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화
* * *
한밤중.
로레인은 찬영의 방문에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완전히 결정한 거구나.”
누가 봐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차림새다.
로레인은 찬영과 함께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라도 하러 온 거야?”
“예, 그런 이유도 있지만…….”
“있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레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부탁이라…….’
“백구십구 명의 갓피스를 찾는 일과 관련된 건가?”
“아뇨.”
“그럼?”
찬영은 잠시 대답을 늦추고, 두 개의 창을 눈앞에 띄웠다.
-히든 퀘스트 : 바이런의 흔적을 찾아라.
- 섬뢰보의 초대 주인 바이런의 흔적을 찾으세요.
‘이게 첫 번째.’
다음은 키란의 퀘스트다.
-알렉산더 첨탑에 숨겨진 103번째 방을 찾아가세요. 키란의 반지가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 미해결된 퀘스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의 관한 정보는 아직 얻은 게 없다.
“흔적을 찾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길드 재건이 시작되자마자 해야 할 일이 산더미겠구먼. 들어나 보자고…….”
찬영은 두 가지 퀘스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로레인에게 말해 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로레인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쉽게 말해 그들이 남긴 유산들을 찾고 있는 거구나.”
“예, 그런 셈입니다.”
“얼마나 걸릴지 장담은 못 해. 아직 길드 재건도 완벽히 시작한 게 아니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그와 관련된 흔적이 나오면, 제게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게. 그런데 말이야.”
말끝을 흐린 로레인이 찬영을 빤히 쳐다봤다.
“예, 왜 그러십니까?”
“뭘 믿고 이런 의뢰를 맡기나 싶어서……. 내가 너와 같은 갓피스라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생각을 바꾸는 게 좋아. 난 이제 로그라고. 언제든지 내 이해득실을 따져서 노선을 바꿀 수도 있어.”
“압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이후에 내가 장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넘기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낮다.
두 열쇠 모두 연계 히든 퀘스트이기에 관련된 장비를 보유했거나, 그에 관련된 이네이트가 이 퀘스트를 해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괜찮다.
“이것들 모두 수단들일 뿐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니까요. 저와 로레인 씨의 목적은 뉴 빌드의 괴멸, 그리고 이 상황을 종료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렇지.”
로레인은 대답하며 엷게 미소 지었다. 알면 알수록 이 남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재물욕이 넘치는 것도, 명예욕나 권력욕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힘의 욕심이 있는 것도,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다.
그리고 기꺼이 타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견고한 의지를 가졌다.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는 위대한 사람이 맞다.
때론 이기적으로 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세상 모든 짐을 혼자 떠안으려는 것만 같았다.
‘안쓰럽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를 도우면서 곁에 있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으니까.’
로레인은 찬영의 곁에서 좋은 조력자로 남아 줄 생각이다.
“알았으니 이제 가 봐.”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나 역시 내 목적을 위해 수락한 일인 걸.”
“그럼.”
그때 로레인이 막 나서려는 찬영을 불러 세웠다.
“하루 속히 안에 있는 두려움을 마주하도록 해. 당신 곁에 있는 이들을 믿으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 그게 진짜 믿음이자 신뢰야. 나도 그랬으니까…….”
누군가를 잃은 건 찬영뿐만이 아니다.
로레인도 보테를 잃었다.
“새겨듣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찬영이 방을 떠났다.
* * *
로레인의 방을 떠난 찬영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로일 성 내부의 아치형 복도를 걷고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지 주위가 무척 어두웠다.
그 때 걸음을 옮기던 그가 복도 한 가운데 멈춰서서 한 기둥을 응시했다.
“계속 쫓아올 겁니까?”
구조물 안에 찬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계셨나요?”
검을 쥔 지수가 기둥의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와 찬영과 마주 섰다.
“예,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말씀드리지 않고 쫓아다녀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찬영은 대답과 함께 지수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펌에 규복의 죽음과 소식을 함께 알리고, 여러 일들을 뒤처리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그렇게 빤히 그녀를 보고 있을 때,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법 통신이 복구된 덕분에 곧 펌에서 로일시로 파견 팀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대리님의 시신을 이송하러 오는 팀이겠군요.”
“예.”
“고생 많았어요. 미안하고…….”
이규복은 V.O. 소속이고, 장례 역시 그에 맞게 치러지게 됐다.
찬영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미안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양찬영 각성자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정말로요.”
“그래도 챙겨 주지 못한 건 사실이죠. 대리님을 제 때 구하지 못한 것도…….”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쓰게 미소 지은 찬영이 지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절 찾아온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질문은 당연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게 이유였다면 은밀히 쫓아오는 게 아니라 진작 모습을 드러냈을 테니까.
“사실 별다른 이유가 있진 않았습니다.”
“혹시 펌에서 날 주시하라고 시키던가요?”
“아뇨, 저희 펌은 물론, A.U.에서는 사상자 통계를 내고 다시 지구로 복귀할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후 2차로 파견되는 각성자들이 로일시에 상주하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왜 내 뒤를 계속 쫓아왔죠?”
“실은 계속 각성자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떠나실 것 같아서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따로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건가요?”
“아뇨.”
“그런데 어떻게……?”
그러자 지수가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검을 쥐면 그런 느낌이 선명해집니다. 떠나실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든 것도 검을 쥐었을 때였으니까요.”
찬영은 그녀의 검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열세 번째 별 중 하나인 감청의 별.
열세 개의 별의 근본은 모두가 같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당긴다.
로이크가 프라이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그게 이제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건가?’
그래,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얘기도 듣지 못한 지수가 갑자기 자신이 떠날 걸 예상하고 뒤쫓아 왔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열세 번째 별 중 하나라는 걸 감안했을 때, 그런 감정적인 부분이 일부 공유됐다는 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얘기였다.
“놀랍네요, 그런 게 가능하단 게.”
“각성자님은 못 느끼셨나요?”
“예, 아직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프라이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이제 남은 열세 별은 그대를 향해 끌릴 것이다.
‘그 얘기가 설마…….’
지금과 같은 상황을 두고 얘기한 건 아니었을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남은 열세 번째 별들이 내게 끌리고 있다?’
지수의 일방적인 감정 동화(同化) 또한 그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최초로 열세 번째 별을 개방한 자신에게 끌리고 있고 지수 또한 그걸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내 감정을 일부, 느낀 것일 테고.’
찬영은 그 생각에 이르고 나서야 그녀가 얘기한 것들이 좀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런 감정 동화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어째서요?”
“가지고 계신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괜찮습니다.”
“아뇨. 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느껴집니까?”
“어렴풋이요.”
“그래서 몰래 쫓아온 거군요.”
“예…… 함께 가고 싶단 제안을 거절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닌가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찬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절할 겁니다.”
찬영은 단호했다.
제이나에게도 상처를 주며 돌아선 선택이다.
그 선택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재고해 주세요.”
“미안합니다.”
또 한 번 거절하는 그를 보며 지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 번쯤은, 빚을 갚을 기회를 주세요!”
“빚?”
이해가 되지 않아 반문한 찬영에게 지수가 이제껏, 찬영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과거를 꺼냈다.
“북한산 전투, 기억하시나요?”
그녀의 질문이 시작되자마자 찬영은 지난날의 기억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대리님에게 들은 건가요? 아님, 아카데미에서?”
“아뇨. 둘 다 아닙니다.”
“그럼?”
“그곳에 제가 있었어요.”
찬영이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예상도 못했다.
지수가 그곳에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니…….
지수가 계속, 입을 열었다.
“‘여자를 울리면 못씁니다,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위로하며 부축해 준 대리님의 모습을 잊지 못해요. 그리고 각성자님은 묵묵히 함께 계셨죠.”
찬영은 그제야 지수의 얼굴이 그때 보았던 한 여자 산행객의 얼굴로 투영됐다.
닮았다. 아니, 동일인이었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쳐 버린 그날의 일이 돌고 돌아, 눈앞에 다시 다가온 것이다.
“그럼……?”
“예, 그 일 이후로 삶이 바뀌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었고…… 각성자님처럼, 그리고 대리님처럼 묵묵히 다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어요. 몬스터에게 어머니를 잃은 뒤라 더욱 그런 마음이 강해졌죠.”
“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얘기하면요? 뭔가가 달라졌을까요?”
그 질문과 함께 그녀가 찬영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달라지나요?”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또 방관하게만 하시네요.”
“미안합니다.”
같은 얘기를 똑같이 해 봐야 결정은 같았다.
지수도 그걸 알았고, 더 찬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전 아직 빚을 못 갚았습니다. 갚아 드려야 할 빚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돌아가신 대리님의 몫까지 받으셔야 하잖아요.”
지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울음을 꾹 참는 그녀를 보며, 찬영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함께 가자는 얘기는 못 하지만 ‘돌아오겠노라.’라고 약속은 하고 싶었다.
“그럴게요.”
그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흑, 흑…….”
그 손길 때문일까?
지수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키지 못한 이규복을 향한 그리움, 미안함 등이 복잡하게 섞인 울음이었다.
찬영은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떼고 동요하는 슬픔을 꾹, 눌렀다.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찬영이 그녀를 두고 돌아섰다.
* * *
그렇게 로일 성을 빠져나와 남문으로 향한 찬영.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웠으나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정한 일이다.
그는 성을 벗어나 빠르게 드넓은 평야 지대로 나아갔다.
‘남서쪽에 베라믹 산맥이 있어.’
이미 수도로 출발하기 전 수집할 수 있는 지도는 모두 읽어 두었기 때문에 미니 맵엔 모든 지도의 총합 데이터가 나타났다.
‘통곡의 산이라…….’
수도가 있는 트리븐 지방과 연결되어 있는 베라믹 산은 경사가 절벽이나 다름없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간다.’
그도 그럴 게 수도가 위험에 처한 건 확실했다. 그렇다는 건 수도로 접근하는 개방된 길목을 수많은 적들이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올라서지 못할 통곡의 산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생각을 정리한 찬영은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빠져나온 성곽을 보자 제이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나면 마음이 약해져 혼자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를 보지 않고 냉담히 돌아섰다.
솨아아.
그때 들판의 풀이 지나는 바람에 의해 좌우로 쓰러졌다.
찬영은 얼굴을 스쳐 가는 바람을 가르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떼는 그의 등 뒤로 동이 트고 있었다.
목표는 뉴 빌드, 그들의 궤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