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심비가 솟아오르고 글라투가 그 등을 타고 달려 날아올라 찬영을 덮치려 했다.
‘시간이 없다!’
더는 고민할 여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글라투와 심비가 같이 덤비면 다른 의문을 던질 일말의 여유 따윈 생각할 수조차 없다.
10여 초의 시간.
막다른 벽에 막힌 듯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모두 이길 순 없어.’
그래, 맞다.
싸우게 되면 놈들은 계속 부활할 것이다.
하지만 싸우지 않으면……?
‘난 죽어.’
택일해야 했다.
하지만 어둠에 몸을 던져도 죽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찬영은 안개로 두텁게 쌓인 원형 운동장 너머를 내다봤다.
낭떠러지 같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낭떠러지는 떨어지면 다시 기어 올라올 수 있었지만, 저 깊은 심연 같은 어둠은 모든 걸 삼켜 버릴 것 같다.
떨어지는 다음 순간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다신 소중한 사람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테지. 하지만…….’
이건 시험이다. 그건 어딘가에 정답이 있단 얘기.
‘저곳이 정답이 될 수도 있지.’
어둠은 그저 막연한 공포를 자극했을 뿐, 구름으로 만들어진 콜로세움을 나가지 말라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타닥!
찬영은 갑자기 뛰었다.
콰콰콰!
등 뒤로 글라투가 쫓아왔고, 솟아오른 심비가 얼음 성벽을 뚫고 기어 올라왔다.
쿠쿠쿵!
찬영의 등 뒤로 얼음성벽이 무너지며 하얀 안개와 뒤섞인 얼음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제 머지않았다.
찬영은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쿵!
마침내 얼음 성벽을 박찼다. 마지막으로 발을 구르자마자 얼음 성벽이 함몰되며 얼음 덩어리가 추락했다.
휘이이익!
강한 바람이 눈앞에 불어왔다.
츠츳!
아니, 앞이 아니다. 뒤에서 날아오는 글라투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거였다.
쿠쿠쿠쿠!
대기가 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기억한다. 놈이 일으켰었던 나선형의 녹색 파장이 머지않아 몸을 뒤덮을 것이다.
‘대비해야 해!’
이 바람은 그 파장의 전조일 뿐이니까.
일순 바람이 멈췄다.
찬영은 직감했다.
‘온다.’
화르륵!
‘지금!’
찬영의 두 발에서도 화염 수레바퀴가 돌았다.
펑! 펑!
어둠을 수놓은 불꽃이 허공을 격했고, 눈앞이 빙글 돌았다.
그 때 서늘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싸워 온 본능 같은 거였다.
그걸 믿었고 곧바로 허리를 틀어 한 번 더 허공으로 도약했다.
펑!
그 순간 회전하면서 의도치 않게 글라투와 시선이 부딪쳤다.
머리 위로 부식 파장이 스쳐 지나간 것과 동시였다.
-그오오!
지독했다. 놈은 도약과 함께 끝까지 부식 파장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놈도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허공을 도약하지 못하는 글라투의 부식 파장은 두려울 게 없다.
‘끝이다.’
찬영은 추락하는 글라투와 쫓아오지 못하고 원형 경기장을 휘돌기만 하는 심비를 내려다봤다.
몬스터, 해적 안개가 만들어 내는 모든 형체들은 울부짖고, 고함치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찬영은 계속 밤하늘을 밟고 도약했다. 돌아갈 순 없었다.
눈앞의 어둠은 깊었다.
찬영이 할 수 있는 건 저 너머, 미지의 어둠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죽는 건가?’
글쎄,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 멀리 아른거리던 원형 경기장까지 시야에서 사라진 마당이다.
뒤를 돌아봐도 더 이상 보이는 건 없었다.
구름도, 생명체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어둠이 가져온 침묵만이 가득했다.
찬영은 계속 진공나찰보를 펼치면서 어둠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당연하게도 끝이 다가옴을 느꼈다.
‘마나가 떨어져 가고 있다…….’
찬영은 도약에만 신경 썼다.
단순히 죽는 게 싫어 뛰쳐나온 게 아니다. 자신이 놓인 상황 안에서 최선을 택한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
정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시험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만 있었다. 하지만 벽 너머 어둠으로 나아가는 건 그들의 의지를 반하는 거였다.
나의 의지……!
츠츳!
하지만 견고한 의지도 소모된 마나를 되살릴 순 없다.
먼저 오른발의 수레바퀴가 소멸됐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찬영은 균형을 잃었다.
몸이 기우뚱했고 그러자마자 시야가 빙빙 돌았다.
쐐애애액!
떨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속도를 늦추는 것도 소용없었다.
아니 늦출 방도가 없었다. 마나는 모두 떨어졌다. 신성력이 있었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성 마법은 알지 못했다.
찬영은 눈을 감았다.
귀를 스쳐 가는 바람도, 계속 스쳐 가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은 어둠도 모두 외면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찬영의 결정은 끝난 지 오래. 상황이 악화됐다고 해서 선택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끝이 날 테니까.’
눈을 감고 있는 찬영은 어둠 사이로 비집고 나온 하얗고 거대한 손이 몸을 감싸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쿵!
눈을 뜬 건 몸이 강한 충격을 느낀 직후였다.
“뭐지……?”
다시 눈을 뜬 찬영은 아픈 것도 잊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내렸다.
하지만 하늘은 없다. 처음 봤던 흰 구름뿐이다.
찬영은 눈을 돌렸다.
회색 석판이 깔린 지상 위.
소복하게 쌓인 눈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함몰된 분지 아래 T자 형태의 회백색 기둥 열두 개가 원을 그리듯 자리 잡고 있었다.
원을 그리는 회백색 기둥들의 한가운데에 위로 올라가는 열두 개의 계단이 있었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단이 보였다. 제단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찬영은 그 의자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정령왕의 옥좌!’
하얀 눈에 덮였으나 그보다 더 새하얘서 대비되어 보이는 옥좌.
정말로 저게 정령왕의 옥좌가 맞다면?
‘리젤초가…….’
찬영의 눈이 빠르게 옥좌 주변을 살폈다.
포리초와 리젤초가 보였다.
‘있구나.’
역시나, 포리초 옆엔 리젤초가 함께 나 있었다.
얕게 쌓인 눈 사이로 잎사귀를 내민 두 가지 초.
‘히든 퀘스트의 내용과 모든 게 일치해.’
저 의자가 정령왕의 옥좌인 게 확실해진 것이다.
“통과한 건가?”
찬영은 의자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질문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찬영의 질문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눈이 내리고 있었고 고요한 정적은 그대로였다.
서벅서벅.
찬영은 결국 쌓인 눈을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생각에 잠겨 있기만 해서는 해결될 것도 없다.
분지 안을 가로지른 찬영은 열두 개의 기둥을 지나 제단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찬영이 막 첫 계단을 밟을 때였다.
콰콰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흠칫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자 회백색 기둥 근처의 공간이 물결치며 일렁였다.
‘뭐지?’
그 사이로 반투명한 구름들이 각각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찬영은 계단에 올라선 채 영체의 형태를 자세히 살폈다.
‘용?’
그것뿐이 아니다. 그 옆엔 호랑이가 있었고, 다시 그 옆엔 늑대, 매 등 다양한 형태의 영체가 위엄 있게 올라섰다.
그러고 나서야 열두 개의 형체가 일제히 한 목소리를 냈다.
-첫 번째 시험, 나태를 벗어난 존재여.
웅웅, 울리는 그 목소리가 처음 들린 천둥소리처럼 커다랗게 주위로 퍼졌다.
찬영은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모두 정령들이구나.’
그들의 등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두 번째 시험, 어둠의 틀을 깨고 우리 앞에 다가온 존재여.
곧바로 두 번째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찬영은 마지막 시험에 관한 의문이 모두 풀렸다.
‘내 생각이 맞았어.’
어둠이 두려워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싸우기만 하며 다른 방법을 찾았다면?
‘아직도 싸웠겠지.’
그 때쯤 찬영은 슬슬 땅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니면 내가 흔들리고 있거나.’
아무래도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눈이 핑핑 돌아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사태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힘이 풀려 한 쪽 무릎이 꺾였다.
찬영은 더 이상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시선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찬영은 또 한 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대를 기다렸다. 사명이여. 우리를 기억해 다오.
한꺼번에 귀를 울리는 목소리에 의해 찬영은 더욱 머리가 아팠다.
“끄으윽……!”
하지만 버티면 버틸수록 어떤 목소리들이 점점 음성을 높이며 명확히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집중할수록 어지러움도 조금 잊혔다. 그래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별들이 사라졌어.
-우리는 정령이야. 별들이 없으면 세계를 이어 갈 수 없어. 머지않아 우리도 별들을 따라 흩어지게 될 거야.
-대신 별들은 사명을 남겼어.
-맞아, 사명은 열쇠야. 열쇠는 별들의 속삭임을 쫓아 우리에게 닿을 거야.
-그래도 쉽게 온전함을 갖추진 못할 거야.
-그래, 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남겨진 이 한줌의 생명이 전부겠지.
“후우…….”
시간이 흐르고 어느 시점이 됐을 때 찬영의 호흡이 가라앉았다.
그 후 머릿속을 흔들던 통증이 끝났다.
찬영은 한숨을 쉬며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당연했다.
보상이던 알림이던 다양한 ‘창’이 가득히 쌓인 건 둘째치고, 머릿속에 그들의 이야기가 선명히 남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정령계의 봉인 해제로 별들의 속삭임, 3/10을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별들의 속삭임이 4/10 이 되었습니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은 후 신체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별들의 속삭임!’
가장 원했었던 보상이지만 기대했던 여신과 올드 원에 관한 더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 정령에 관한 일부 진실을 알게 됐다.
‘정령의 세계가 봉인된 건 별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 확실하다.
‘그들 입으로 별들이 없으면 자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들은 사라진 별들과 함께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찬영은 각인된 이야기를 계속 떠올려 봤다. 되새길수록 정령들이 남긴 얘기를 통해 그때의 일이 명확해진다.
‘사명은 나야. 그리고 그들은 나로 인해 깨어날 준비를 봉인되기 전부터 하고 있었어. 하지만…….’
힘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힘의 근원은 ‘별’
자신이 왔다고 해서 빛이 살아 돌아온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이 마지막으로 쥐어짜 낸 한줌의 생명. 그것만이 남았을 뿐인 거지. 그게 타우린일 테고.’
-13종의 소환수 도감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럼 이 완성된 도감의 관한 의문도 풀린다.
도감이 완성되면, 그에 관련한 소환수도 타우린처럼 나타났어야 말이 되는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어.’
제단 주변은 조용하기만 하다.
오히려 정령들이 나타났었던 T 자 형의 기둥들은 전부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한때 정령이 가졌었던 힘의 상실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언젠가 별들이 돌아오게 되었을 때 복원되고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걸 확신하는 데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소환수 도감 완성 업적으로 인하여 정령왕의 표식을 획득하였습니다.
속삭임이 늘어날수록 표식의 감춰진 힘이 개방됩니다.
속삭임이 늘어날수록 표식의 감춰진 힘이 드러난다는 이 말…….
‘언젠가 모습을 감춘 별들이 다시 나타날 때 정령 역시 다시 힘을 갖춘단 얘기야.’
어떤 힘일지는 몰라도 찬영은 그 힘이 언젠가 크게 쓰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힘은 정령들을 부활시키고, 그들의 세계도 복원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별들이 돌아오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러자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 남았다.
‘그들을 어떻게 돌아오게 할 수 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깊이 생각해 봤으나 아직은 가늠할 수 없는 문제다.
아직 듣지 못한, 또 다른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봐야 했다.
아직 미진한 구석이 많았다.
‘점점 더 많은 게 확실해지겠지.’
신성력의 성장과 히든 퀘스트의 등장 등을 통해 하나씩, 차근차근 말이다.
별들을 어떻게 되돌려 놓을 지부터 정령들이 말하는 도망친 별들의 정체까지도 모두……!
찬영은 확신하며 걸음을 옮겼다.
고민도 끝냈으니 이젠 남아 있는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 * *
하나둘 늘어 어는 약초들과 함께 익숙한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 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카멜로와 조우 시, 모든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끝난 건가?”
이제 이걸 가지고 1L의 즙을 낸 후 키썬에게 가져다주면 그와 관련된 히든 퀘스트는 끝이 날 것이다.
한 생명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
그 생각을 하며 눈에 보이는 약초들을 모두 캤다.
언젠가 쓰일지 몰라 희귀한 독초인 포리초까지 전부 챙겨 뒀다.
‘이정도면 됐어.’
찬영은 미련 없이 제단 앞에 생겨난 5m 너비의 홀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진입할 수 없습니다.
접근 불가란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히든 퀘스트가 무사히 끝났고…….
‘네 번째 차원 다리가 눈앞에 와 있다는 거니까.’
찬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