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 * *
찬영이 르리에에서 돌아오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왔다.
그 찰나의 순간, 찬영은 볼 수 있었다.
‘제이나.’
그래서 피하지 않았다.
짝!
고개가 돌아간 찬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눈을 돌렸다.
방 안에는 글로리와 제이나, 그리고 로레인이 함께 있었다. 글로리가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죽었으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제이나가 잇새 사이로 말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말해 봐요. 죽었으면?”
재차 묻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기적인 행동인 걸 알고 택했다.
누군가를 잃는 두려움을 도저히 직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같다.
침묵하는 찬영에게 제이나가 나직이 물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죠?”
“정령들이 있었어요. 타우린과 같은 존재들이…….”
찬영은 그녀가 더욱 속상해할까 싶어, 시련의 얘기는 접어 두고 네 번째 차원 다리로 이어지는 세 번째 차원 다리 공간을 개방했다고만 전했다.
“다행이오.”
별 전투가 없었던 걸 확인한 글로리가 조금 안도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제이나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우린 같이 갔어야 해요. 같잖은 영웅 놀이를 하고 싶었다면 당장 이 일에서 손 떼요.”
누구보다 찬영을 걱정했던 제이나는 무사한 그를 보면서도 쓴 소리를 해야 했다.
다신 그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자 한참 대답이 없던 찬영이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럼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차원의 다리를 통과하는 건 함께 가겠다고……!”
제이나는 확실히 대답을 듣길 원했다.
“그건 우리 모두 동의하오.”
글로리 역시 한마디 거들었고, 로레인도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안 됩니다.”
하지만 찬영에게 돌아온 건 거절이었다.
“당신, 정말……!”
제이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모든 걸 공유했다고 생각했고, 그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손만 꼭 잡고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랬기에 배신감까지 느껴진다.
“대체, 왜요?”
“두렵습니다. 제이나를 잃을까 봐…… 모두를 잃을까 봐.”
“내가 걱정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난, 당신이 마음대로 가면 가나 보다, 오면 오나 보다 하고 생각할 것 같았나요? 나라고 괜찮을 줄 알아요?”
“미안해요.”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
“영주님께 들었어요. 떠나기로 했다면서요?”
“어떻게……?”
“영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알아야 할 것 같다고.”
“그랬군요.”
“내게 기댈 순 없었나요? 난…….”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다시 말했다.
“당신을 믿었어요.”
“알아요.”
“그 결과가 이건가요?”
“모두를 내 방식대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계속 그럴 것 같아요?”
“예.”
찬영은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여정의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지려고.
“그래, 좋아요! 뜻대로 하세요.”
제이나는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계속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위험하단 소식이 들리면 달려갈 거예요. 나도 내 방식대로 당신을 지키겠어요.”
“제이나, 그건…….”
“말리지 말아요. 언젠가 내게 얘기했죠? 기회를 잡으려고 했고, 그 마음이 이곳까지 데려왔다고.”
“.........”
“내겐 당신이 기회예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기회.”
그 말을 끝으로 제이나는 방을 벗어났다.
“현명한 여자네.”
지켜보고 있던 로레인이 덧붙였다.
찬영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부딪친 로레인이 벽에서 떨어져 걸어왔다.
“고집불통에 철부지인 그쪽에게 가르치려고 들지 않잖아. 나 같으면 윽박지르고 타이르고, 별짓을 다 했을 거야. 아마 헤어지자고도 했을 걸?”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그쪽의 이번 선택이 틀렸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동료를 잃은 슬픔도 이해하고, 그것 때문에 두려운 것도 알겠어. 그건 극복하기 쉽지 않지. 하지만 말이야.”
로레인이 글로리를 힐끗,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새로운 차원 다리는 그쪽이 아니면 진입조차 불가능하다며? 결국 이 싸움을 끝내려면 그쪽이 우리가 가진 최선이자 최후의 패라는 얘기 아냐?”
“…….”
“난 그걸 잃고 싶지 않아. 어서 이 싸움을 끝낸 뒤에 아버지의 유지나 잇고 싶어. 그러니 현명하게 처신해 달라고.”
로레인이 찬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방을 떠났다. 그 직후 찬영이 남아 있는 글로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도 찬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들에게 모든 걸 얘기한 날 원망하시오?”
“아뇨.”
“그럼?”
“당연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죠. 원망을 받아야 하는 건 저입니다.”
차원 다리에 무작정 진입한 건 분명히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찬영은 스스로의 선택이 틀렸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실 것이오?”
“죄송하지만 제 생각엔 아직 변함이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뀌진 않는다.
찬영은 자신의 결정 그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설사 모두가 틀렸다고 해도 가야 한다.
수도에서 그들이 다치고 위험해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해낼 것이다.
찬영의 결심에 답답해져 한숨을 푹 쉰 글로리가 다시 물었다.
“여전히 내가 함께 간다고 하면?”
찬영이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그의 결정에 글로리도 고집을 피울 순 없었다.
당장, 고집을 피운다고 선택을 번복할 찬영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알겠소.”
글로리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일이 있은 후 찬영은 글로리에게 가져온 모든 약초를 넘겨 드워프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홀로 떠날 준비를 했다.
먼저 인벤토리에 필요한 보급품 몇 가지를 챙겼고, 가진 장비와 몸 상태를 재차 점검했다.
최근에 획득한 물품 목록 체크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이아 1급 박스는 조합용 혹은 상위 박스가 나올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며 보관한다.’
다이아 1급 박스는 이제껏 받은 어떤 박스보다 가치가 높다.
그런데 행여 상위 박스로 상승시킬 보조 아이템이라도 생긴다면?
‘다이아 이상의 박스까지 넘볼 수 있다!’
그리 되면 어떤 아이템이던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사상 초유의 특급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용도로 놔두는 게 낫다.
‘그럼 남은 박스는?’
찬영은 최근 소드 마스터 업적 달성과 함께 획득하게 된 다이아 5급 박스와 획득해 둔 플래티넘 1급 박스를 떠올렸다.
‘두 개 모두 조합용으로 두는 편이 낫겠지.’
이렇게 되면 세 개의 박스가 모인다.
시간이 더 흐르고, 업적 보상 등이 쌓이게 되면 머지않아 조합을 활용할 적당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자.’
생각을 정리한 찬영은 나호스의 활부터 아슬란까지 기존의 장비 목록 또한 모두 체크했다.
‘나호스의 활에 맞게 개조된 화살이 좀 필요하겠어. 그리고 또…….’
지잉!
‘아슬란.’
이제 +2까지 업그레이드되어 많은 능력을 갖추게 된 아슬란.
이번 업그레이드는 북빙진기에 또 한 번 큰 영향을 끼쳤다.
‘아슬란만 있으면 1회 운기를 통해 얻는 마나량의 3%를 더 획득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뿐인가? 수 속성 친화력이 기존보다 20% 상승하고 북평검의 중첩 발동이 8%까지 늘어났다.
거기에다 점점 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녀석이 가볍고 일체화된 느낌이 강해진다.
‘기회가 있으면 보석들만 좀 더 강화시켜 주면 되겠어.’
그렇게만 되면 아슬란은 프라이의 아슬란이었던 때보다 점점 더 강해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래야 되겠지.’
아슬란을 들 자격을 갖추려면 꼭 그래야 한다.
아니, 프라이와 로이크를 훌쩍 뛰어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소드 마스터로 만족할 수는 없어. 그 이상이 되어야 해.’
위기를 헤쳐 나갈수록 그 생각이 강렬히 든다.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긴장해야 한다.
‘하나씩, 차근차근 나아가자.’
이미 환경은 갖춰져 있고 노력만 하면 된다.
각 기술들의 숙련도를 높이는 건 물론이고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나타난 히든 퀘스트부터 아직 해결하지 못한 히든 퀘스트의 보상도 획득하는 것이다.
‘우선 가치 등급부터 모두 A로 만든다.’
소드 마스터가 되며 얻은 히든 퀘스트의 조건.
그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히든 퀘스트를 끝내고 나면 다음 성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뭐든지 해내 주지!’
그렇게 한 단계씩 밟아나가 이 싸움의 종지부를 끝내고 싶다.
찬영은 결연한 눈빛으로 거울 앞에서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 찬영의 오른쪽 어깨 위에 열세 개의 T 자 문양이 뒤섞인 정령의 표식이 언뜻 드러났다가 옷 아래에 가려졌다.
* * *
막 찬영이 갑옷을 갖춰 입고 나가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드워프가 나타났다.
“나, 크루 일족의 족장 카멜로. 양찬영 각성자를 찾아왔소.”
“아, 예. 앉으시죠.”
갑작스러운 방문이 의외이긴 했으나 어느 정도 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히든 퀘스트에 나온 문구대로라면 카멜로는 자신에게 뭔가를 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존경심은 이미 얻었을 테고, 임의 보상은 글쎄…….
‘내가 하기에 달린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그의 얘기를 먼저 들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우선, 고맙소.”
찬영은 모르지만 드워프는 엘프보다 자존심이 높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평가될 만큼.
한데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가장 자존감이 높은 족장, 카멜로는 대놓고 찬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노예로 살라고 해도 그리 하겠소.”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진 찬영에게 카멜로가 말했다.
“바오트의 손에 부족이 몰살당하고 홀로 살아남은 후에도 여신께 끊임없이 빌었소. 딸만큼은 살려 달라고. 그럼 언제든 이 목숨을 내놓겠다고…….”
“그래서 제게?”
“그렇소. 무엇이든 하겠소. 신과의 약조를 어기고 싶지 않소이다. 여신께서 내 뜻을 들어주셨으니, 나 또한 여신께 바치기로 한 내 모든 목숨을 바칠 것이오. 여신이 보낸 갓피스 당신에게.”
그가 찾아온 목적은 명확했고 그건 찬영에게 또 다른 기회의 바람을 불게 했다.
찬영도 그걸 느꼈다.
이건 우연과 우연이 겹친 일이 아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수많은 의지들이 찬영에게 모이고 있는 것이었다.
또 다시 중요한 전투를 앞둔 지금, 찬영은 이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일어나시죠.”
찬영은 그를 먼저 일으켜 세워 앉혔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더 난리를 피울 기세였다.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전에 따님은……?”
“회복되고 있소.”
“다행이군요.”
“걱정해 주어 고맙소. 어쨌든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소.”
“예,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오. 우리 부족이야말로 대륙 최고의 공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자부심 넘치는 그를 보며 찬영은 조용히 자신이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없는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내놓았다.
언젠가 쓸 테지만, 가진 바 능력이 되지 않았던 물건들.
툭, 툭, 툭.
그 물건을 보기 시작한 카멜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이건……!”
“제가 내놓은 물건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알고말고!”
카멜로가 버럭 소리쳤다.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찬영은 잘게 떨고 있는 그를 보면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곳까지 당도하며 획득해 온 물건들입니다.”
찬영이 처음에 꺼낸 물건을 쳐다봤다.
‘심비 하트, 우스 동력기.’
두 가지 모두 딱히 어떻게 쓰이는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찬영이 네모난 철 상자 안에 기다란 관 수백 개가 심장 안의 혈관처럼 연결되어 있는 우스 동력기를 가리켰다.
“이것부터 하죠. 마나 탱크와 흡사한 물건이 맞습니까? 마나를 흘려보내니 관들이 파랗게 빛나면서 기관 장치 소리를 내더군요.”
“마나 탱크?”
“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요.”
“그게 무슨?”
찬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게 ‘우스 동력기’에 관한 설명은 이게 다였었다.
-적절한 환경이 취해지면 무엇이든, 강력하게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어딘가에 쓰이기 전에 갖고 있기로 했었다.
그런데 카멜로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당연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내 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 의하면……….”
카멜로가 찬영이 모르는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