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 * *
난전(亂戰)이다.
베이콥 영주는 주위를 둘러봤다.
기사들을 비롯해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방패를 더 굳세게 들어라! 한 명이라도 흔들리면 대열이 무너진다!”
영주가 소리쳤다.
“으아아!”
병사들이 기합을 질렀다. 날아오는 화살에 흔들리던 방패가 다시 제자릴 잡고 굳건해졌다.
‘조금만 더.’
영주는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선 8백의 기마병들이 영주의 명을 기다리며 돌격을 준비했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영주는 방패병들과 함께 성벽 아래로 전진했다.
‘성벽을 점거했을 줄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해적들의 움직임은 무척 민첩했다.
영주는 방패 틈 사이로 눈을 돌렸다.
그 틈 사이로 10m가 넘는 계단 형태의 나무 사다리가 보였다.
성벽을 오르기 위한 공성 병기, 바퀴 달린 벨프리다.
쾅!
하지만 그중 한 개가 날아온 거대한 노포(弩砲)에 의해 부서지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런…….’
영주가 이를 악물었다.
방금 날아온 저 거대한 화살은 성벽 방어탑에서 날아온 것이다.
‘발리스타?’
길이만 3m가 되는 거대 노포.
한때 해적을 향했던 그 노포는 이제 같은 아군인 자신을 노리는 화살이 됐다.
하지만 앙갚음을 하듯, 저 멀리 날아온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가 발리스타를 향해 추락했다.
콰쾅!
발리스타가 불꽃과 함께 타올랐다.
제이나와 마법 병단이 저 멀리에서 공성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마법 병단의 활약을 본 기사단이 힘을 냈다.
“전진하라!”
또 다른 벨프리를 지휘하는 로버트가 외쳤다.
‘됐군.’
영주 또한 성벽에 하나둘씩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벨프리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전진하느라 열 개의 벨프리 중 네 개를 잃긴 했으나, 다섯 개의 벨프리가 성벽 위에 고정됐다.
우아아!
벨프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 수백의 지상 병력.
머지않아 발리스타가 무력화될 것이다.
영주가 맡은 벨프리까지 성벽에 안착하기 직전의 상황.
영주가 곁에 있는 3대대장에게 외쳤다.
“계속 벨프리를 끌고 가게! 난 생존자를 구하겠네.”
“알겠습니다!”
3대대장의 대답과 함께 영주는 이규복과의 마지막 통신을 떠올렸다.
-저희가 먼저 규합하는 적들을 혼란시키고 있겠습니다. 그 와중에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때까진 모든 게 괜찮았다. 하나, 그다음 보고가 들렸을 때 이규복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왔다.
-적들이 성벽 위를 비롯해 뚫려 있는 입구마다 속속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돌격을 멈추고 느리게 진군하셔야 합니다! 제기랄! 군다 바오트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회색 피부…….
그 후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이규복의 보고대로 성벽을 가득 메운 해적 궁병과 공성 무기로 인해서 진입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그게 가능해졌다.
‘보인다.’
영주는 전방의 방패병을 헤집고 나아가 오른편에 보이는 뚫려 있는 성벽을 발견했다.
그곳에 시체 더미가 있었다.
아군이다.
살아 있을지 살아 있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이들이다. 시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 사이 접근 준비가 끝났다.
“돌격대를 부르겠습니다!”
“그리하시게.”
그러자 3대대장이 소리쳤다.
“깃발을 흔들어라!”
빼곡히 세워진 방패 뒤로 깃발이 흔들렸다.
두두두!
지시를 기다리던 크루거 경이 말을 달렸다.
“영주께서 우릴 부르신다!”
저 멀리 팔백여 기가 넘는 기마대가 돌격을 다시 개시했다.
선두에서 달리던 한 병사가 영주의 말을 벨프리 근처로 가져왔다.
파밧!
땅을 박찬 영주가 말안장 위로 점프해 자신의 말에 빠르게 탑승했다.
무너진 성벽 통로를 향해 달려가는 기마병들이 보였다.
그러자 입구 앞을 지키고 있던 해적 대열 사이로 회색 거인이 걸어 나왔다.
‘놈이다.’
규복이 얘기한 회색 피부를 가진 수장…….
영주는 확실히 그가 규복이 얘기했던 자임을 눈치챘다.
‘군다 바오트!’
그가 틀림없다.
시야에 걸리는 건 놈뿐만이 아니었다.
반쯤 부서진 붉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군다 바오트 손에 목이 졸린 채 발이 들려 있었다.
영주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규복!”
마나가 실린 영주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군다 바오트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영주를 향했다.
“전사여, 네 동료가 왔다.”
군다 바오트가 반쯤 의식을 잃은 이규복을 쳐다봤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자는 모든 걸 다 건 싸움을 했다.
하지만 놈이 몰랐던 게 있다.
‘나 역시 모든 걸 걸었다.’
군다 바오트는 군마들과 함께 달려오는 영주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그가 씩 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성벽을 가득 메운 해적 떼가 군다 바오트의 앞으로 장창을 치켜들었다.
기병들이 다가올수록 군다 바오트는 심장이 요동쳤다.
흥분이다.
그때, 희미한 의식을 차린 이규복이 파르르 눈을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이 졸린 채임에도 여전히 자신의 대검을 놓지 않은 이규복은 모든 기력을 짜내 입을 열었다.
“죽지…… 않았어. 끝까지…… 싸……운다.”
이규복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다시 차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보고 있는 세상이 뒤흔들리고 빙빙 돌고 있다.
의지로 해결하고 싶으나 몸이 의지를 거부한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싸웠으나 적어도 오늘은 아니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내가 보였다.
그녀가 웃는다.
윤세라, 나의 아내.
그녀의 무덤 앞에서 이 싸움을 끝냈다고…….
끝내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자기야, 고생했어.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속에서 꽉꽉 눌렀던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덤 앞에 당당히 돌아가는 게 삶의 목표였기에 모든 전투에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 여정이 끝이 날 모양이다.
이규복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의식이 흐려지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모든 게 사분오열되어 흩어져 가는 것만 같다.
-이제 내 곁으로 와요.
그녀가 저 멀리 자신을 부른다.
이규복은 손을 뻗었다.
점차 모든 게 깜빡이며 어두워져 간다.
“애석하군.”
군다 바오트의 시선이 규복의 흔들리는 블레이드 끝에 머물렀다. 애써 그걸 들어 올리려는 게 보인다.
의지는 인정하나 무력한 반항이다.
군다 바오트가 다른 손을 뻗어 블레이드를 쥔 이규복의 손을 그대로 감싸 쥐었다.
콰직! 으드득!
이규복의 손뼈가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온다.
“끄아악!”
군다 바오트는 무심한 눈길로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살을 비집고 나온 뼈까지 손아귀 안에서 모두 바스라지는 게 느껴진다.
군다 바오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더 비참하게 비명을 질러라. 너의 군대가 내 앞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고함을 친 군다 바오트가 손을 돌려서 이규복이 달려오는 군마를 보게 했다.
“똑똑히 보아라. 전부 널 따라갈 전사들이다.”
어느새 이규복의 목에 접근한 군다 바오트의 이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깨물었다.
콰직!
입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피와 함께 척추에 박혀 있는 차원의 돌이 번쩍거렸다.
꿀꺽꿀꺽.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군다 바오트의 목을 타고 넘어왔다.
피를 삼킬수록 근력과 암흑 마력이 늘어난다.
척추에 박힌 차원의 돌.
그것에 새겨진 ‘흡혈’의 주문.
끊임없는 갈증은 이것에 기인한 것이다.
해갈은 없다. 삼킬수록 갈증은 계속 증가한다.
“크아앙!”
군다 바오트가 맹수같이 울었다.
“안 돼!”
베이콥 영주는 더욱 빨리 말을 몰았다.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거친 투레질 소리가 귀에 닿았으나 저 멀리 있는 이규복은 한없이 멀리 느껴졌다.
군다 바오트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채 피를 빨리며 절규하는 이규복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생명이 다할 듯했다.
“버텨 주게! 규복!”
고함치는 영주가 점점 가까워져갈수록 바오트의 웃음소리가 전장을 더 사납게 덮었다.
“잘 가라.”
바오트가 그 입을 뗀 순간, 뼈가 전부 바스러진 이규복이 눈을 번쩍 떴다.
왼손에 들고 있던 붉은 거인.
날이 선 블레이드에 모든 걸 쥐어짜 낸 오라가 일렁였다. 어느 때보다 검 주변에 짙게 유형화된 오라.
‘곧 갈……게.’
이규복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환히 웃었다.
그녀가 저 멀리 손을 흔드는 게 아른거렸다.
쐐액!
역수로 취한 붉은 거인의 기습적인 일격.
바오트조차 예상 못한 일격이라 처음으로 붉은 거인의 칼날이 바오트의 살을 뚫었다.
“……거기까지.”
하지만 그 이상은 용납되지 않았다.
바오트가 다른 손으로 블레이드 칼날을 통째로 잡아 버린 것이다.
드드득!
규복의 마지막 오라는 그의 전신에 새겨진 올드 원의 또 다른 주문, ‘디스펠’에 의해 마치 바람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오라가 사라진 붉은 거인은 제 주인처럼 빛을 잃었다.
하지만 붉은 거인은 그 예기만으로 무시 못 할 장비이다.
바오트는 자신의 손아귀에 뚝뚝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또 다른 올드 원의 주문, ‘철벽’은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이제껏 철로 만든 무기는 자신의 몸을 뚫지 못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릅뜬 바오트가 조용히 붉은 거인을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경악할 일이다.
피를 흡수한 뒤엔 대부분 의식을 잃고 즉사하기 마련인데 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는 건…….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구나!’
군다 바오트는 피가 끓어올랐다.
마음에 든다.
‘상상 이상으로 긍지 높은 전사의 피를 마셨구나.’
달아오른 군다 바오트가 손에 힘을 줬다.
규복은 이 순간, 마치 온몸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꿈만 같지만…… 받아들여야겠지.
많은 게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와 함께 치열하게 싸워 온 기억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에 후회는 없다. 어느새 가장 좋은 친구가 된 그 남자, 찬영은 이제 혼자가 아니게 됐으니까.
그의 곁엔 많은 동료가 있었다.
그를 믿는다.
그가 이 긴 싸움의 여정을 끝내리란 걸.
‘안……녕.’
이규복이 입술을 달싹였다.
뿌드득!
규복의 목뼈가 으스러지며 마지막 생기를 일으켰던 규복의 눈동자가 그 빛을 잃었다.
툭.
목이 떨어진 규복, 그와 함께 달려오는 베이콥 영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감히!”
다 왔는데, 조금만 더 왔으면 됐거늘.
베이콥 영주가 달리던 채로 검을 고쳐 쥐었다.
“나 필립 베이콥,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소리치는 그와 함께 크루거 경이 외쳤다.
“더 빨리 달려라! 매섭게 달려서 영주님과 함께 돌진하라!”
군다 바오트는 쥐고 있던 이규복의 시체를 옆으로 던지며 땅에 박아 뒀던 소드 메이스를 집어 들었다.
웅, 웅.
꽤 많은 전사의 피를 마시고 나니 근력부터 암흑 마력이 이전보다 더욱 증가했다.
어느 때보다 충만한 힘이 넘친다.
치치치직!
암흑 마력으로도 오라를 만들 수 있다.
군다 바오트는 자신의 소드 메이스 위에 흐르기 짙게 흐르기 시작한 유형화된 오라를 기분 좋게 내려다보았다.
오라는 천천히 소드 메이스를 덮은 뒤 이윽고 소드 메이스를 넘어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품어 온 전력의 힘.
“와라!”
군다 바오트는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해적 떼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올랐다.
믿는 것이다.
그들이 보유한 소드 마스터를…….
그 순간, 강한 투레질 소리와 말 울음 소리가 섞여 들렸다.
히이이잉!
높이 치솟는 소리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덩달아 말발굽 소리가 가중됐다.
전방을 주시하던 군다 바오트가 인상을 썼다.
느낀 것이다.
후방에서 뭔가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적이, 적이 나타났습니다!”
후방의 해적들에게서 들려온 외침이 전파되어 군다 바오트에게까지 들렸다.
“그럴 리가.”
군다 바오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해안가의 병력은 검은 별의 수송을 비롯해 해적의 난입을 막을 수 없다. 온다고 해도 자신의 부하들이 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후방을 향해 밀어닥치기 시작한 로일 영주의 병력.
“한 놈도 남기지 말라!”
로일 영주가 외쳤다. 양쪽에 갇히게 된 바오트가 후방을 향해 돌아섰다. 전방이 버틸 동안 후방을 정리할 생각이다.
“이거 참, 일이…….”
군다 바오트가 저 멀리 달려오는 로일 영주의 깃발을 확인한 후 입술을 비틀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바오트가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