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 * *
크라이 워커.
왕국 백성들이 그들을 그리 부른 건 열 번째 장벽, 비커가 무너진 직후였다.
샤우트 숲을 근거지로 한 크라이 워커의 무리는 장벽 밖의 저항군으로서 피난민과 근방의 패잔병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다시 장벽을 수복하고, 수도로 진격한 후크를 뒤쫓는 게 우리들의 최종 목표였소.”
홀랜드가 입을 뗀 후 찬영을 쳐다봤다. 찬영이 갓피스란 걸 알게 된 직후였고, 간략하게나마 현재 그가 겪어 온 일들에 대해 들은 뒤다.
“그랬군요.”
찬영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에머리를 쳐다봤다.
눈길이 부딪친 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원군이 오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예, 로일 영주님과 베이콥 영주님의 협조 아래 원정대가 집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겠군요.”
“예, 그럴 겁니다.”
“그럼 당장의 원군을 기대하긴 힘들겠군요.”
“원군이 그 두 분 휘하의 군대만을 뜻한다면 그렇겠죠.”
“음? 다른 원군이 또 있나요?”
지잉!
조용히 아슬란을 꺼내 손에 쥔 찬영의 주위에선 싸늘한 한기가 휘돌기 시작했다.
그건 무언의 대답이다.
“저 역시 지원군입니다. 통곡의 산맥을 건너온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클린트를 쫓아가시죠.”
“클린트를?”
에머리는 침묵했고, 홀랜드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남아 있는 병력을 몰아 본거지로 이동하고 있는 클린트를 쫓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에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신중해야 해요.”
에머리도 홀랜드에게 들어서 찬영이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 뛰어난지는 대강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주저되는 건 사실이다.
자칫하면…….
‘잔존 병력까지 모두 잃게 돼.’
그럼 유일한 터전이었던 샤우트 숲은 더 이상 터전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에머리는 그게 두려웠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홀랜드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솔직히 치욕적이다.
‘클린트는 또다시 우리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틀림없다. 모두를 궤멸시키지 않고 생존자들을 절반 이상 남기고 떠난 건 일종의 메시지일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니 너희의 한계를 깨닫고 장벽 안쪽은 넘보지 마라.
‘……우리가 두려워하길 바라겠지.’
클린트는 자신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홀랜드가 찬영을 쳐다봤다.
“그의 의견이 맞다고 봅니다.”
에머리가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자면 모든 걸 전부 걸어야 해요. 모두 죽거나, 혹은 반격할 재기의 발판이 마련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죠.”
“예, 압니다.”
“그래도 강행해야 한다고 봅니까?”
“네, 그래야 합니다. 우린 그분에게 우리가 지키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에머리가 수심에 잠긴 눈빛으로 고개를 떨궜다.
‘죄책감.’
찬영은 에머리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조금이나마 엿봤다.
덩달아 몇 가지 기억들이 지금의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드워프가 죽기 전 얘기했던 그녀의 존재.’
그리고 지금 홀랜드가 말한 지켜 주겠다고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분이란 존재.
‘이 둘이 동일인이라면?’
찬영은 구체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가만히 말씀들을 듣다 보니, 클린트 무리가 갑자기 이곳을 습격해 온 이유가 그녀라는 분 때문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소, 그분은 왕국의 공주님이시오. 왕세자의 누이이기도 하시며…….”
홀랜드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다음 찬영조차 예상 못한 얘기가 들려왔다.
“노티스 교단의 총 추기경이시오. 교황 다음으로 추기경들을 이끄는 최고의 자리에 계신 셈이지.”
찬영은 클린트 무리가 진짜 원하는 게 그녀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얻을 수 있는 게 많겠죠. 폐하를 흔들어 놓을 수 있고 나아가 신관들까지…….”
“맞소.”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이곳까지?”
찬영은 이해가 쉽게 되질 않았다.
공주과 추기경의 신분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수도 장벽 안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긴 가장 변방의 10번 장벽, 비커다.
“그건 교황의 배신 때문이오. 몰아친 후크의 병력이 장벽을 넘어오기 시작했을 때, 공주님은 교황과 함께 7번 장벽 파베르로 향하셨소. 장벽의 수비 병력을 돕기 위해서였지.”
뒷얘기에는 에머리가 이었다.
“그때 교황이 자신이 이끄는 신관 세력을 이용해 공주님을 납치하려고 했으나, 교황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던 공주께서는 은밀히 도주해 샤우트 숲에 도착하시게 된 거죠.”
“하지만 결국 그 흔적을 찾아낸 거로군요?”
찬영의 질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클린트 무리가 공주님과 함께 무사히 10번 장벽 안에 도착하게 된다면……. 공주님은 후크의 손에 넘어가겠군요.”
홀랜드가 중얼거렸다.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이지.”
“그럼, 더욱 더 가야겠습니다.”
찬영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뉴 빌드에게 유리한 패를 이렇게 쉽게 빼앗길 순 없다.
공주를 빼앗긴다면 왕과 왕세자는 분명 흔들린다. 그들이 흔들리면 왕국의 마지막 보루가 사라지는 것이며, 베이콥 영주와 로일 영주의 원군 역시 갈 길을 잃는다.
‘왕이 버틸 수 있게 도와야 해.’
찬영이 에머리를 쳐다봤다.
“결정은 끝나셨습니까?”
“그들은 투명화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요. 그를 대처할 방법이 없다면 뜻을 함께 할 수 없어요.”
찬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투명화 마법이라…….’
녀석들이 사용하는 게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는 찬영은 본 적이 없으니 감이 잡히는 게 없다.
다만 뉴 빌드와 관련 있는 그들에게 의심해 볼 수 있는 건 있었다.
“혹시 투명화 마법을 사용한 그들에게 짙은 보라색 빛이 일렁이진 않았습니까?”
“어떻게……?”
전투에서 싸워 본 적도 없는 찬영이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자 에머리의 눈빛에 놀라움이 서렸다.
“그럼 됐습니다.”
찬영이 다시 렌즈를 착용했다.
‘녀석들 몸에도 차원의 돌이 이식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이제껏 차원의 돌의 힘을 빌린 모든 적들은 강렬한 보랏빛을 일으켰다.
‘확실해.’
정황상 클린트가 뉴 빌드에게 힘을 빌렸을 가능성이 높다.
몇이나 차원의 돌을 이식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차원의 돌이 이식되어 있다면…….
‘렌즈를 사용해 이동 경로를 전부 파악할 수 있단 뜻이지.’
확신한 찬영이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현재 그들의 병력이 어느 정도 됩니까?”
“마법사 열 명 남짓에 그를 따르는 기사 스무 명, 그 외 이백 명 정도 규모의 병사들이 있어요. 장벽 안쪽 본진으로 돌아가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나겠죠.”
“그렇군요.”
“많은 병력이 소실된 우리 상황에선 그들을 이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보유하고 있던 마법사들 모두가 투명 마법에 의해 암습을 당했고……. 남아 있던 기사들도 절반이 줄어 버린 상태에요.”
“좋지 않군요.”
“그래요. 좋지 않죠. 몬스터가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이 판국에 더욱 더 그렇고…….”
이번 선택은 정말 중요했다. 찬영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에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장벽까지 최단 거리가 기록된 지도나 혹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가지고 계신 게 있습니까?”
“있어요. 그걸 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조속히 열람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열람한 뒤 혼자 떠나겠습니다.”
“우리 도움 없이 홀로 떠난다고요?”
“몬스터가 근방에 도사리고 있는 건 사실이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수비 병력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공주님을 포기하는 것 또한 우리가 쥘 수 있는 가장 큰 패를 그냥 넘기는 꼴이 될 겁니다.”
그때 홀랜드가 제동을 걸었다.
“나 역시 그대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지만 단신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아무 소득 없는 자살 행위일 수도 있소. 이곳에 오는 동안 그대가 강하단 건 어느 정도 느꼈지만 혼자서는…….”
홀랜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찬영을 바라봤다.
“우리의 적들 또한 강한 자들이오. 특히 클린트는 비커를 힘으로 점령한 자요. 괜히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
“늘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전투에 임합니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최선이라면…….”
찬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덧붙였다.
“저는 가야만 합니다.”
* * *
양의 창자를 벗어나는 지점.
이제 3km만 더 이동하면 샤우트 숲을 완전히 벗어나 비커 구획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곳에서 멈춘다! 경계 대형으로!”
에머리의 외침에 따라 별동대가 이동을 멈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동안 에머리와 찬영, 홀랜드가 함께 마주 섰다.
“지름길을 통해 이동했으니,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클린트 무리와 조우할 수 있을 겁니다.”
에머리가 말했다.
하지만 못내 그녀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찬영을 홀로 보내는 게 맞는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운 것이다.
“쫓아오는 이주 후발대는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문이 열리는 게 신호가 되겠죠.”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럇!”
그러자마자 에머리와 별동대가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샤우트 숲에 머물며 버티기를 포기한 것이다.
희망 없는 생존과 죽음을 건 사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지금, 에머리와 이주민들은 후자를 택한 셈이다.
찬영과 함께 남게 된 홀랜드가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래서 세부 계획이 무엇이오?”
“급습할 겁니다.”
“그게 끝이오?”
홀랜드는 당혹스러운 눈빛이었다.
그가 여섯 마리의 몬스터를 순식간에 해치울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건 안다. 그건 눈으로 지켜본 확실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이오?”
“도착하자마자 공주님의 신병부터 확보하겠습니다.”
“말처럼만 된다면 좋겠지만…….”
찬영은 대답 대신 홀랜드를 자신의 탄탄한 어깨를 확 끌어당겨 팔 사이에 꼈다.
“어,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굴린 홀랜드와 함께 찬영이 땅을 박찼다.
츠츠!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다그닥, 다그닥.
말머리를 돌린 클린트는 이동하고 있는 행렬을 역으로 돌아가 마차 곁에 붙었다.
반쯤 열려 있는 마차의 창으로 공주의 얼굴이 보였다.
클린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창을 더 활짝 열었다.
드르륵!
“공주 마마,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내 금방 좋은 마차로 바꿔 드리리다. 귀한 분은 귀하게 대접해 드려야지.”
샤브레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클린트는 그녀가 혹시나 자결할까 싶어 입에 재갈까지 물린 것이다.
‘여신이시여…….’
입이 틀어 막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속으로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머지않아 장벽을 넘어서게 될 테고, 자신의 신병은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리라.
‘송구합니다. 아버지.’
경계하던 교황이 그렇게 갑자기 거사를 치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자신의 모든 호위 병력이 죽었고, 혼자 남게 됐다.
아버지도, 동생도,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신관들도 자신을 구하러 올 수 없다.
기대할 수 있는 데라고는 샤우트 숲의 잔존 병력들뿐…….
하지만 그들은 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비커를 점령한 클린트의 병력을 상대하기도 벅찬 데다가 자신으로 인해 또 한 번 큰 피해를 입어 버렸다.
두려울 것이다.
왕국, 아니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잃어버렸을 것이다.
‘미안해요.’
그녀는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 저항했던 샤우트 숲의 마을 사람들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공주로서의 위치가 너무 무기력했다.
‘이대로 그들의 적의에 휩쓸리지 않게 저를 도우소서. 무슨 대가라도 치르겠나이다.’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기도하며 자신의 양팔과 다리에 착용되어 있는 팔찌와 발찌를 내려다봤다. 몸속이 뜨거워지며 신성력이 모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어느새 신성력이 몸 바깥으로 흩어졌다.
교황이 직접 제작한 ‘신성력 봉쇄 구속구’인 홀리 프레셔 때문이다.
팔찌와 발찌는 한 세트로 신성력 응집이 일정 방출 기준치를 넘어서면 억제되도록 설계된 구속구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제한된 신성력은 흩어지기만 할 뿐 구속구를 벗어날 수 있는 강한 응집도를 가지진 못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 예상되는 일들이 무척 끔찍했다. 하지만 기도로는 어떤 상황도 나아지게 만들지 않았다.
현실은 그대로였고, 주위를 빼곡히 채운 클린트 무리는 희희낙락 웃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엔 계속 의심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믿음 속에 뜻이 있으리라.’
툭툭, 후두둑!
공주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서 마른 땅에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