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통곡의 산맥이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것 같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찬영은 절벽을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렸다.
확실히 이 산엔 발 디딜 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절벽 위에 절벽이 있는 꼴이다.
잠시 몸을 기대고 쉴 바위 틈새 같은 것도 없다.
매끈한 유리처럼 조금의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해 온 훈련이 아니었다면 못 올라왔을 거야.’
그도 그럴 게 발 디딜 돌부리조차 없는 산은, 직접 손으로 절벽을 부숴가며 기어올라야 했고, 그 와중에 균형을 잡아 산에 붙어 있어야 했다.
산을 부수면서 기어오를 수 없다면 이곳까지의 등정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찬영은 해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절벽을 직접 부수며 디딤돌을 만들어 계속 이동해야 했고, 가진 바 이동 기술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웠던 건 절벽을 지키는 몬스터였다.
‘클리프 버그.’
녀석들은 주먹만 한 크기의 갑각충이었는데, 꼬리처럼 나 있는 촉수로 피를 흡수하는 몬스터였다.
‘절벽 속에 파고들 줄이야…….’
놈들은 불리해지면 촉수를 통해 절벽 내외를 이동하며 호시탐탐 자신의 피를 노렸다.
특히 매달려 있는 상태라 클리프 버그를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웠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손발에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으니까.
무기를 휘두르기도 힘들어서 염왕권과 염왕초혼심법이 아니었다면 꽤 힘들어졌을 것이다.
‘덕분에 얻은 것도 있었지.’
각각 1%의 숙련도가 오른 것이다.
반드시 몬스터를 잡아서라기보다는 그간 해 온 훈련이 쌓여서 오른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로써 염왕초혼심법은 32%의 숙련도를, 염왕권은 34%의 숙련도를 이뤄 냈다. 절벽의 정상을 밟으며 동시에 나온 결과물이라 더욱 만족스럽다.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군.’
뉴 빌드는 설마 자신의 적이 통곡의 산맥을 지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할 것이다.
‘머지않아…….’
찬영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때, 동이 트는 게 보였다. 산봉우리에 서 있는 찬영의 발끝으로 어두웠던 밤 그늘이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이 드리워졌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던 장벽도 훤히 드러났다.
멀리서 봐도 높고 견고한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보이는군.’
사실 이 장벽에 대해선 왕국 지도들을 살펴봤기에 미리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던 것과 직면한 건 확실히 다르다.
건축물 자체가 주는 위용 때문일까?
소름이 돋았다.
‘물결이라도 치는 것 같아.’
거대한 파도가 높낮이 있는 지형을 따라 쭉 늘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10번 장벽이라…….’
지도상으로는 틀림없었다.
베라믹과 인접한 국경에 트리븐 지방의 10번 장벽이 있다고 했으니…….
‘그럼 나머지 장벽들은 수도에 접근하며 볼 수 있겠지.’
베이콥 영주는 그 장벽들에 관해 이렇게 말해 줬다.
-우린 그것을 왕을 수호하는 열 개의 눈, 십안十眼의 첨탑이라 부르지. 첨탑의 이름은 왕국을 세운 개국공신 열 명의 이름을 본 따 지었네. 수도의 위기 상황이 오면 각 첨탑의 중심엔 봉화들이 오르지. 그때부터 첨탑은 모든 것의 출입을 금하고, 모든 적들로부터 왕을 지키네.
때마침 찬영의 눈에 산의 정상 너머,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장벽 한가운데에 솟아오르고 있는 불길이 들어왔다.
‘봉화.’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스쳤다.
‘왕이 위험하다는 얘기겠지.’
찬영은 수도로 서둘러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본격적인 트리븐 지방으로의 진입이었다.
* * *
트리븐 지방.
왕국의 수도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아홉 개의 중소 규모 도시와 한 개의 대도시가 있다.
아홉 개의 중소 규모 도시는 십안의 첨탑 중 10번부터 3번까지의 장벽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고, 나머지 한 개의 대도시는 2번 장벽 안에 있다.
그 외 1번 장벽은 왕이 사는 성으로써, 2번 장벽의 대도시, 폴리스와 인접해 있었다.
‘폴리스.’
이 도시는 평화롭던 한때 신성 왕국 모든 교역의 중심에 있었다.
샤이닝해로 통하는 수도의 항구와 통해 있고, 그로 인해 여러 지방의 수많은 상인과 여행자가 물밀듯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지.”
옆에 활을 내려놓은 홀랜드가 여행자에게 말했다.
“그럼 이 일대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10번 장벽, 비커…….
여행자는 그곳에 대해 묻고 있었다.
“비커가 무슨 상황이냐고? 그걸 모른단 말이요?”
홀랜드는 어이가 없어 경악했다.
“예.”
“대체 어디서 왔기에?”
그 질문에 찬영은 조용히 자신이 지나온 산을 쳐다봤다.
그러자 홀랜드가 피식 웃으며 찬영을 무시했다.
“딱 봐도 오딘 제국 출신 같아 보이는데, 거짓말이 심하구려. 이보시오, 거긴 통곡의 산맥이 있는 곳이요. 소드 마스터도 못 오를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라 이거요.”
홀랜드는 그의 거짓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든가!’
남자가 제법 건장해 보이긴 해도 통곡의 산맥은 오래 전부터 발길을 뚝 끊긴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지옥을 넘나드는 존재가 클린트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리가 없잖나?
“뭐 때문이진 몰라도 내게 거짓말을 쳐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거요.”
찬영은 홀랜드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당장 굳이 건너왔다고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으며, 갓피스라고 밝혀서 수도로 잠입하는데 혹시나 모를 걸림돌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은 수도의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지.’
그 생각으로 찬영은 말을 아꼈다.
홀랜드는 그런 침묵이 찬영의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소? 딱 봐도 자기 처지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 같으니, 거짓말을 한 이유에 대해선 내 더 묻지 않으리다. 그나저나…….”
홀랜드가 찬영의 차림새를 본 후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한 거요. 샤우트 숲엔 갖가지 야생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지.”
“몬스터……?”
“그래, 온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몬스터들 말이요. 설마 몬스터를 모르진 않겠지?”
“그럴 리가요.”
“하긴, 딴 세상에서라도 오지 않는 이상 몬스터에 대해 어떻게 모르겠소? 하지만 질문들을 들어보면 마치 다른 세상에서라도 온 것 같군.”
찬영은 조용히 홀랜드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점쟁이가 따로 없네.’
찬영의 생각을 모르는 홀랜드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헛웃음을 흘린 다음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던 중이요?”
“수도로 갑니다.”
“폐하께서 있는 수도 말이요?”
홀랜드는 믿기지 않는 지 찬영에게 재차 확인했다.
“예.”
“비커에 대해 물을 때부터 내, 알아봤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당장 그만 두시오.”
“그럴 이유라도……?”
“반란이 일어났소, 그것도 아주 큰.”
“반란?”
“칼룬의 영주, 후크가 관련이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굴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았소? 참 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로군.”
찬영은 중얼거리는 그에게 대답하기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우지 씨가 얘기했던 모든 게 현실이 된 게 맞구나.’
대마법사이자 칼룬의 지배자, 후크.
결국 그가 칼립토 학파를 세운 장본인이었고, 뉴 빌드와 손을 잡고 수도로 진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보는 그대로요. 장벽은 모두 함락됐고, 장벽들을 함락한 칼룬은 그대로 병사들을 몰아 수도로 향했다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홀랜드의 눈빛에 슬픔이 스쳤다.
찬영도 그걸 읽었으나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그 역시 슬픈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의 말대로 누구든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 후 각 마을의 행정관들과 그 수행원들이 뿔뿔이 흩어졌소. 왕국의 법도가 땅에 떨어진 것이지.”
“수도가 함락되기 전이겠군요.”
“항쟁하고 있다는 얘기는 다른 장벽에서 넘어오고 있는 피난민으로부터 간간히 듣고 있소만……. 폐하라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요.”
“병력이 그렇게 그렇게나 많습니까?”
“십안의 기사단은 그 수가 적지 않았소. 비커를 지키는 기사단만 해도 천 명에 이르렀소.”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긴…….’
뉴 빌드의 지배를 받는 몬스터 부대와 칼립토 학파의 마법사와 잔존 해적들, 그 외 칼룬 지방의 반란 세력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대군이다.
찬영이 그 생각을 하는 동안 홀랜드가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가 함락됐단 얘기가 서쪽에서 들려오면 멸망보다 더한 시절이 찾아올 거요. 대군이 흩어져서 함락된 장벽들을 다시 돌아와 짓밟겠지.”
“그걸 원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겠죠.”
“맞소, 나 같은 자들도 더러 있지.”
그러자 찬영이 물었다.
“기사이셨습니까?”
전황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 걸로 봐서 단순히 일반 백성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말해야 하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요.”
“댁처럼?”
찬영은 침묵했고 홀랜드는 자연스럽게 아까 전의 상황에 대해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클린트 무리하고는 어쩌다 만나서 호되게 당하게 된 거요?”
“제가 당하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놈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놀려 대고 있던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달랐겠지. 아마 나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녀석들에게 살가죽이 벗겨져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거요.”
홀랜드가 조금 뿌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것에 만족한 눈치였다.
“도움을 주신 건 고맙게 생각합니다.”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것이니 감사 인사는 당연했다.
“별말씀을…… 무사하면 됐소! 클린트의 무리야 어차피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있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요.”
“죽이다니요? 그들의 무리와 싸우고 계시는 중입니까?”
홀랜드가 기대 있던 바위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셈이지.”
찬영이 그를 쫓아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요?”
“원래 그렇게 궁금한 게 많소?”
“필요하다면 질문을 주저하지 않는 편입니다.”
“못 말리겠군. 좋소, 거처로 이동하면서 얘기해 주리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는 대부분 찬영의 질문과 홀랜드의 대답으로 이어졌다.
“무너진 장벽들 사이로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이 늘어났소. 다른 장벽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커 일대는 클린트의 세력이 있지.”
“클린트의 무리군요. 대체 그 클린트라는 자의 정체가 뭡니까?”
“클린트는 기사요. 한때 장벽을 지켰던 십안의 기사단 중 한 사람이지……. 지금은 후크에게 굴복한 하수인이 됐고.”
다음 순간 찬영은 여러 가지 정황상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그에 대항하는 분들은 이곳 샤우트 숲에……?”
“맞소, 내가 그 중 하나지. 어떻게 눈치챘소?”
“홀랜드 씨가 샤우트 숲을 잘 안다는 건, 그만큼 이곳이 거주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니까요.”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그걸 주저하지 않고 행했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랬단 것이죠. 익숙한 곳에 도운 이들을 숨기는 건 당연한 본능이고…….”
“예리하구려.”
“누구라도 알았을 겁니다. 한데…….”
하지만 찬영의 추측은 끝난 게 아니었다.
“혹시 클린트 무리가 이 숲을 넘보지 못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비커 일대를 장악한 무리가 샤우트 숲을 이 잡듯 뒤지지 않을 이유가 없죠. 저 같으면 숲을 태우겠습니다.”
그게 지독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왕국에 등을 돌렸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선택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홀랜드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랍군. 무척 인상 깊은 얘기였소.”
“비밀인가요?”
“말해 주지 못할 비밀은 아니오. 이미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이니까.”
찬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의 얘길 들어볼 차례였다.
“그가 내 형님이오.”
예상 못한 이야기에 찬영마저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찬영의 표정을 살핀 그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맞소. 그는 내게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약속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를 일이오. 그때까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오.”
비장한 그를 보며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형을 벤다는 말씀이십니까?”
“해야만 한다면……!”
홀랜드는 이미 각오한 눈치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났다.
화르륵!
나무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홀랜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