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사력을 다한다는 얘기로구나.”
바오트가 씩 웃었다.
그는 그가 들었던 얘길 한마디 더 거들었다.
더 즐겁게 싸우고 싶었다.
“그래, 그의 동료가 그랬지. 도망치라고. 이규복, 도망치라고.”
찬영이 눈을 부릅떴다.
불안이 현실이 된 순간 솜털이 곤두섰다.
바오트가 그사이 다시 일어났다.
소드 메이스를 집어든 그가 찬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너라.”
찬영이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며.
‘광화.’
300%의 능력 상향을 소환했다.
파짓!
펄럭이던 공진이 갑옷과 함께 찬영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제 전장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놈만 보였다.
쐐액!
바오트가 찬영이 있던 자리에 소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쾅!
하지만 찬영은 없었다.
‘블링크.’
자리를 피한 찬영이 바오트의 등 뒤에 나타났다.
찬영은 바오트가 대처할 새 없이 순식간에 어깨 위에 올라탔다.
마나가 통하지 않는다면 아슬란의 칼날 위에 오라 대신 신성력을 덮어씌우면 된다.
‘홀리 웨폰.’
아슬란 위에 홀리 웨폰을 덮어 씌웠다.
놈의 허리를 베자마자 알았다.
서걱!
그 생각이 옳았다.
“크헉!”
바오트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찬영은 멈추지 않았다.
흔들리는 그를 쫓아 계속 검을 흔들었다.
쐐액! 쐐액!
올드원의 주문 ‘철벽’은 신성력을 두른 아슬란의 예기를 견디지 못했다.
생채기도 모자라 피가 흐르고 회색 가죽이 떨어져나간다.
바오트가 소드 메이스를 다시 흔들었다.
찬영은 이번에도 피했고 다른 주먹에 홀리 웨폰을 덮었다.
‘염왕권.’
착용한 헬레까지 연계된 견고함.
신성력으로 강화된 주먹이 바오트의 상처 위를 때렸다.
펑!
바오트가 허리를 감싸 쥐며 뒤로 잔발을 치며 물러났다.
“커헉!”
피를 토한 바오트.
그가 다시 소드 메이스를 잡았다.
오랜만에 즐거운 상대를 만났다.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계속, 계속 나를 치거라.’
바오트는 한 번의 기회를 노렸다.
퍼퍼퍼퍽!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찬영은 승기를 잡은 바오트를 더욱 세게 몰아붙였다.
아슬란이 그를 무수히 베고 또 베었고 주먹이 바오트의 상처 부위를 두드려 돌 같이 단단하던 턱과 가슴을 타격했다.
퍼퍼퍼퍼퍽!
“크헉…….”
바오트가 기어코 두 무릎을 꿇었다.
쿵!
찬영이 쓰러진 그의 턱을 향해 아슬란을 휘두르려던 그때.
바오트의 눈이 번뜩였다.
‘허점이 보이는구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바오트는 준비해 두었던 암흑 마력을 소드 메이스에 쏟아 부었다.
암흑 마력이 소드 메이스를 넘어서서 한 치 높이로 솟아올랐다.
“끝이다, 전사여!”
비틀린 미소를 지은 바오트의 소드 메이스가 찬영을 향해 날아갔다.
* * *
쩌적!
하지만 찬영은 튕겨 나가지도, 베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피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
콰직!
한쪽 팔로 날아온 소드 메이스를 막았다.
“크읏…….”
가볍게 신음이 나왔다.
‘버텼다.’
찬영이 시선을 들었다. 군다 바오트의 표정도 급변한 게 보인다.
당연했다.
놈의 암흑 오라가 꺼지고 있었으니까.
‘복마(伏魔)’
세상 모든, 마를 거부한다. 이는 금강신장의 효과.
치치칫!
그 효과가 암흑 오라를 약화시켰다.
약화되는 암흑 오라에 군다 바오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화는 소멸로 이어졌고, 소드 메이스에서 느껴지던 강한 예기는 암흑 오라가 소멸하며 더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허점이라고 생각했겠지.’
찬영이 나직이 말했다.
“허상인 줄 모르고.”
빈틈을 보인 것도 모두 예상한 시나리오.
놈의 공격을 프리징 스킨과 금강신장, 스툼의 방어력, 그리고 300% 스텟 상향과 차폐의 중첩으로 견디게 되면…….
‘금강신장과 맞닿은 암흑 오라는 소멸되고.’
찬영이 어느새 고쳐 쥔 아슬란을 소드 메이스 위에 내리찍었다.
암흑 오라가 소멸된 소드 메이스는 신성력으로 강화된 아슬란과 견고함에서 상대도 되지 않는다.
쩌저적!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소드 메이스가 균열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나 버렸다.
“……너는 무기를 잃겠지.”
눈을 부릅뜬 군다 바오트에게 아슬란이 벼락처럼 날아갔다.
군다 바오트는 검에 맞서 양손을 뻗었다.
“아직 멀었다!”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멈추지 않고 검을 뻗는 것으로 충분했다.
콰드드득!
검과 손이 부딪치자 ‘츠츠츳’ 소리를 내며 불꽃이 튄다.
더욱 힘을 줬다.
이게 끝이라는 걸 안다.
둘 중 하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끝……!
콰지직!
그리고 아슬란을 전부 내찔렀을 때 군다 바오트의 가슴이 보였다.
츠츠츠.
아슬란은 정확히 바오트의 가슴에 박혔다.
그곳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쥐고 있는 검을 통해 바오트의 호흡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이다.
“……끝나지 않았…….”
“아니, 끝났다.”
푸욱!
찬영이 대답과 함께 박혀 있는 아슬란을 가로로 그어 버렸다.
서걱!
피가 튀며 군다 바오트가 모로 넘어졌다.
다음 순간 온 전장이 침묵했다.
아군과 해적의 시선이 모두 바오트와 찬영에게 쏠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군다 바오트가 쓰러졌다!”
아군의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반면 해적은 뿔뿔이 도망치는 게 보였다.
정말, 끝인 것이다. 정말…….
“젠장!”
다 왔었다.
코앞까지 도착했고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끝났을 일이다.
그런데 늦어 버렸다.
찬영이 아슬란을 들어, 죽어 있는 군다 바오트의 시신을 마구 베었다.
놈이 죽어도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규복과의 지난날이 스쳤다.
함께 싸웠던 지난 날. 서로를 도우며 헤쳐 나오던 수많은 시기.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이규복의 도움 덕택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찬영이 다시 소리치며 다시 아슬란을 치켜 든 그때.
“……제발.”
제이나가 찬영의 손을 잡았다.
“제이나.”
고개를 돌린 찬영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만해요, 이제 다 끝났어.”
찬영은 고개를 젓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어요.”
제이나는 찬영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안아 주는 것 말고는.
“미안해요.”
그게 뭐든…… 제이나는 그냥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안고 있는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전투가 끝나고 있었다.
* * *
저 멀리 하나둘씩 정박하는 수송선을 보며 로일 영주가 말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베이콥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은혜라니요? 그저 백작께서 무사하신 것이면 되었습니다. 베이콥가는 로일가와 왕국의 안위를 지킨 것으로 만족합니다.”
희생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받을 생각이 없다는 대답에 로일 영주가 탄복했다.
“나 왕국의 다섯 번째 검, 레지앙 로일.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베이콥가의 뜻에 동조하리다.”
그 어떤 약조보다 귀중한 약조였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둘의 수심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으나 가장 중요한 건 왕의 안위다.
“어떤 소식도 접하신 게 없으십니까?”
“그렇소, 전혀 알 수 없었소. 그들이 만들어 낸 디스펠 역장이 마법 통신구의 장애를 발생시켜 온 탓이지…….”
로일 영주가 대답했다.
이 사실을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차원의 돌을 탐색 가능한 찬영에 의해 알게 됐다.
“도시 안에 디스펠 장력을 유지하는 첨탑이 숨겨져 있었다니…….”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었으니 발견하시지 못한 건 당연합니다.”
그 첨탑엔 차원의 돌이 장착되었고 디스펠 역장을 일으킬 수 있는 파장 발사가 가능했다.
“수도도 지금 로일시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신 게 확실한 것 같군요.”
베이콥 영주가 말했다.
이젠 추측이 아니라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게 말이오. 통신 불능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고 계신 게 분명하오.”
“예, 하루 속히 폐하께 향해야겠습니다. 다만…….”
베이콥 영주가 주위를 둘러봤다.
로일은 황폐해졌다. 재건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로일 영지의 마법 병단은 전부 전멸했다. 지원은커녕 싸우자는 제안조차 쉽지 않았다.
“배를 가져가시오.”
그 마음을 눈치챈 로일 영주가 먼저 얘길 꺼냈다.
“배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현재 보유한 갤리선과 수송선들을 규합한 후 국경 수비대를 파견하겠소. 또한,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두고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함께 따르게 하시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플로딘에 의해 마법 병단이 전멸 당한 로일 영주에게 남은 건 기사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약조대로였다.
그는 모든 전력을 다해 베이콥가의 뜻을 행보에 도움이 되려 했다.
“무리이십니다.”
베이콥 영주가 고개를 젓자 로일 영주가 물었다.
“왕국을 구할 다른 방도가 있으시오?”
“그건…….”
“나는 수석 행정관 오르테즈에게 영지의 재건을 맡기고 베이콥가와 함께 갈 것이오.”
로일 영주의 단호한 태도에 베이콥 영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왕국을 위한 마음이 아니라면 힘든 선택이다.
“고맙습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이오. 그런데…….”
웃음 짓던 로일 영주가 말을 이었다.
“뉴 빌드라고 하는 자들에 대해 얼마나 더 알고 계시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정도까진 파악이 끝났습니다.”
“정말이오?”
“예.”
베이콥 영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뉴 빌드에 대해서, 그리고 갓피스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얘기가 끝났을 때 로일 영주는 굉장히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믿기 힘든 일이로군.”
“겪어 온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럼 우리의 부활이 지구에서 온 각성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단 말이오? 아니, 이 모든 것이.”
로일 영주가 군다 바오트와 싸웠던 그 황금빛의 남자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남자로 인해?”
베이콥 영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 번째 차원 다리까지 개방도 : 73.4%
찬영은 창을 들여다봤다.
울분을 가라앉힌 후부터 보이는 차원의 돌을 전부 수거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 싸움의 끝이 보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혼자 남은 지금 이규복의 잔영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사라라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변하지 않은 현실이었고 얼마나 더 싸워야 이 모든 게 끝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조금씩 진실이 드러나고는 있으나 이 진실 뒤에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얼마나 더?’
찬영은 이를 꾹 다물었다.
고통스럽다……. 그리고 두렵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이렇게 하나둘씩 잃어갈 것이다.
이번엔 이규복, 다음엔? 그다음은?
“안 돼……!”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찬영이 창밖을 노려보았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자비까지 전부 던져 버릴 것이다.
더욱 냉혹해지고, 사나워질 것이다.
내 희망을 지키려면, 삶과 모든 것들을 지키려면…….
뭘 해야 할지 알 거 같다.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인 찬영에게 그녀가 성큼 걸어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계속 같이 못 있어 줘서.”
찬영이 제이나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이나는 단장이잖아요.”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천천히 떨어진 그녀가 찬영을 올려다봤다. 웃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건 찬영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잃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플로딘은 수도로 떠난 것 같더군요.”
“네, 그의 흔적이 더러 발견되긴 했지만 수도로 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아뇨, 하지만…….”
그녀가 쓰게 웃으며 찬영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덕분에. 그러는 찬영 씨는요?”
“난…….”
찬영은 제이나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손만 조용히 내려다봤다.
솔직히 괜찮아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질 수가 없었다.
“규복 씨가 원하던 건 전쟁의 끝이었어요. 아니, 우린 처음부터 전쟁을 원하지 않았죠.”
찬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이나는 달라진 찬영의 분위기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분노했고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한때의 자신처럼.
“두려운 거죠?”
그녀는 안다. 그의 마음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시작됐는지…….
“네, 두려워요……. 많은 게.”
“저도 그래요. 그리고 그랬었죠. 하지만 당신을 만나면서 알았어요.”
“어떤 걸요?”
“혼자가 아니라는 거요. 흔들리고 두려우면……. 기대면 돼요. 내가 있잖아요.”
찬영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두렵다. 그녀까지 잃을 거 같아서, 가진 모든 게 사라질까 봐.
찬영이 안고 있던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조금 쉴게요.”
“같이 있을게요.”
“아뇨, 난 괜찮아요.”
제이나는 할 수 없다는 듯 방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 찬영은 다시 창가를 쳐다봤다.
한동안 창밖을 보던 찬영은 결정을 내렸다.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