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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72화 (172/248)

# 172

172화

‘비가 오는군.’

금발 머리색과 동일한 색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클린트는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원했다. 아마 이 정도 비라면 샤우트 숲을 불태우던 화재도 금세 진압될 것이다. 하지만 식어버린 숲엔 타고 남은 잿더미만 남을 뿐, 녀석은 또 한 번 절망하게 될 것이다.

‘홀랜드.’

자신의 형제이자 한때 자신을 존경했던 아우. 하지만 녀석은 어릴 때부터 언제나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다. 홀랜드는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으나 명예를 중시했다.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권력이 없으면 순진함으로 포장된 명예 따윈 바퀴 달리지 않은 마차나 다름없다.

‘장벽만 지키면서 왕국의 개로 희생하기보다는 차라리 장벽을 열고 권력과 부를 얻는 게 낫지.’

이미 한 번 멸망이 온 세계다.

시간이 멈추고 모두가 봉인되었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재건되었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멸망 속에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왕국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럴 바엔 자신의 세력을 일구면서 강한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는 편이 낫다.

같은 부단장인 에머리와 아우인 홀랜드, 그 둘과 자신이 같은 물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다.

‘멍청한 것들.’

클린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마음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희들은 계속 그렇게 시궁창에 살아라.’

어차피 그것들은 이제 자신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 법.

놈들이 수장으로 있는 한, 그들은 오늘의 일을 떠올리면서 샤우트 숲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대신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으며 장벽 너머로 다시 돌아오기만 꿈꾸겠지.

하지만 오늘처럼 무너지고 또 무너지게 될 것이다.

메마른 땅처럼 희망 한 점 없는 현실 속에…….

‘너희들에게 내릴 비 따윈 존재하지 않겠지.’

클린트는 씩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철퍽.

그의 철갑 부츠에 진흙이 튀었다.

시종들이 행여나 그가 비에 흠뻑 젖을까 봐 황급히 우산을 가져왔다.

시종들이 우산을 씌워 주자, 클린트는 멈춘 마차로 다가갔다.

속박되어 있는 공주와 함께 시간을 죽이다 보면 비커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끼익!

시종들에게 갑옷을 벗기라고 명해 가벼운 차림새가 된 클린트가 마차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쏴아아!

빗줄기도 더욱 거세졌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밖의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덜커덩!

마차 문이 완전히 닫히자, 행렬이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 * *

클린트는 마차 안에서 공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공주께선 꽤나 모멸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는구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내내 그랬다.

지독한 년.

하긴, 그렇게 독했으니 여기 열 번째 장벽 너머 샤우트 숲까지 혼자 도망쳤겠지.

클린트는 ‘픽’하고 가볍게 웃으며 공주를 가만히 위 아래로 훑어봤다.

‘더럽게 예쁘군.’

왕족은 신이 내린 고귀한 피가 흐른다더니, 그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은한 은발 사이로 비춰지는 새하얀 피부, 쉽게 찾아보기 힘든 금빛 동공과 딱 붙는 갈색 경갑 사이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몸매의 굴곡은 그녀를 더욱 탐스럽게 느끼게 만든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침이 바짝 마른다.

“공주에 대한 소문은 오랫동안 들어왔소. 실제로 보니 무척이나 아름답구려.”

클린트는 열 번째 장벽 같은 변방에서 공주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과의 교류로 전해 받은 힘과 권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우리가 마주 보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대답도 못하는 공주를 두고 떠들어 대던 클린트는 그녀를 대놓고 희롱하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파밧!

보랏빛 기류가 그가 입고 있는 오른팔 건틀릿에 휘몰아치더니, 펼치고 있는 손바닥 위로 보랏빛 아지랑이가 솟아올랐다.

그 아지랑이는 곧 손바닥 안에서 작은 불꽃이 나선을 그리다가 소용돌이로 변했다.

“마법사도 아닌 내가 이런 힘을 다룬다오. 놀랍지 않소?”

공주는 흔들림 없는 차분한 눈길로 클린트를 바라보았다.

클린트는 그 고요한 눈빛을 망가트리고 싶은 욕구가 한껏 들었다.

왕국의 법과 위엄은 더는 자신을 누를 수 없다.

‘나는 아버지 같은 멍청한 기사 노릇이나 하고 살진 않을 겁니다.’

공주를 품에 안는 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열 번째 장벽에서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치를 떨고 두려워할지언정 덤비진 못하는……!

구속구도 모자라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그녈 보고 있자니, 클린트는 아랫도리가 불끈거렸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공주의 하얀 피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공주는 눈썹을 찡그렸으나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몸을 비틀지도, 눈빛이 떨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같은 눈동자였고 흔들림 없는 차분함이 있었다.

“두렵지 않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클린트가 그녀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 주며 물었다.

물론 반대 손은 언제든지 혀를 깨물 그녀를 대비해 튀어 나갈 준비를 한 채였다.

공주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왜 두려워해야 하지?”

“그대의 처지를 보시오. 그대가 경멸해 마지않는 처지에 있는 내가 그대의 고운 살결을 매만지고 있지 않소? 그대는 반항도 못할 처지이고.”

클린트는 그녀의 피부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경갑을 풀어헤치기 시작한 클린트가 힐끗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버티려는 것이요? 그래 봐야 모멸감은 짙어만 질 텐데? 고귀한 몸이시니까.”

샤브레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보며 비웃었다.

“무지하구나.”

“뭐?”

“왕족이 고귀한 것은 여신께서 우리에게 특별함을 내려 주셔서가 아니다. 무거운 중책의 자리에 올라섰기에 그 무게를 견디는 왕관이 특별해 보이는 것이지. 헤라클 왕가는 네놈의 비루함 따위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크큭, 잘도 떠들어 대는구려.”

클린트가 그녀의 경갑을 집어던졌다.

이제 곧 그녀의 몸을 깔아뭉갤 것이다.

“그래 봐야 빌어먹을 현실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라오. 왕관의 무게보다 그대 위에 올라가 있을 내 무게가 더 피부에 와닿을 테니까.”

공주는 끝까지 담담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똑똑히 클린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내 몸을 갈기갈기 부숴 놓는다 하더라도 너와 나의 차이는 극명할 것이다. 비루한 자여.”

“계속 떠들어 보시오. 어차피 칼자루를 쥔 건 나, 클린트요. 현실을 곧 인정하게 될 것이요.”

클린트가 바지춤을 풀어헤치며 그녀의 턱을 콱 쥐었다.

그녀는 끝까지 클린트를 비웃었다.

“한낱 내 육신을 가져 봐야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네가 도취된 허무한 허상일 것이다.”

클린트는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했다.

금색 눈동자가 빛을 발하며 클린트를 고요히 향했다.

그 눈빛에 클린트는 흠칫했다.

쉽게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압도됐다.

무척 당혹스러웠다.

분명히 모든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는데…….

‘왜?’

잠시 그녀에게 떨어졌던 클린트는 인상을 썼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 불끈거리던 아랫도리가 차갑게 식어 버렸다.

대신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틀림없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빠드득!

클린트는 이를 갈았다.

그가 다시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외쳤다.

“내 오늘 너를 내 앞에 조아리도록 만들어 주지.”

클린트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 * *

그 시각, 클린트의 행렬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미끄러지듯 장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몇몇은 하품하며 지루해하기까지 했다.

몬스터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손에 넣은 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

클린트의 부하이자 한때 기사였던 부하가 곁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좋은 건 대장이 다 가져가겠어. 안 그래?”

“들으시겠다, 인마!”

“왜, 맞잖아. 공주 팬티를 언제 또 들여다 보겠어? 후크에게 넘겨주면 끝일 텐데 말이야.”

“끝나고 나면 우리도 맛 좀 보여 주겠지. 안 그래?”

“그런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기사들은 더 이상 장벽을 지켰던 정의로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진 힘의 노예가 되어 있었고, 팔에 이식된 차원의 돌에 취해 점점 광기만 늘어 가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결정이란 자위했던 그들은 어느새 스스로의 위치에 만족해하며 탐욕을 부렸다.

그리고 다시 장벽 안으로 진입하기만을 기다렸다.

진입하면 누구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

발에 차이는 여자는 언제든 품을 수 있었고, 왕국의 율법 따위 가뿐히 무시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다.

처음 말을 걸었던 기사가 하품을 하더니 동료에게 말했다.

“일단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구먼.”

하지만 그다음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곁에 있던 동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될 거야.”

“뭐야?”

낯선 목소리에 반응한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의 눈앞으로 뭔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서걱!

쏟아지던 빗줄기가 우박, 아니 얼음 덩어리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빗소리와 흥분감에 도취된 클린트가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밖에서의 소리 따윈 그에게 더 이상 관심 밖의 일.

오로지 모든 신경이 공주에게 향해 있었다.

짝!

“망해 가는 왕국의 공주 따위가 뭐라고!”

고개가 홱 돌아간 그녀.

뚝뚝.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여신이 내 곁을 지키시고 성녀께서 내게 소임을 맡기셨으니 나는 버텨 낼 것이다. 버티는 것이 내 삶의 소임이라면…….’

여신의 뜻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그녀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영광이 여신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임하게 하옵시고…….’

자신의 멱살을 잡아챈 클린트가 보였다. 놈의 눈엔 광기가 가득했다.

퍽!

다시 한 번 얼굴 위로 쏟아진 충격.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과 마지막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항상 여신의 품안에 영원할 수 있게 하옵시며…….’

“비명을 질러라! 살려 달라고 말해! 내 앞에서 네 고귀함을 포기해라! 그럼 살려 주마!”

고함 친 클린트는 더욱 힘을 줘서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죽이면 안 되지만, 당장은 눈앞의 공주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감당할 수 없는 살의가 클린트의 피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눈이 붉어진 클린트의 광기는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

쏟아지는 주먹세례에 샤브레도 점차 의식이 혼미해져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억지로 뜨며 사력을 다해 기도를 이어갔다.

‘그 안에선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둠뿐이라 할지라도, 모멸과 심연을 견디겠나이다. 성심을 다해 여신께서 남기신 소임을……….’

그다음 순간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어둠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같은 따뜻함.

그건 분명 익숙한 느낌이었다.

‘여신이시여………!’

그녀는 솜털이 곤두섰다.

빛이 눈앞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드르륵!

동시에 창가의 문이 벌컥 열리고 밖에서 손 하나가 뻗어졌다. 금빛으로 물든 광휘(光輝).

바깥의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던 클린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뒤로 몸을 뺄 겨를도 없었다.

“흐읍!”

대응할 새도 없이 멱살이 잡힌 클린트는, 순식간에 좁은 창문으로 빨려 나가듯 끌려갔다.

쐐액!

클린트는 두 손에 화염을 일으켜 금빛 휘광에 휩싸인 팔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하지만 팔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 이런!’

결국 벗어나길 포기한 클린트.

그는 마차 벽 반대편에 있을 적을 겨눴다.

팔이 아닌 놈의 몸통을 노리기 위해!

“죽어라!”

‘화구火球!’

양손에 솟아오른 불의 구체가 한데 합쳐져 마차 문을 향했다.

화르륵!

순식간에 문을 녹여 버린 화구가 벽을 태우며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쾅! 화르륵!

화구가 강한 풍압을 일으키며 상대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클린트가 자신의 멱살을 내려다봤다.

‘곧 손에 힘이 풀리겠지.’

막, 조소하던 그때.

클린트의 표정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타, 타들어갈 거 같아!’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클린트의 온몸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그것은 그가 일으킨 화구와 동일한 위력의 불꽃이었다.

금강신장의 천혜금골이 발동한 것이다.

그것은 200%의 증가된 피해를 상대에게 되돌리는 반탄력.

“크아아아!”

끌려가던 클린트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모자랐던지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사지를 부르르 흔들며 발버둥 쳤다.

찬영은 잡아챈 그를 그대로 바닥에 엎어트린 후, 주먹을 들어 올렸다.

화르륵!

클린트의 불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 힘이 나선형의 바람을 일으키며 휘돌았다.

‘염왕권.’

쾅!

불꽃으로 휘감긴 주먹을 그대로 클린트의 가슴 위로 내려찍은 찬영.

“크헉!”

비명을 지르던 클린트가 헛바람을 들이 삼키며 피를 토했다.

찬영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찬영이 부들거리는 클린트를 보며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무표정한 찬영의 눈동자에 깊은 살의가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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