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 * *
“컥……!”
폐부가 꿰뚫린 해적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루호 제독은 해적의 가슴에 꽂은 핼버드를 다시 뽑아 들며 주위를 둘러봤다.
입고 있는 제복 사이로 피가 흐르고, 어깨와 오른 다리에 부러진 화살이 박혀 있었으나 그는 분명 오연히 살아 있었다.
작전이 먹힌 덕분이었다.
충각으로 인해 갤리선 선체에 깊이 박혀 있던 중소형 크기의 롱십 백여 척 정도가 갤리선의 폭발 직후 산산조각 났다.
포탄세례를 막은 놈들의 방어막도 초근접전에서의 폭발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못 버티겠어.’
루호 제독은 폭발 직후, 남아 있던 아군과 함께 백병전을 시작했다.
갤리선 폭발 작전은 루호 제독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폭발의 범위를 계산한 후 갤리선을 충각으로 타격하려는 롱십들을 끌어들여 최대의 효과를 보인 것이다.
1차 타격으로 적을 방심시킨 뒤, 2차 백병전으로 유도한 작전이었다.
분명 많은 피해를 준 작전이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해류, 풍향 등을 살펴보아도 변수가 될 만한 요소는 없었다. 여러 작전을 펼칠 수 없는 평화로운 바다라는 한계를 대입해 본다면…….
‘이게 최선이었지.’
그렇기에 시간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졌고 지금에 이르렀다.
“후우..”
숨을 몰아쉰 루호 제독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돌아봤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루호 제독은 이맛살을 구겼다. 이미 해적선이 주위를 뒤덮고 있다.
하지만 다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부하들도 무너진다.
“신념 따위를 위해 싸우지 마라. 너희들이 지켜야 할 가족을 위해 싸워라!”
루호 제독이 다시 뛰었다. 그 뒤로 서른 명 가량의 국경 수비대가 함께 움직였다.
“화살이 날아옵니다!”
해적을 베며 나아가던 부하가 제독을 향해 소리쳤다.
‘지독한 놈들!’
주위를 가득 메운 롱십에서는 적아를 가리지 않고 화살이 날아왔다.
모두 죽이겠다는 심산.
처음엔 설마설마하다가 아군의 희생이 커졌다.
하지만 이것도 면역이라고 몇 차례 당하고 나니 능숙해졌다.
제독이 황급히 허공을 쳐다봤다.
“방패가 있다면 방패를 들어 올리고 시체가 있다면 힘을 합쳐 시체를 들어 올려라!”
명령과 함께 살아남은 국경 수비대 병력 열 명 가량이 원을 그리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 뒤로 나머지가 방패 가운데 자리 잡고 시체를 들어 올렸다.
“으악!”
“크헉!”
주위에 있던 해적들이 동료들이 쏜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제독은 시신을 비집고 튀어나온 화살촉에 흠칫 놀라며 화살 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쏟아진 화살에 의해 한껏 들썩이던 시신이 어느 순간 멈춘 그때.
정적이 감돌았다.
제독이 시신을 옆으로 던지며 시야를 확보했다.
갑판 위에 있던 해적이 전부 죽었고 다른 롱십들에서 새로운 해적들이 다시 밀려들고 있었다.
“다시 진격하라!”
핼버드를 들고 뛰기 시작한 제독.
“죽여!”
해적들이 진격하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 * *
같은 시각, 해안가.
쐐액!
오르테즈가 모래밭을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검 끝에 맺힌 옅은 오라가 적의 심장과 폐부를 베고 지나갔다.
선명하진 않으나 분명 오라가 맞았다.
“후우……!”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금세 주위를 뒤덮는 해적들이 보인다.
서서히 좁혀 오는 적들.
한둘이 아니다.
이미 해안가에 하나둘씩 정박하는 해적선들은 그 수가 어언 백여 척에 이르렀다.
이미 해안에 설치한 마나 지뢰부터 파 놓은 구덩이 등…… 깔아 놓은 트랩들이 대부분 사용됐다.
그런데도 해적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원군이 있다! 그들이 올 때까지 버텨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한 떼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말을 타고 밀려드는 한 떼의 무리들.
‘영주님?’
로일가를 뜻하는 깃발과 함께 밀려든 병력이 빠르게 해적들을 도륙하며 오르테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사들이 빠르게 그 주변에 호위망을 만들고 말을 탄 영주가 황급히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르테즈!”
“영주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두 사람이 뜨거운 눈길을 나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떻게 이곳까지……!”
“성벽이 장악당했네! 베이콥가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더 버티기 힘들었지.”
오르테즈는 내색 하지 못하고 탄식했다.
알고 보니 원군이 아니라 퇴각 중인 아군이었던 것이다.
마침 로일 영주의 오른손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피가…… 피가 나고 계십니다!”
오르테즈가 놀라서 소리쳤다.
“자네도 그렇네. 모두가 그렇지.”
“영주님!”
“그 얘긴 그만하세.”
영주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이 산개되어 해적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백성들은?”
“수송선에 태워 해안을 벗어났습니다. 약속해둔 지점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만, 만약 오늘이 지날 때까지 다른 소식이 없다면 수도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행이군. 쫓고 있는 해적은 없었겠지.”
“예. 제독께서 시간을 벌어 주셨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네. 그거면 됐고말고.”
영주는 오르테즈의 보고에 숨을 골랐다.
안도였다.
“제독은…… 죽었겠지.”
“예.”
“그렇군.”
영주의 눈빛이 복잡하고 슬펐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신색을 회복하면서 말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네. 베이콥가가 해적의 후방과 교전하고 있으니 우릴 도우러 올 수 있을 것이야.”
희망적으로 들렸으나 당장의 전황은 나빴다.
아무리 베이콥가가 빨리 도착한다고 한들, 자신들이 전부 죽고 난 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오르테즈가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전황과 상관없이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맙네, 뭐든.”
오르테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영주님을 호위하라!”
그러자 영주가 뒤이어 소리쳤다.
“아니, 나를 호위하지 마라! 대신 곁에 있는 동료를 보호하라! 살아남으려면 대열을 유지해야 한다!”
“하오나, 영주님!”
“오르테즈, 내 말 잘 듣게! 백성이 안전하다면 영주가 해야 할 일은 수하들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는 일일세.”
“그러나 영주님의 안위는 로일의 희망입니다.”
“아니, 저들 모두가 희망이네.”
오르테즈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이래서 그의 주군이었다. 백성을 아끼는 인정 많은 영주. 영주의 책임감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내 뜻을 따라 주어 고맙군.”
“무엇이든 따르겠나이다.”
“좋네.”
스릉!
영주가 검을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뽑아들었다.
“늘 답답한 영주를 인내하느라 고생하였네. 이젠…….”
영주가 해적들에 의해 무너져 가고 있는 둥근 호위망을 보며 자신의 말에 다시 올라탔다.
“맘껏 싸우세. 왕국을 위해.”
“왕국을 위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영주가 온 방향에서 또 다른 해적 떼가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한데, 이미 시작된 난전으로 인해 그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저 멀리 수평선을 지나 떼 지어 나타나기 시작한 갤리선들을.
그곳엔 국경 수비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 * *
쐐액! 쐐액!
제독이 할버드를 휘둘렀다.
또 한 명의 해적이 목이 박혀 쓰러지며 그가 두 손으로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헉……헉!”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제독은 부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두 다리 모두 부러져 있는 부하 한 명이 뒤에 주저앉아 있었다.
살아남은 마지막 부하였다.
지켜야 했다.
“제독님, 저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다.”
울먹이는 부하를 보며 제독이 말했다.
부하는 울음을 꾹 참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이미 그는 많이 다쳤고, 온몸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와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일어나기조차 힘든 그의 희생에 부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도움이 되지 않을 바엔 죽는 게 낫다.
“……여신의 품에서 뵙겠습니다!”
제독이 부하의 목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부하는 목을 검에 내리 긋고 있었다.
“안 된다!”
제독이 들고 있던 핼버드를 던지고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찰나.
제독에게 쉽게 못 덤비던 해적들이 기회를 포착했다.
“죽여 버려!”
“놈의 목에 상금이 걸려 있다!”
“내 거야!”
이리 떼처럼 달려든 해적과 함께 제독이 부하의 손을 붙잡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부하의 눈과 마주한 제독의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고맙다.”
마지막까지 버텨 주어서.
뒷말을 차마 뱉을 시간은 없어 보였다.
이미 두 사람의 전신으로 수십 개의 칼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허공을 지나는 물체가 날아오기 전까진.
스륵!
제독은 다음 순간 작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발치 아래에 해적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툭. 툭. 툭.
시신들이 한두 구씩 늘어나기 시작하자 제독도 상황을 인지했다.
안고 있던 부하에게서 떨어진 그의 시야에 한가득 쌓인 시체들이 보였다.
방금 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해적들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들 대신…….
‘이자는 누구지?’
한 그림자가 제독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휘날리는 검붉은 망토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은색의 비늘 경갑.
‘기사?’
정체를 몰라 당황해한 제독에게 미동 없던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제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시오?”
찬영이 미소 지은 후 해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원군입니다.”
그러자마자 그들이 선 배 위로 커다란 범선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건…….”
제독이 눈을 부릅떴다.
* * *
말론은 검은 별 위에 올라서서 꽤 빠른 속도로 해안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차피 검은 별의 진로를 막을 만한 것들은 없었다.
밀려든 해적 떼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 놈들이다.
자신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물론 몇몇 끼어드는 것들이 있긴 했다.
‘망령의 연기.’
시전자를 검은 연기처럼 만들어 초인적인 이동속도를 부여하고 다른 물체들도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고위 암흑 마법.
그 마법이 사용되자 로일 병사들의 위로 검은 연기가 떨어졌다.
쐐액!
그러자마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말론.
스릉!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 끝에서 갑자기 양날의 검이 솟았다.
순식간에 창이 되어 버린 지팡이.
서걱! 서걱!
말론은 번개처럼 지팡이를 휘둘러서 정예 병사 여덟 명을 빠르게 베어 나갔다.
“크악!”
병사들은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에게 저항도 못하고 빠르게 쓰러졌다.
“누굴 상대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
말론이 죽어 있는 병사의 머리를 발로 찬 후 계속 전진했다.
전투 따윈 관심 없었다.
오로지 검은 별의 수송만이 중요했다.
“계속 전진해라!”
그렇게 검은 별을 수송하는 행렬은 해적들이 가져온 수송선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 * *
수송 행렬을 따르던 카멜로는 자신의 조수 역할을 하던 공학자, 누보를 쳐다봤다.
누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는 뜻이다.
카멜로는 이동하면서 주위를 힐끗 둘러봤다.
‘절호의 기회다.’
바오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이제껏 이런 기회는 없었다.
마법사도, 바오트도, 그가 데려왔다는 말론도 전투에 열중하고 있었다.
검은 별은 수송선에 오르고 있었고, 대부분의 해적은 검은 별을 수송선에 태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들을 지키는 건 소수의 해적들 뿐.
지금이 아니면 도주는 불가능했다.
‘저놈에게 약초가 있다.’
자신을 데리고 있는 해적 중 한 명이 약초 자루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딸의 수명을 연장시켜 줄 약초 자루다.
그 옆엔 딸이 덩치 큰 해적에 의해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저놈들부터…….’
조용히 따르던 카멜로가 특별 제작된 수갑이 묶인 채, 눈치를 봤다. 해적들이 전부 정면을 보고 있는 게 보인다.
퉤.
눈치를 보며 입 안에 있던 열쇠를 뱉었다.
검은 별을 제작하면서 은밀히 만든 수갑을 푸는 열쇠다.
철컹.
은밀히 수갑을 푼 카멜로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윽…….”
“이 새끼, 왜 이래?”
갑자기 쓰러진 카멜로를 향해 가장 먼저 다가온 건 누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족장님!”
걱정하는 척하며 카멜로에게서 열쇠를 받아든 그는 해적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그사이 두 명의 해적에게 둘러싸인 카멜로.
콱!
때를 기다리던 카멜로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보따리를 든 해적의 귀를 깨물었다.
“끄아악!”
경련을 일으키는 해적과 함께 카멜로가 보따리를 낚아채어 뛰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잡힌 건 보따리 해적의 롱 소드.
커다란 손으로 롱 소드를 쥔 그가 딸을 짊어지고 있는 해적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
황급히 딸을 던진 해적이 검을 뽑아들려 했으나 그보다 카멜로의 검이 먼저 그의 목구멍에 박혔다.
“커헉!”
뒤로 쓰러지는 해적과 함께 카멜로가 묶여 있는 딸과 보따리를 짊어진 채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놈을 쫓아라!”
“드워프들이 도망친다!”
카멜로를 놓친 해적들이 목청을 높였다.
한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도 있다!”
난데없이 누보가 수갑을 풀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고, 공학자도 도망친다!”
순식간에 흩어지듯 도망치는 둘을 보며 해적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뭐?”
외침을 들은 말론이 또 한 명의 정예 병사를 베어 버린 후 고개를 돌렸다.
멀리 드워프 둘과 공학자가 난전 사이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그가 막, 그들을 쫓으러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한 해적이 뛰어왔다.
“마, 말론님! 갑자기 적이 탄 배들이…….”
“닥쳐라, 지금은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움직일 수 없었다.
우측에 보이는 해안가 일부.
그곳에 정박한 해적선들 위로 네 배는 큼직한 갤리선들이 해적선들을 깔아뭉개며 공격적으로 정박해 오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론이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