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화
찬영은 베이콥 영주에게 갔다.
영주는 수도 출정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찬영에게 시간을 내었다.
“모두 자네를 칭송하더군.”
“그럴 만한 일을 한 게 없습니다.”
“아니, 자넨 많은 이들을 구했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영주는 찬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군다 바오트의 소드 메이스를 온몸으로 받아 내는 걸 나 역시 목격했네. 대단하더군.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예측한 건가?”
“못 했습니다.”
사실 바오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암흑 마력을 금강신장이 견뎌 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전부 도박이었다.
‘가치 측정은 능력의 총괄적인 지표일 뿐, 변수를 포함한 지표들은 아니니까.’
가진 바 방어벽들로 견디길 바랐을 뿐.
“아니었다고?”
“예.”
“그럼?”
“막길 원했습니다. 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갔을 뿐이지 모든 게 제 예상이었던 건 아닙니다.”
“죽음까지 각오했군.”
“예, 그랬습니다.”
찬영이 눈을 들어 영주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곁에 누군가가 죽는 순간이 언제든 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졌습니다. 많은 게.”
늘 흔들림 없던 찬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영주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군.’
분명 마음에 균열이 온 것이다.
하지만 이해한다.
그의 흔들림이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 않으니…….
이규복의 죽음은 그저 도화선이었을 뿐.
동료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여 왔을 것이다.
영주는 이제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네가 선택한 결정이 무엇인가?”
영주는 찬영이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짐작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했을 테고, 그에 따른 결정을 논의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멈출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본인이 잘 알기에…….
‘분명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영주에게 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나려고 합니다.”
“어디로?”
베이콥 영주가 되물었다.
“수도로 가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게. 병력이 재정비되는 대로 우리 역시 수도로 갈 것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떠나겠다고?”
“예, 수도의 상황을 먼저 살필 생각입니다.”
베이콥 영주는 한동안 찬영을 조용히 쳐다봤다.
“혼자선 위험하네. 당연히 알겠지만.”
“그래도 가겠습니다.”
“왜 이러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되는군. 이규복, 그 친구의 죽음 때문이겠지. 복수하고 싶은가?”
찬영은 말없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영주의 말대로 수도에 뉴 빌드가 얼마나 있건, 몬스터가 얼마나 있건 상관없다.
길을 막으면 벨 것이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입니다.”
“동의하네. 그들에게 용서란 사치지. 하나, 이건 그대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알고 있습니다.”
“이미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게군. 좋아, 알겠네. 단, 노파심에 한마디만 거들어도 괜찮겠나?”
“예.”
“고맙군. 난 자네가 복수를 하려는 이유가 두렵기 때문일 거라 짐작하네.”
“......”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게나. 두려움에 쫓기다 보면 평정심이 흔들리고, 잘 알고 있던 옳고 그름까지 희미해지지.”
베이콥 영주는 경험에서 나온 충고를 건넸다. 한때 몬스터에게 유일한 아들을 잃은 그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때를 떠올린 것이다.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잠자코 있던 찬영이 물었다.
“수렁에서 헤어 나와야 했네. 내 혈육은 아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가솔들이 있었고, 영지민들은 나의 뜻만 기다렸네. 난 그들에게 위안 받았고. 그 힘으로 그들과 싸워 왔네.”
“…….”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네. 그저 홀로 견디고, 그게 힘들어지면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으며 이겨 내는 것이지. 그래야만 우리를 전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네. 복수는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킬 뿐이라는 걸 명심하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찬영의 심정이었다.
그의 조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걸 머리로만 받아들일 순 없다.
현실은 여전히 똑같이 보였다.
그게 찬영을 힘들게 했다.
“말 몇 마디로 선택이 좌우되진 않네. 내 이야긴 그저 조언일 뿐, 선택은 자네 몫이지.”
영주가 찬영에게 다가와 자신의 오른손에 끼고 있던 은반지를 끼워 주었다.
“죽은 내 아들의 반지네.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아들이 컸다면 자네 나이일 것이야. 그래서인지 항상 자네가 아들처럼 느껴졌지.”
말을 마친 영주가 찬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립될 때 이 반지를 보라고 주는 것일세. 자넨 혼자가 아니야.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걸세.”
“하지만…….”
영주가 받으라며 강권했다.
“언젠가 내 뜻을 이해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게야. 두려움이 없으니 미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영주가 미소 지었다.
“잊지 말게. 삶의 무게를 짊어진 건 자네만이 아니야.”
그가 걸어가 직접 문을 열어 줬다.
철컥.
영주가 문 옆에 선 채 말했다.
“날 실망시키지 말게나.”
찬영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찬영이 다시 머무는 숙소에 돌아왔을 때, 그의 문 앞엔 글로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글쎄, 내 눈엔 그리 보이지 않소. 언제나 모든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던 그대가 처음으로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글로리의 대답에 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확히 봤다.
“견디는 중입니다.”
“알고 있소. 그리고 이겨 내겠지. 그래도 위로가 필요하면 날 불러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찬영이 글로리가 손에 든 약초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거.”
글로리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드워프라는 종족에게 받아온 약초요.”
“드워프요?”
“그래, 드워프.”
그 말을 시작으로 찬영은 글로리로부터 드워프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그의 곁엔 로레인과 제이나 등 수뇌부가 모여 있다고 한다.
드워프의 진술을 통해 얻을 고급 정보가 많을 테니까.
글로리는 그들과 함께 있으며 듣게 된 얘기들을 전달했다.
찬영이 잠자코 듣고 있다 말했다.
“놀랍네요.”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 르리에에만 있어야 할 아딘 암석이 여기에 쓰일 줄은 몰랐으니.”
“아딘 암석이 드워프에게선 검은 별이라고 불렸던 거군요.”
“그렇소. 고향에도 같은 돌이 있다는 내 이야기에 모두가 놀랐지. 나 역시 르리에에 있을 돌이 대륙에 있을 줄은 몰랐기에 함께 놀랐고.”
찬영도 무척 놀랐다.
대륙과 르리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 르리에에 있는 물건이 대륙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름은 달라도 동일한 특질의 암석이 있다는 사실은, 르리에에 있는 물건이 대륙에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사례였다.
“그 뒤 여러 가지 얘길 더 들을 수 있었소. 그에 의하면 거포의 충격을 분산시키는 용도로 아딘 암석을 사용했다더군.”
“그래서 그분을 바오트가 지금까지 억류해 온 셈이군요.”
“그렇다고 하더이다. 그로 인해 딸의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고…….”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럼, 모자란 약초를 어째서…….”
“내가 들고 왔냐는 거겠지.”
“예.”
“실은 들었든지 봤든지 분명 내 기억 속에 있는 약초 같소. 혹시 도타라면 이 약초를 재배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댈 찾아온 것이요. 무엇보다 그댄 손에 쥔 물건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지 않소.”
하긴, 어떤 이유로 봉인되거나 특별한 이유로 이름이 제한된 물건이 아니라면 충분히 그 이름을 알 수도 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르리에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로부터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었다.
“그 약초를 찾는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으십니까?”
“글쎄, 확답할 순 없지. 왜 그러시오?”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찬영은 진실을 감췄다.
혼자 떠날 길이다.
말했다간 글로리가 동행하게 될 것이다.
찬영은 그러길 원치 않았다.
“제가 돕죠.”
르리에의 시간은 10 : 1 의 비율로 흐른다. 글로리를 도와 약초에 대해 캐낸 뒤에 떠나도 될 일이다.
“그럽시다.”
“그럼, 잠깐 약초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러려고 온 것이니까.”
찬영은 잎이 네 개고 줄기에 하얀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는 약초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역시나.’
예상대로 시스템은 약초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집기만 해도 어떤 아이템인지 아니까…….
‘포리초라…….’
시스템에 의하면 프리초는 독초였다. 의외였다.
약으로 쓰인 약초일 줄 알았는데.
“독초군요. 그것도 독성이 아주 강한 독초요.”
오래 복용할수록 근력 손실을 가져와 결국엔 불구가 되어 버리는 독초라고 한다.
“독초라고? 정말이오?”
“예, 독초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독초를 약으로 쓰고 있단 말씀이시죠?”
“그렇소.”
“그럼 중독 상태를 독으로 연명해 가고 있단 얘기인데…….”
독이 독을 잡는다는 얘기에 글로리는 점점 더 놀라워했다.
“아마, 그도 놀랄 것 같군. 계속 약초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찾아내기 전까지는요.”
“그렇겠지. 그럼 이곳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겠군..”
“예, 아무래도 르리에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도타는 지금껏 약초 등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이 약초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정확한 질문을 던지면 분명 뭔가가 나올 것이다.
‘분명히.’
찬영이 문을 소환했다.
* * *
도타의 농장은 점점 면적이 넓어지는 중이다.
이젠 중소 규모 과수원 정도 되는 면적까지 늘어났다.
재배하는 그를 한참 찾아야 할 정도.
“도타.”
찬영이 자신을 만나 한껏 신난 타우린을 데리고서 그를 찾았다.
“딱, 딱. 주인님 오셨습니까?”
약초 나무에 매달려 있다 성큼 뛰어 내려온 도타는 무척 늠름했다.
그새 많은 재배와 교역 등을 통해 5,200의 가치까지 늘어난 그는 하루가 다르게 외형이 바뀌는 중이다.
가치 5,000이 넘자마자 3차 진화가 시작된 덕분이다.
뼈로 만든 해적 모자가 사라진 대신, 머리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넝쿨 왕관과 가슴, 허리를 뼈가 두르고 그 위에 넝쿨이 덮인 넝쿨 갑옷이 생겼다.
찬영이 늠름해진 모습이 된 그를 바라보던 사이.
“저번에 볼 때보다 체격이 훨씬 커진 것 같군.”
옆에 있던 글로리도 감탄했다.
“딱, 딱. 고맙습니다.”
“아니네. 진심이야.”
그의 감탄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타우린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어디까지나, 이 모든 걸 꾸리고 운영해 온 건 도타다.
‘굉장해.’
타우린의 지속적인 성장도 도타가 일궈 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치 6,420에 엑시스 퀘이크가 Lv.3 추가 성장해 Lv.8이 됐다.
덩치가 훨씬 커진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젠 고개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말 다 했다.
그때 도타가 여느 때처럼 방문 시 시작하는 근황을 보고해 왔다.
“현재 42종의 밭과 Lv.3의 황무지가 개간 중입니다. 딱. 딱.”
오두막은 Lv.5가 되어 초보자 결계가 완벽히 사라지다 못 해 90종의 보조 도구가 생겼고 그것들을 구입하고 사용했다.
솔직히, 이제 르리에 관련한 대부분의 일은 도타에게 일임한 터라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도타를 찾아오면서 오두막에 팔아치울 것들을 놔뒀어요. 처분하고 필요한 데에 써요. 지금처럼.”
“예, 딱, 알겠습니다. 딱.”
그 외 농장 관련 여러 얘기를 들은 후, 찬영이 도타에게 포리초를 내밀었다.
“도타, 이 독초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도타가 독초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딱, 딱. 예, 알고 있습니다.”
“역시!”
글로리가 환히 웃었다. 희망이 보였다.
“포리초입니다.”
도타의 대답에 글로리가 재차 물었다.
“이 독초에 관해 알고 있는 걸 전부 얘기해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딱.”
도타가 입을 부딪치며 포리초에 관해 얘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표정과 달리 얘기가 길어질수록 글로리의 표정이 굳었다.
“르리에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예, 딱.”
“그럼?”
“딱, 말씀드렸듯 포리초는 사우스라는 돌에서만 자랍니다. 그 돌은 르리에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듣던 찬영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건 포리초를 완벽히 치료할 수 있는 다른 약초에요.”
“딱,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게 무슨……?”
도타가 조용히 찬영과 글로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딱, 딱. 1종의 포리초는 다른 1종의 리젤초와 함께 자랍니다.”
“그런데?”
“중독을 완벽히 치료하려면 리젤초의 뿌리를 모아 즙을 1L 제작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다음 순간.
-히든 퀘스트 발생.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