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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47화 (147/248)

# 147

147화

* * *

빅토르 지방에서 로일항 다음으로 큰 항구를 보유한 센터스시는 해적들에 의해 무법 지대가 된 지 오래였다.

로일항의 군함과 싸워야 하는 해적들이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해적에게 점령당한 센터스시의 백성들은 주둔한 해적들의 포악함과 앞잡이들이 벌이는 범죄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왕국의 화폐는 무가치해졌다. 백성들의 모든 재산은 힘이 있는 자가 가져가는 게 당연해졌다.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입니다.”

처음 보는 나무 술통 창고에 끌려간 페리어는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마주 보았다.

“저, 절 죽일 겁니까?”

페리어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붉은 머리 여자가 고갤 끄덕였다.

“어. 근데 내가 죽이기만 하겠어? 팔, 다리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 버릴 거야.”

페리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같이 잡혔던 조는 진작 그녀에게 목이 날아갔다고 한다.

“사, 살려 주십쇼. 제발.”

그가 덜덜 떨었다.

“죽는 게 두렵긴 한가 보지? 그러면 너희들이 패고, 죽여서 길바닥에 버린 사람들은? 쓰레기 같은 자식들.”

독설을 뱉은 로레인이 뒤에 선 찬영을 쳐다봤다.

“어쩔 거야? 더 캐낼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아뇨, 있을 겁니다. 그래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찬영의 대답에 페리어가 눈을 번쩍 떴다.

살아야 한다.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차피 노리시는 건 해적들 아닙니까?”

“그래서?”

“풀어만 주신다면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립죠!”

“해 봐.”

“예!”

페리어는 아는 걸 술술 흘렸다.

천성이 앞잡이라서 그런지 입이 무겁진 않은 모양이다.

찬영이 넌지시 물었다.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게 블린이라는 곳이라고?”

“예, 해적들이 원하는 잡일을 처리해 주고 상응하는 걸 받습니다. 여자든, 음식이든 전부 다요. 해적들이 법이니까요.”

가만히 있던 로레인이 인상을 썼다.

“그냥 죽이자.”

“제리, 로레인 씨 좀 말려 줘요.”

“여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꼭 내가 말려야 돼?”

제리가 울상을 지었다.

“부탁합니다.”

찬영의 대답에 제리가 슬금슬금 로레인에게 다가갔다.

“대장, 흥분 가라앉히고 우리 잠깐 나갈까요?”

“내 몸에 손대면 네 목부터 날아갈 줄 알어.”

“하아.”

한숨을 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리를 보며 찬영이 페리어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도 저분 못 말려. 혹시라도 숨기는 게 더 있다면 지금 말해. 말 안 하면……. 정신 계열 마법이라도 쓸 참이니까. 그걸 쓰면 네 머릿속을 전부 까발릴 수 있겠지. 물론 물리적으로도.”

찬영이 손에 불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마법이 아니라 염왕초혼심법이었지만…….

오해는 각자 하기 나름이다.

“마, 마법사!”

페리어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하얗게 질렸다.

“마, 말하겠습니다!”

진짜 겁을 먹은 페리어는 더 감출 게 없었다.

당장 머리가 헤집어지며 죽을 판인데…….

발설했다는 이유로 해적들에게 죽을 걸 걱정하는 게 불가능했다.

“전부 터, 털어놓, 놓겠습니다! 정말이요!”

“그래, 믿지.”

“그들은 매달 7일 새벽에 수송선을 보내서 약탈해 온 것들을 실어 본대에 보냅니다. 다, 당장 내일이 그날입니다! 내일요!”

페리어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해적들과 손잡기로 마음먹은 플레인 상단과 저희가 그 일을 돕고 있습니다. 지방 행정관과 경비대장 몰래, 내부에서 해적들을 도운 것도 플레인 상단이었지요.”

눈치를 보며 그 얘기를 끝낸 페리어에게 찬영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 그럼 포로로 붙잡혔던 경비대나 행정관은 어디에 가둬 뒀지?”

“대부분 블롱 협곡에 있는 광산에 보내지거나 아니면…….”

“아니면?”

“사형시켰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빨리 말 안 해?”

무엇 때문인지 말끝을 흐리며 말을 잇지 못한 페리어에게 참다못한 제리가 윽박질렀다.

“전부 안두아섬에 끌려갑니다! 그곳에 주변 모든 섬의 해적들이 몰려온다고 드, 들었습니다.”

페리어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위치는?”

“플레인 상단의 단장이 알고 있을 겁니다. 아는 건 이게 다입니다. 정말로요!”

찬영도 더 묻진 않았다.

어차피 그는 해적과 상단, 그들 사이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블린에 소속된 양아치일 뿐이다.

더 아는 게 없을 건 당연하다.

“약속대로 풀어 주지. 단, 우릴 봤다는 걸 발설하면 네게도 좋지 않을 거야.”

“....”

“발설했다는 걸 알면 넌 배신자로 낙인 찍혀 그대로 죽어 가겠지.”

“아, 알겠습니다.”

찬영은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내일 작전을 개시합니다. 수송선을 탈취해서 이동할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이 밀실을 벗어났다.

“일부러 미친년인 척해 달라고 한 게 먹힌 걸 보면 제법 심문에도 능한 것 같은데?”

로레인이 찬영을 뒤쫓아 오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그쯤 되면 실력이야. 아무튼 저 녀석은 어떻게 할까?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깔끔하기도 하고……. 백번 죽어도 모자랄 놈이니까.”

로레인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가 죽은 줄 아는 조란 동료를 우리가 살려 보낸 이유가 사라지죠.”

페리어의 패착이었다.

겁을 너무 집어먹은 나머지, 조가 죽는 걸 확인도 못한 채 그가 죽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찬영은 그 점을 제대로 이용했다.

“어리석긴…….”

중얼거린 로레인이 씩 웃었다.

“조는 누군가 페리어와 자길 납치하려 했다고 상부에 얘기했을 겁니다.”

“그랬겠지.”

“그럼 페리어는 발설하게 될 겁니다. 우리에 대해서.”

“해적이 그냥 죽이려고 하진 않을까? 녀석이 뭔가 말하기 전에 말이야.”

“생각이 있다면 페리어가 뭘 했는지를 먼저 물어볼 겁니다. 그렇게 되면 흔적 없이 숨어 다니는 우릴 쫓는 것보단 매복해 있는 편이 낫다는 걸 알게 되겠죠.”

“하긴, 대놓고 수송선을 노릴 거라 했으니 녀석은 살아남으려고 그 사실을 얘기하겠지.”

“예.”

“훌륭해.”

로레인은 정말, 감탄했다.

찬영의 능력은 전투뿐만이 아니다.

상황을 넓게 보는 능력, 그게 가능한 담력, 빠른 결단력 등……. 보고 있으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는 늘 계획이 있었다.

장담컨대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해적의 지상 보급로를 끓을 순 없었을 거다.

동시에 아버지의 로그 길드였던 ‘탈파’의 재건도 불가능했을 거다.

로레인은 찬영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뭐,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마을을 열두 곳이나 해방시킨 게 대단하다고 느껴져서.”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죠.”

“거의 혼자 했어. 해방시킨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블롱 협곡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 마을을 이렇게 단시간에 해방시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면서 중간, 중간 마을 자치대와 해적들에게 붙잡혀 있는 신관과 용병 들까지 해방시켰다.

“……이대로라면 블롱 협곡에 주둔한 녀석들이 초조해지겠지.”

“애당초 그게 목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불안 요소는 많아요. 좀 더 그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찬영은 이를 위해 로그 길드가 어서 재건되어야 한다고 봤다.

“흩어지신 그분들이 보름 안에 이곳에 다시 집결하신다고 했죠?”

“아, 어르신들?”

“네.”

“그랬지.”

어르신들이란 한때 마셰로프를 따르던 길드의 원로 길드원을 말하는 거였다.

열두 곳의 마을을 돌며 다시 찾은 그들은 화가, 대장장이, 은퇴한 신관, 상인, 의사 등 별의별 직업으로 위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별 이견 없이 로레인을 새 길드장으로 인정했다.

한때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길드장을 뜻하는 검을 그녀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남은 점조직을 확인해 보고 각자 조금씩 숨겨 둔 길드의 재산들을 일부 회수하겠다며 가셨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로레인 말대로 그들은 조우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다려 왔던 때라고 말하며 그녀 곁을 떠났다.

한 세대를 풍미한 로그 길드 ‘탈파’의 재건이 눈앞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근데 그건 왜?”

로레인이 물었다.

“하루 속히 로레인 씨의 길드가 재건되어야 다방면에서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될 거야. 걱정 마. 그나저나 여기에서의 일이 끝나면 블롱 협곡으로 떠나겠지?”

“네.”

찬영의 대답에 로레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찬영이 떠날 거란 건 이미 알던 사실이다.

그저 함께해 온 대장정의 끝이 보이고, 그가 떠날 때가 되어 떠나는 건데…….

‘왜 아쉽지?’

그녀도 이런 감정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가야 하냐고는 묻지 않았다.

분명, 그는 가야 할 것이다.

그가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충분히 듣고도 남았다.

진심이라는 욕심으로 어설프게 말리며 그를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섬은 어쩔 생각이야?”

“도시의 해적들을 섬멸하고 난 뒤에 수송선을 이용해 볼 생각입니다.”

“수송선?”

“네, 어차피 지상에만 접근할 수 있으면 우릴 막을 만한 상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있다고 해도…….”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

로레인이 찬영의 마음을 읽고 대신 말했다.

“예, 섬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까지 소탕하지 않는 한 그들이 다시 도시를 점거하려 들 테니까요.”

“내일이 그 기점이 되겠구나.”

“이럴 때 단번에 몰아쳐야 합니다. 추가적인 대비를 할 여지도 못 가지게.”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상주하고 있는 병력이 제법 되잖아.”

“이제껏 알아본 바에 따르면 삼백 명 정도가 나타나겠죠.”

“그래, 적은 숫자는 아니야. 거기다 놈들은 우리가 오는 걸 알잖아. 만반의 준비를 갖출 거란 얘기지.”

“네, 그 반대일 수도 있죠.”

“반대?”

곰곰이 생각하던 로레인이 금방 무슨 얘긴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대규모 병력이 도시에 숨어들었다면 금방 들켰을 테니, 당연히 소규모 저항군이라고 생각하겠지. 여기에 우리의 이동 경로까지 선점해 덫까지 쳐 놨다면?”

“네, 방심할 겁니다.”

찬영은 확신했다.

여기 해적들을 비롯한 적들은 아직 다른 마을들이 해방되었다는 걸 아직도 모른다.

잠입, 기습, 매복 등을 번갈아 실행하면서 빠르게 마을들을 장악하며 통과했기 때문이다.

죽은 해적들은 이 먼 도시까지 상황을 알릴 여력이 없었다.

즉, 이곳 해적들은 판이 뒤집히고 있단 걸 모른다. 그저 그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뿐.

“비수는 방심할 때 꽂아야 제 맛이지.”

입을 뗀 로레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츠츠츠.

옅은 안개가 낀 새벽녘, 예정대로 항구에 다섯 척의 중형 수송선이 나타났다.

물길을 가르며 나아간 수송선은 속도를 차츰 줄이며 항구 앞에 흔들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서 도개교가 내려왔다.

“짐을 실어라!”

해적과 해적 앞잡이 들은 주위를 경계했다.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은 채찍을 두려워하며 수송선에 짐을 옮기려 이동했다.

플레인 상단의 주인인 그렉이 뒷짐을 진 채 애꾸눈의 마른 남자를 쳐다봤다.

“정보가 진짜요?”

배불뚝이 그렉이 눈을 굴리며 이마에 땀을 닦았다.

“왜, 겁나나?”

비에리가 한쪽 눈을 굴려 그렉을 향해 웃었다.

그는 군다 바오트를 따르는 7인의 친위대 중 한 명으로서 이제껏,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그에게 목이 잘린 기사만 해도 수송선에 한 가득 쌓을 정도였다.

그는 이제 상대가 없어 심심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바오트 님의 곁에 서서 강한 상대를 찾고 싶었다.

피 냄새를 안 맡은 지 너무 오래됐다.

여긴…… 그에게 너무 평화로웠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괜히 일 처리가 무산되면 서로 손해 아니오?”

“그래? 의외로군, 겁을 안 먹었다니. 그럼 이건 어때?”

비에리가 창날을 그의 목에 슬쩍 가져다 댔다.

그러자 펄쩍 뛰며 엉덩방아를 찧는 그렉.

“왜, 왜 그러시오? 정말 놀랐잖……소.”

식은땀을 흘리는 그렉은 반항도 못하고 쩔쩔맸다.

“한심하긴…….”

비에리는 비웃으며 그렉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쓰임새는 이제 다 끝났다.

사실상 도시를 장악할 때 끝났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도시 내의 귀찮은 일을 알아서 도맡고 있으니 아직은 데리고 있을 만 했다.

하지만 로일시까지 장악하고 나면…… 굳이 이 항구를 쓸 이유가 사라진다.

놈을 비롯해 전부 불태우고 떠날 것이다.

‘그때까지만 살아 있을 유예 기간을 주마.’

속마음을 감춘 비에리는 다시 굳은 표정으로 항구 반대편에 세워진 석조 건물들을 쳐다봤다.

‘나타날 때가 됐거늘.’

비에리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푸른색 둥근 지붕 위에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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