아군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선한 감정을 지녔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린다.
직접 그의 분노를 마주한 건 아니지만…….
그건 그가 자아내는 위압감이었다.
자신이 찬영에게 압도된 걸 홀랜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찬영을 바라보고만 있던 홀랜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럴 때가 아니야!’
그가 클린트의 별동대를 상대하는 동안, 자신은 공주를 구해야 했다.
“공주님!”
얼른 마차로 뛰어 들어간 홀랜드는 의식을 반쯤 잃은 샤브레를 발견했다.
퉁퉁 부어 버린 얼굴 위로 피가 흠뻑 젖어 있었다.
홀랜드는 황급히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그녀를 깨웠다.
“의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십시오! 공주마마, 공주마마!”
그녀를 부르짖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쉽게 빛을 내지 못했다.
‘클린트,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한때 형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던 과거를 지우고 싶을 만큼, 홀랜드는 클린트에 대한 증오심이 커져 갔다.
아니, 증오도 모자라 이제 그에게 거는 일말의 기대조차 없다.
적어도 마음을 가진 존재라면…….
‘후크에게 충성심을 보이고자 아버지를 죽이진 않았겠지!’
그때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홀랜드.
그는 찬영에 의해 죽어 갈 클린트에게 등을 진 채 뒤돌아보지 않았다.
홀랜드는 클린트가 죽는 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보다 다쳐 있는 공주가 더 눈에 밟혔다.
“이것부터…….”
홀랜드는 서둘러 그녀의 팔을 속박하고 있는 홀리 프레셔를 자신이 가진 검으로 그대로 내려찍었다.
챙!
의외로 외부 충격엔 약한 구속구들이었는지, 희미한 오라가 깃든 홀랜드의 검에 구속구들은 단숨에 잘려 나갔다.
그 후 다시 검을 거둔 홀랜드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공주님……!”
조금씩 의식을 차리기 시작한 샤브레가 떨리는 눈가를 들어 흔들리는 눈빛으로 홀랜드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홀……랜드.”
익숙한 그의 낯빛이 들어온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어깨를 들썩였다.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홀랜드가 황급히 그녀를 막으려 했다.
“나는 괜찮……아요.”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피로 얼룩져서 홀랜드와 뒤섞여 흐릿하게 보였지만 조금씩 머릿속이 맑아져 간다.
방출되지 못하고 몸 안에 가득하던 신성력들이 온몸을 휘돌며 말하고 있다.
일어나라고……!
그녀의 몸속에 흩어져 있던 신성력이 일제히 응축되며 발산됐다.
그다음 순간.
‘트라우마 디파이언스.’
6등급 신성 마법이 펼쳐졌다.
방출과 함께 얇은 거미줄 같은 빛 무리가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상처 부위의 재생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홀랜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로 물러났다.
‘과연……!’
총 추기경이란 직함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홀랜드는 물러서서 그녀가 스스로 치유를 해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길 잠시, 상처가 전부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거동할 만큼은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의 회복 과정을 지켜본 홀랜드에겐 기적 그 자체였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그녀가 사경을 헤매게 됐다면, 자신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건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피가 섞인 형제가 벌인 일이니 벌을 달게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샤브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대는 내게 빚진 것이 없어요.”
고개 숙인 홀랜드를 내려다본 그녀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홀랜드 경, 그대의 명예는 여전히 고결합니다. 제 검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하겠지요?”
“물론입니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키겠나이다.”
홀랜드는 에머리와 함께 공주의 검이 되겠노라 다짐해 왔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다.
그의 맹세는 여전했다.
“고맙습니다. 홀랜드 경.”
미소로 화답한 샤브레는 마차를 벗어나며 물었다.
“빛을 보았어요.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신탁을 받으셨습니까?”
놀란 홀랜드를 보며 샤브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서히 불길이 사라져가는 찬영을 쳐다봤다.
“예.”
그건 그에 대한 신탁이 틀림없었다.
* * *
찬영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흔적도 남지 않게 타 버린 클린트의 시신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가 죽은 것에 대해선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그는 당연히 죽었어야 했고 그뿐이다.
한참 그를 내려다보니 팔에 박혀 있는 차원의 돌이 보였다. 찬영은 그것을 흡수했다.
“놀랍군요.”
그러던 중에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무게감 있지만 전반적으로 따뜻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공주.’
어깨 너머로 그녀가 다가오는 것쯤이야 진작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찬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피로 얼룩져 있던 얼굴이 다시 어느 정도 제 형태를 되찾은 지금,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찬영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다.
‘설마, 그녀가……?’
그녀의 찰랑이는 은발이, 은은한 미소가 모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 자신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마침 한 발짝 더 다가선 그녀가 눈을 빛냈다.
“유혹의 돌은 그들의 전유물인데 그것을 흡수하다니…….”
찬영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공주는 차원의 돌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긴…….’
총 추기경의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 동시에 공주의 자리에 있는 그녀다.
베이콥 영주가 아는 만큼 그녀가 뉴 빌드나 차원의 돌에 대해 아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교황까지 왕에게 돌아선 지금의 대륙의 상황 상, 더 이상 은밀히 나눠야 할 이야기도 아니었고…….
“차차 설명 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먼저,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도움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찾아온 갓피스여.”
공주는 그러면서 곁에 선 홀랜드를 쳐다봤다.
찬영은 그 시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에 대해 이미 충분한 이야길 들으신 모양이군.’
홀랜드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전해 준 모양이었다.
찬영으로서는 오히려 더 편했다.
자잘한 설명으로 시간을 끌기보다 서로 지금 당장 필요한 얘기만 나누면 됐으니까.
“전 폐하를 도울 생각입니다.”
“압니다.”
미소 짓는 그녀에게 찬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열 번째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이만 홀랜드 경과 함께 샤우트 숲으로 돌아가 계시지요.”
찬영은 혼자가 편했다.
계획대로 공주를 구했고 클린트의 죽음까지 본 이상 찬영은 더 거칠 게 없었다.
열 번째 장벽을 군림하는 폭군을 죽였으니, 그 뒤에 자리 잡은 잔당을 처리하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려고 왔으니까.’
찬영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시선을 돌려 찬영의 주먹을 바라보던 공주가 말했다.
“아뇨, 전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게 제 소임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이 있어야 제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찬영은 솜털이 쭈뼛하고 곤두섰다.
‘설마, 이미 알고 있었다고?’
어차피 대화를 나누며 순차적으로 얘기해 주려 했던 것이긴 했지만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단 사실이 놀라운 건 사실이다.
찬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주님께서 갓피스가 되실 분이라는 걸요.”
“신탁을 들었습니다. 여신께서 속삭이시더군요. 소임을 해야 할 때가 찾아왔다고……. 스스로 알을 깨고 갓피스가 되어라. 이를 이뤄 줄 사명이 찾아올지어다.”
찬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먼저 얘기해 주기도 전에 스스로 갓피스가 될 거라는 걸 깨닫는 존재는 그녀가 처음이다.
‘그럴 이유가 있는 걸까?’
글쎄, 모르겠다.
‘로레인이 알면 무척 놀라겠군.’
아니, 어쩌면 자신이 떠난 후에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공주의 얼굴을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 그렇겠지.’
당황했을 로레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 찬영이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이 필연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갈 때쯤 샤브레가 갑자기 물어왔다.
“지쳤나요?”
뜬금없는 질문처럼 보였으나 하지만 찬영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보이십니까?”
“네, 동시에 두려워 보이는군요.”
찬영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서 구구절절하게 지난 이야기를 싶은 생각은 없었다.
침묵하는 찬영에게 샤브레가 마치 찬영의 마음을 꿰뚫어본 사람처럼 말했다.
“모두를 지킬 순 없어요. 누군가를 잃을까 봐 겁이 나나요? 아니면 이미 잃어버리고 두려워졌나요?”
그러자 찬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것도 신탁으로 들으신 겁니까?”
“아뇨, 경험 같은 것이죠. 여신을 모시면서 수양해 온 신관에겐 마음의 눈이 예민해진답니다. 그 눈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많죠.”
“하지만 오늘은 틀리신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행동과 눈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죠.”
찬영은 그녀의 말을 듣기가 거북했다.
아픈 마음이 자꾸 들춰지는 기분이다.
“그쯤 하시죠.”
냉각된 분위기에 홀랜드가 샤브레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공주님께 해를 가하는 건 용서할 수 없소.”
홀랜드의 눈빛엔 어느새 경계심이 서렸다.
아니 저 눈동자는 분명 자신을 두려워하는 거였다.
찬영은 그 눈빛을 보자마자 문득 허탈함을 느꼈다.
‘왜?’
찬영은 자신이 죽인 적들의 시신을 둘러봤다.
‘그들을 잔인하게 죽인 게 그에게 경계심을 불러온 건가?’
찬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키고자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오히려, 같은 편에 선 이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 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샤브레의 질문에 더 강렬해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죠. 그들을 죽임으로써 두려움이 사라졌나요?”
찬영은 자신이 죽인 클린트를 내려다봤다.
‘나아졌나?’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찬영의 눈동자가 다시 견고해졌다.
그녀로 인해 엉켜 버린 마음을 뒷전에 뒀다.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저는 오늘 반드시 열 번째 장벽을 넘어설 겁니다.”
찬영은 클린트 무리가 남긴 물건 몇 가지를 챙긴 후 냉담히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샤브레가 홀랜드에게 말했다.
“여신께서 왜 제가 그의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셨는지 알겠네요.”
빙긋거리며 미소를 지은 그녀가 찬영의 뒤를 쫓으려 하자 홀랜드가 그 앞을 막아섰다.
지금의 찬영에게선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게 걱정이 된 것이다.
“괜찮아요. 홀랜드 경.”
“하지만 공주님, 혼자만의 몸이 아니신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압니다. 하지만…….”
그녀가 찬영의 뒷모습을 쫓았다.
“여신께서 제게 주신 소임을 다해야 할 것 같군요. 아직 못 다한 얘기를 해 줘야 해요. 아주 많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찬영에게 새로운 운명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