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어푸!”
찬영이 헤엄치는 글로리에게 작은 돛단배 위에서 손을 뻗었다.
“여기.”
“고맙소만, 그녀부터 부탁하오.”
글로리는 물에 젖은 채 축 늘어져 있는 지수를 돛단배 난간 위로 올렸다.
찬영은 그런 지수를 안아 끌어와서 조심스럽게 갑판 위에 눕혔다.
그사이 글로리도 갑판 위로 올라오면서 물었다.
“숨은 쉬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되오. 배 위에서는 그렇게 잘 싸우더니…… 물에서는 쥐약이구려.”
“그러게요.”
찬영은 그녀가 추울까 싶어 공진을 벗어 그녀 위에 덮어 주면서 대답했다.
수송선의 갑판은 중간 부분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배의 파손은 치열했던 전투 흔적을 말해 주는 거였다.
“끝났군.”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의 그 말에 그도 방금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찬영은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손에 전율이 일었다.
‘방금 그건…….’
찬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기예였다.
오라가 검의 형태로 구현되어 한 치 높이로 길쭉하게 솟는 형상.
그때만큼은 두 가지 심법이 조화를 갖추며 오라를 위해 화합했다.
사람들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소드 마스터라고 칭한다고 말해 줬다.
그 기예를 펼칠 수 있는 게 대륙에서도 몇 사람 되지 않는다면서…….
‘그저 눈에 보이는 선에 이끌린 것뿐이었는데…….’
결과는 엄청났다.
아슬란의 검 끝에 솟아오른 오라로 비에리를 건물 잔재와 함께 베어 버렸다.
물론 비에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중력을 이겨 내며 기어코 중력의 반경 밖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잠깐 정도는 찬영의 오라를 막아 냈다.
하지만 막아 낸 것은 찰나였을 뿐, 들고 있던 창과 함께 반으로 베였다.
놀라운 건 그 후였다.
업적 보상과 한 히든 퀘스트가 함께 찾아왔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뒤이어 들려온 글로리의 목소리로 인해 찬영은 상념을 깨고 손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 별거 아닙니다. 다친 덴 없으십니까?”
“여기저기 피가 흐르는 것 빼고는 괜찮다오. 하지만 늘 느끼는 거지만…….”
글로리가 쓰게 웃었다.
“지독한 자들이었소.”
“그래도 잘 싸워 주셨습니다.”
찬영은 글로리와 지수의 활약을 모두 보았다.
둘이 드레드의 발을 묶어 준 덕분에 해적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드레드는 차원의 돌의 능력을 통해 주로 일정 반경에 디스펠을 사용하는 자였는데…….
하필 마나가 아닌 신성력을 사용하는 적을 만났던 것이다.
“아니, 그보단 난전을 틈타 미리 수송선에 가 있자는 제안이 아니었다면……. 아마 도주하려는 그들을 놓쳤을 거요.”
“그녀 덕분이죠.”
찬영을 기절해 있는 지수를 내려다봤다.
만약을 준비하자는 지수의 생각은 옳았다. 배가 항구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여러모로 훨씬 복잡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이제 로레인 씨가 수송선에 있는 포로들부터 노역한 백성들까지 전부 풀어 줄 겁니다. 그 일이 끝나면 우린 함께 움직일 겁니다.”
“섬으로 말이요?”
“네.”
글로리의 반문에 찬영이 대답했다.
* * *
“으……으!”
그렉은 눈치만 봤다.
고개를 좌로 돌려도, 우로 돌려도 빠져나갈 곳은 없다.
“사, 살려 줘. 난 아무 죄가 없어!”
그를 빙 둘러싼 로레인 일행 중 제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손가락부터 자르고 시작해야 하나?”
제리가 험상궂은 기세로 입을 열었다.
그때 로레인이 제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됐어, 그쯤 해 둬.”
한 쪽 무릎을 꿇어 그렉과 눈을 마주친 로레인이 나직이 물었다.
“신분 확인부터 하자. 당신이 플레인 상단의 단장이 맞아?”
“맞습니다! 그자가 그렉이에요! 당장 죽입시다!”
풀어 준 백성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에서 그를 죽이란 소리가 가득해졌다.
그렉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 주시오! 사례는 원하는 대로 하겠소! 당신들은 해적들을 죽이러 왔지, 나 같은 선량한 백성을 죽이러 온 게 아니지 않소!”
그렉이 두꺼운 턱살을 덜덜 덜었다.
“선량한 것치고는 원성이 대단하네.”
로레인이 백성들의 함성을 들으며 대답했다.
“당신들도 해적과 똑같아질 거요? 힘으로 날 제압해 죽인다면 해적과 뭐가 다르단 말이오! 난 그저…… 그저 겁을 먹어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
“허술한 변명은 그쯤 듣고.”
로레인이 눈을 치켜뜨며 말을 잘랐다.
“섬의 위치나 말해 줘야겠어.”
“그건 안 될 것 같소. 얘기하면 날 곧장 죽일 것 아니요?”
그렉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몇 차례 그들의 근거지를 오고 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섬의 위치 정도야 눈에 꿰고 있다.
로레인이 곤란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를 눈치챈 그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용하면 된다.’
다른 지역에 사 놓은 땅이나 재산이 조금 있다.
시간이 지나면 죄야 조금씩 씻길 테니 평화로운 땅으로 가서 잠자코 숨어 지내면 된다.
‘그럼 날 잊겠지.’
어차피, 시(市)만 벗어나면 이 죄를 들먹이며 자신을 쫓아올 자도 없을 것이다.
그렉은 자신이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다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오, 어차피 그대들은 해적들만 처리하면 그만 아니요? 한시가 급한데 이런 일로 시간을 끌어 봐야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것 아니겠소? 크흠!”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렉은 아까보다 한결 당당해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스릉!
검을 뽑은 로레인이 그 검 끝을 그렉의 목에 들이대며 말했다.
“칼자루를 네가 쥐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가 봐도 내가 쥐었는데?”
“아니, 지, 진정하시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필요하지 않소?”
그렉은 로레인을 떠보며 슬쩍 웃음 지었다.
“너같이 해적들의 앞잡이 짓을 하는 놈들에게서 안두아 섬이 이곳에서 가깝다고 들었어. 주변만 살펴봐도 안두아 섬은 금방 찾을 수 있어.”
“하지만 이 주변엔 작은 섬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오. 일일이 찾는 사이에 그들은 소식을 듣고 전부 도망칠 거요. 내 장담하지!”
의기양양해진 그렉은 확신했다.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 해적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지.”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또렷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물에 젖은 글로리와 지수를 안고 걸어오는 찬영이었다.
예민한 청각으로 이미 저만치서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찬영은 로레인의 곁을 지나 그렉을 응시했다.
“소, 소드 마스터.”
그렉은 찬영과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쳤다.
그의 무력을 직접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 해적처럼 널 지켜 줄 필요도 없지.”
차갑게 식은 찬영의 시선이 로레인에게 향했다.
“로레인 씨.”
“응.”
“그만 돌아가죠.”
“이대로?”
“네.”
로레인은 대답 대신 힐끗 그렉을 쳐다봤다.
찬영이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그렉은 섬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다른 생각이 있겠지.’
찬영이 이렇게 나온 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간 쌓인 신뢰에서 비롯된 믿음이었다.
“그러자. 그만 여길 벗어나자.”
로레인 일행이 백성을 막아서고 있던 위치에서 벗어났다.
“놈을 때려죽이자!”
가로 막고 있던 용병단이 비켜서자 백성들이 그렉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렉이 달려오는 백성들을 보며 찬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소드 마스터님! 날 죽이면 후회할거요! 섬의 위치를 모를 거란 말이야!”
찬영이 조용히 그렉을 보며 대답했다.
“이미 알아.”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렉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것이다.
퍽!
그 순간 하얗게 질린 그렉의 얼굴로 밀려든 백성들의 발이 날아왔다.
* * *
돌아선 찬영에게 로레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지수 씨와 글로리 씨는 도주하려는 해적들을 일부 보내 줬어요. 티 안 나게.”
“뭐?”
로레인이 깜짝 놀랐다.
“그럼?”
“보테 씨가 추적 마법에 일가견이 있으시더군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로레인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보테가 없다.
‘어디로 간 거지?’
그러자 보테의 위치를 말해 준 건 찬영이었다.
“3서클 선샤인 테일이란 마법이 구현되면 마법에 걸린 물건이 지나간 자리에 푸른 빛 무리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고 하더군요. 보테 씨는 지나간 물길 곳곳에 그 마법을 구현해 놓을 테고요.”
“숨어들어서 마법을 구현하고 있단 말이야?”
“네.”
“어떻게?”
“제가 쓸 만한 물건을 드렸습니다.”
찬영은 그에게 건네 준 유령 소스를 떠올렸다.
삼십 분간 한시적으로 투명화가 가능한 이 소스는 총 다섯 번 사용이 가능하다.
총 백오십 분.
그가 들키지 않고 머물러 있기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물론, 시간이 부족하다면 위험해지기 전에 배에서 탈출하라고도 일러 줬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로레인은 조금 화가 난 눈빛이었다.
찬영은 예상했던 당연한 반응에 사과부터 했다.
“미안합니다. 보테 씨가 그리 하라고 부탁하셔서요.”
“왜?”
“로레인 씨가 아시게 되면 위험한 일이니 직접 나서실 거라고, 항구엔 자신보다 대장인 로레인 씨가 남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찬영은 로레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도 그분의 결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건 보테 씨가 아니라 로레인 씨입니다. 로레인 씨는 수장으로서 해야 할 몫이 있으니까요.”
로레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으로 밉네. 한 대만 쥐어박아도 될까?”
“비밀로 해달라는 보테 씨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각오했습니다.”
로레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찬영을 노려봤다.
솔직히 전부 다 이해된다.
찬영의 뜻도 보테의 뜻도 모두 다.
‘이런 거구나.’
그녀는 문득 옛날 아버지가 해 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까지 언제든 벨 각오가 되어 있어야 로그를 할 수 있다는 말.
그건 실제로 아군을 벤다는 얘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때론 아끼는 사람의 결정이 위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하고 기다려 주는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그걸 차분히 견디는 게 로그라고.
“얘기했다면 내가 갔을 거야.”
“보테 씨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오늘부로 비호감 됐어.”
“압니다.”
“그래도…….”
로레인이 찬영에게 돌아서며 대답했다.
“미워하진 못하겠다.”
“그것도 압니다.”
찬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도착했군.’
투명 상태로 유지된 채 뱃전에 선 보테는 도개교를 내리고 움직이는 해적들을 쳐다봤다.
해적들은 투명화 덕분에 아직 자신이 함께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다.
보테는 여유롭게 배에서 내렸다.
‘섭취한 지 얼마 안 됐으니 투명화가 해제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겠군.’
마법을 구현하고 화물칸에 숨어 있다 투명화가 풀리면 또 다시 섭취 후 갑판 위로 올라 마법을 구현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네 번째 소스를 마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보테는 배 앞에 도열하고 있는 수십 대의 짐마차를 쳐다봤다.
해적들은 짐마차에 하나둘, 포로와 보급 물자들을 실었다.
저만치 소년과 엄마를 떼 놓는 해적들이 보였다.
“놔! 엄마! 엄마아아!”
“제발, 제발 함께만 있게 해 주세요. 제발!”
소년은 울었고 엄마는 오열했다.
해적은 오열하는 소년을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렸다.
투투툭…….
“악! 아, 안돼!”
오열하는 그녀와 함께 해적이 다른 포로들을 향해 외쳤다.
“행여나 이년처럼 반항할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의 요구 따윈 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구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마라! 더 이상의 요행은 없다!”
일종의 본보기였다.
‘맙소사. 저, 쳐 죽일 놈들!’
보테는 주름진 눈가를 찌푸렸다.
당장 마법을 사용해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타나면 저들은 낌새를 눈치챌 게야.’
그렇기에 당장 나설 순 없다.
보기 힘들어도 참을 수밖에.
보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종족이 해적들에게 끌려 나왔다.
쿠당탕!
모래사장을 나뒹군 건 엘프족이었다.
넝마나 다름없는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엘프족은 잔뜩 초췌해져 있었다.
“이년은 바오트 님께 넘길 년들이다. 잘 다뤄! 상황은 우랄 님께 직접 보고하겠다.”
“예!”
수송선에 타고 있던 해적의 지시에 마차를 가져온 해적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어나! 귀찮은 것들 같으니라고.”
쓰러져 있던 엘프는 일어날 힘도 없는지 몽롱한 눈빛이었고, 해적들은 그런 엘프를 마치 짐짝처럼 다뤘다.
다시 한 해적에 의해 업혀가는 엘프를 보며 보테는 치가 떨렸다.
‘같은 인간이라는 게 치욕스러울 지경이군.’
엘프족은 소수 민족으로 숲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신성 왕국조차 그들의 거주 권리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고 있었건만…….
노예제가 없는 신성 왕국에서 다른 종족을 저렇게 다루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간다.’
보테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뭐든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이 오기 전에 숲속에 자리 잡은 놈들의 거처부터 파악해야겠군.’
보테가 은밀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