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 * *
한때 블롱 협곡은 수많은 상인, 여행객 등 로일시를 방문하려는 인파들로 들끓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 블롱 협곡을 지나는 상인들은 곧잘 도적 떼의 습격을 받고는 했는데, 협곡을 수비하는 블롱 경비대는 인근의 도적 떼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소수 정예의 부대였다.
그러나 이제 그건…….
“옛말이지. 안 그래?”
채찍을 늘어트린 해적이 물었다.
해적은 한때 열 명의 인원을 책임졌던 제2 경비대장 마르코를 놀리는 중이었다.
“대답 안 해? 어리석긴……. 그래 봤자 좋은 꼴 못 보는 건 너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군.”
침묵하는 마르코에게서 돌아선 해적이 잡혀 와 있는 다른 포로를 두들겨 팼다.
퍽! 퍽!
병사는 신음 소리를 낼 여력도 없는 듯했다.
아예 힘없이 넘어진 채 반항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죽을 게 뻔했다.
“그만…… 그만 하시오.”
헝클어진 곱슬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마르코는 결국 곡괭이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진작 그렇게 순하게 나오면 좋잖아? 서로 힘 뺄 필요도 없고.”
“알겠소.”
해적은 씩 웃었다.
마르코를 직접 패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맞는 걸로 굴복할 놈이 아니다.
맞는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다치는 걸 못 견디는 녀석이었다.
특히, 오늘 처음 들어온 신입을 패고 있었으니……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꿇어. 잘못했다고 빌고.”
마르코는 해적이 하라는 대로 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옛 동료 몇몇이 입술을 잘게 떨었다.
“잘못했소. 봐주시오. 나도……. 그리고 저 친구도.”
마르코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해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무릎 꿇은 마르코의 어깨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렸다.
“쥐새끼가 됐으면 쥐새끼답게 놀아야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
“경비대는 전멸했고 머지않아 로일시도 우리 손에 떨어질 거야. 너희들 덕분에.”
해적의 말대로 이미 로일 성으로 통하는 수로는 전부 막혔다. 거부하려고도 했으나, 일하지 않으면 애먼 사람을 죽인다고 협박하니 별수 없었다. 그렇게 마르코와 제2 경비대원들은 수로를 폐쇄하는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그 일이 끝나자, 경비대원들은 블롱 협곡에 투입되었다. 협곡에 있는 거무튀튀한 암석을 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암석으로 무얼 만들려고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마르코는 협곡에 이런 암석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어이, 살살해. 교대 시간이야. 밥부터 먹이고 하자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
갑자기 나타난 다른 해적의 부름에 마르코를 괴롭히던 해적이 아쉽다는 양 혀를 찼다.
“쯧, 운 좋은 줄 알아.”
그는 마르코의 등에서 발을 뗀 후 휘적휘적 사라졌다.
마르코는 사라지는 해적과 함께 조용히 일어나 아까 맞고 있던 포로에게 다가갔다.
“이봐, 친구. 괜찮나?”
쓰러져 있던 포로가 대답 대신 일어났다.
그런데……. 그 눈빛엔 활기가 넘쳤다.
“괜찮소,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원망하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
“다행이오.”
마르코의 대답과 함께 포로가 물었다.
“그나저나 사람 하나를 찾고 있는데 알려 줄 수 있소?”
“누굴 찾지?”
“라리가라는 분이오.”
마르코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분은 돌아가셨네.”
“아.”
대답을 들은 병사가 탄식했다.
“원하던 대답을 못 줘서 미안하군.”
마르코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돌아섰다.
그러자 병사가 그를 쫓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그분을 아는 눈친데.”
“그분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지.”
“블롱 경비대의 일원이었소?”
“미안하네만 더 얘기하고 싶지 않네.”
“그래도 해 줘야 하오.”
“뭐?”
걸음을 우뚝 멈춘 마르코가 병사를 빤히 쳐다봤다.
병사의 눈빛은 형형했다.
잡혀 온 지 얼마 안 된 듯, 영양 상태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눈동자에 힘이 실려 있다는 거다.
뭔가를 믿고 있는 사람처럼…….
“그게 무슨 말이요?”
“알게 될 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르코의 어깨 너머로 칼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스릉! 스릉! 스릉!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르코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교대를 위해 돌아선 해적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걸 베어 버린 건 해적을 부른 또 다른 해적이었다.
투투툭!
머리가 굴러와 마르코의 발치에 멈춰 섰다.
마르코는 눈을 부릅떴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마르코가 구해 줬던 병사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벡이요. 나는…….”
벡은 마르코의 옆에 나란히 서면서 말했다.
“오슬로 구릉의 레인저요.”
멍하니 서 있는 마르코에게 씩 웃은 벡이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았소. 우린 로일시를 돕기 위해 달려온 왕국군이며 베이콥가의 일원이오.”
마르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래에 있는 이 친구는 운이 나빴군.”
벡이 마르코 앞에 떨어진 해적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동시에 광산 주위를 뒤덮은 숲 사이로 수십 명의 검은색 경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마르코가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다.
* * *
“블롱 협곡의 제2 경비대 십인장 마르코, 베이콥 영주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정리된 후 마르코가 베이콥 영주 앞에 엎드렸다.
눈물을 꾹 참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시게. 마르코, 이 순간 예의가 중요하겠는가?”
그를 일으켜 준 베이콥 영주가 산발인 그의 머리칼을 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군. 일찍 달려오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하온데, 어찌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직한 인상의 마르코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기사와 병사들이 가득했다. 활력이 넘쳤으며 강한 기운이 절로 느껴졌다.
“그래, 궁금하겠군.”
“예.”
“우린 로일시의 상황을 알게 됐고, 전 병력을 몰았네. 하나, 적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모르기에 병력을 분산시켜 기습하는 것을 택했지.”
“아…….”
“그러는 동안 잡혀 온 그대들이 노예처럼 다뤄지고 있단 걸 알았다네. 그래서 벡이 잠입하여 내부에서 적들을 기습한 것이지. 자, 얼추 설명이 되었나?
“예.”
“나머지 설명은 천천히 하도록 하세. 소규모 광산은 이곳 말고 몇 곳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위치를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협곡은 제 고향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마나를 잃었으나…….”
마르코는 온갖 고문으로 코어를 잃게 됐다.
그러나 근력은 다시 회복되기 마련이다.
마르코는 다시 싸움에 나서고 싶었다.
“미력하나마 힘이 될 것입니다.”
“결코, 미력하지 않네. 이보게, 제이나 경.”
영주가 대답과 함께 제이나를 쳐다봤다.
“예, 영주님.”
“그에게서 남은 광산의 위치를 전달받도록 하게. 찰스에게는 A.U.를 그리 이동시키라 이르게.”
영주가 잠자코 있는 그녀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광산의 생존자들을 호른 마을로 보내고 싸울 의사가 있는 자들은 새 대대로 재정비시키게.”
“예. 영주님.”
하명 받은 제이나가 다시 돌아서려 할 때.
“아, 한 가지 더.”
영주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광산 장악이 모두 이뤄질 때쯤이면 해적들 또한 이상한 낌새를 차렸을 것일세. 마법 통신구를 통해 전군…….”
영주가 말을 이었다.
“전면전을 준비하라 이르게.”
제이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시작이야.’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 * *
블롱 협곡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 지대가 나왔다. 그 곳에는 수백 채의 막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협곡을 통하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수문장과 같았다.
간이 망루만 수식 개가 막사를 둘러싼 채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비행형 몬스터 백여 마리가 하늘을 날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천막엔 군다 바오트가 있었다.
피부색이 회색에 가까운 군다 바오트는 털 하나 없이 매끈한 알몸으로 앉아 있었는데, 기세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압도적이었다.
“흐음.”
그는 거친 가래를 뱉었다.
가래가 튄 곳에는 갈기갈기 찢긴 엘프와 인간의 시체 조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바오트의 눈동자엔 어떤 죄책감도, 걱정도 없다.
입가 주변에 번들거리는 피엔 그저 굶주림만이 가득했다.
할짝.
혀를 날름거린 그는 아직도 허기가 졌다.
하루에 섭취하는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식욕을 억제할 수가 없다.
더 많은 양의 피와 영혼을 원한다.
피를 흡수하는 건 그에겐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자, 상대의 영혼을 빨아들여 힘을 키우는 것.
생명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것들은 전부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일 뿐이다.
식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때 밖에서 공포에 절은 목소리가 들렸다.
“바오트 님. 마, 말론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론이 들어왔다.
로브를 쓰고 있던 말론이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냈다.
말론이 걸어갈 곳에 자리 잡은 시체 한 구를 지팡이 끝으로 밀어내면서 말했다.
“바오트, 어째서 내가 얘기한 대로 하지 않았소?”
“그럴 병력이 없다.”
바오트가 척추에 박혀 있는 차원의 돌을 슬쩍 보이며 삐딱하게 앉았다.
“물경 2천이 넘는 해적 외에 1천이 넘는 해적은 아홉 곳의 광산에 포진되어 있는데도 그따위 소릴 하는 것이요?”
바오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방금 그럴 병력이 없다고 했을 텐데?”
“실험 탑이 점령당했소. 그곳에서의 실험을 선지자들께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지 않소? 게다가 갓피스가 등장했단 말이오! 선지자들께서도 이를 상세히 알아보라고 하셨소!”
“그건 너의 일이지, 말론.”
앉아 있던 바오트가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마치 집채만 한 회색 돌덩이가 일어난 것 같았다.
머리끝이 천막 천장에 닿은 회색의 매끈한 몸은 더는 인간의 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쐐액!
바오트의 커다란 손이 말론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말론이 순간 검은 연기가 되었다.
휘이익!
바람처럼 날아가 바오트과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인간의 형체를 갖춘 말론의 동공이 빛났다.
“미쳤군……. 나를 죽인다면 선지자들께서도 그대를 용서치 않을 거요. 죽일 수도 없을 테지만.”
“바람만 불어도 계집처럼 놀라는군. 걱정 마라, 나 역시 전사가 아닌 미개한 것과는 싸우지 않는다.”
바오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곁엔 검은빛을 띤 소드 메이스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망치와 투핸디드 소드를 결합해 놓은 모습이었다.
기다란 칼날 끝엔 거대한 망치가 달려 있었으며, 손잡이는 칼날만큼 길었다.
바오트가 기다란 손잡이를 쥐면서 말했다.
“두말하지 않겠다. 난 소집된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성을 점령한 뒤에 곧장 왕국의 해안을 접수할 것이다. 잔챙이 따위에…….”
붉게 물든 눈동자가 말론을 다시 향했다.
“공들일 시간은 없다.”
“후회할 거요. 갓피스들은 결코 약한 존재들이 아니오.”
“그럼 더 좋군.”
“뭐요?”
“강한 자를 삼킬수록 난 거대해진다.”
“그런 자가 아직도 로일 성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오? 한심하기 짝이 없구려.”
“그분들께 못 들었나?”
“뭘 말이오?”
“난 성을 점령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
“때……?”
말론조차 따로 듣지 못한 소식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바오트가 의아해하는 말론을 비웃었다.
“광산이 괜히 있는 것 같나?”
“흥, 무기 제작을 위해 캐는 것이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소.”
“겨우 칼이나 방패를 만들기 위해서일까? 내가 그따위 것을 기다리기 위해 로일 성을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느냐?”
말론은 표정이 굳었다.
저 광석은 충격 분산이 놀라운 수준의 광석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여러 무기에 제작되는 거라고 들었건만…….
‘또 다른 게 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말론에게 바오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군. 겁쟁이 마법사야. 네놈이 보는 진실은 그저 한 단면에 불과하다. 그러니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
바오트의 눈동자에 살의가 섞였다.
“머지않아 파멸이 로일 성을 덮칠 것이다. 나는 산처럼 쌓인 시체 위에 앉아, 로일 성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비명 소리를 감상하며, 마지막 희망이라는 영주와 백성을 만찬으로 즐길 것이다!”
바오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암흑 마력의 기세에 천막이 폭풍이라도 맞는 양 통째로 흔들렸다.
“로일시의 모든 것이 내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그 잘난 영주 놈의 피를 어서 맛보고 싶군.”
지켜보던 말론의 로브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