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화
세상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정말 미쳐 버렸구나.’
마셰로프의 말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생각이 가능할 리 없다.
찬영은 방금 읽은 문구를 떠올려 봤다.
-뉴 빌드의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있는 ‘6인의 선지자’란 존재들은 ‘그릇’이란 것에 집착한다고 한다.
정황상 그 그릇은 엘프, 인간, 드워프 할 것 없이 다양한 종족들의 몸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신체를 획득하기 위해 몬스터를 활용한다.
전 종족을 상대로 한 사냥을 시작한 거지…….
전쟁을 말이야.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몬스터를 조종한다든가 하는 대륙에 존재한 적 없는 이런 괴상한 수법들은 어디서 익혀 온 걸까? 그들이 신봉하는 올드 원이 가르쳐 준 걸까?
……결국 수많은 살아 있는 신체를 얻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얘기다.
“미친.”
절로 욕이 나온다. 하지만 들끓는 화를 가라앉혔다. 지금은 분노보다 마셰로프가 남긴 기록에 집중할 때다.
‘살아 있는 종족들을 모두 ‘그릇’이라고 했단 말이지……?’
찬영은 왠지 기록에서 언급하는 ‘그릇’이란 게 뭘 뜻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직접 부딪쳐 본 그 사람 같지 않던 괴물을 뜻하는 건가?’
곧바로 루크가 떠올랐다.
젤럿의 생김새를 이식한 듯한 형태와 스피드까지…….
‘몬스터의 일부를 이식한 것과 다름없었지.’
그 생각을 하며 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가 언급한 그릇은 몬스터를 이식할 만한 매개체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여러 상황을 되짚어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그런 생각이 든 건 루크가 했던 말들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 피조물이 나다.
‘그래, 그랬지.’
루크는 뭔가 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올드 원을 입에 담지도 못할 고귀한 분이라고 칭하면서 말론이 대업을 이룰 거라고 얘기했지.’
찬영은 그가 말했던 대업과 피조물은 마셰로프의 기록이 말하는 ‘그릇’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첨탑에서 연구를 한 것들이 이미 이전부터 시행되어 오던 거라면? 그리고 멸망 직전까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준비한 그 계획이 루크를 통해 성공한 거라면?
‘그럼 많은 게 맞아떨어져.’
뉴 빌드는 오래 전부터 몬스터와 다양한 종족 간의 이식 연구를 하고 있던 거다.
‘더 자세히 알려면 말론부터 쫓아야 해.’
연구 과정을 전부 알고 있던 말론이라면 이 연구를 시작한 이유를 좀 더 자세히, 그리고 깊이 알 것이다.
반드시 그를 통해 알아내야만 한다.
그럼 알 수 있게 될 거다.
몬스터 이식을 왜 시작한 건지, 그것을 통해 뉴 빌드가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
깊게 가라앉은 찬영의 눈동자가 다른 문서로 향했다.
이 순간에도 뉴 빌드는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찬영에게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 * *
찬영이 뉴 빌드에 관한 기록을 열람하는 동안 로레인은 용병단을 소집했다.
그 후 그간 숨겨 놓은 모든 진실과 새로 알게 된 정보를 털어놨다.
무거워진 공기 속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제리였다.
“199명이요? 갓피스가 199명이나 더 있다고요?”
“그렇대. 더 늘어날 수도 있고…….”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보테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용병단이 로그 길드가 될 거라 이건가? 우린 190명이 넘는 예비 갓피스들을 찾는 일도 하면서 로그 길드로 업무도 바꿔야 한다고?”
보테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로레인에게 물었다.
로레인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아버지의 유산에 관해 숨겨 왔던 진실까지 털어놓게 됐으니 동료들이 배신감을 느껴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떠난다고 해도…… 더 붙잡을 이유가 없다.
그때 보테가 다시 말했다.
“다 죽어 가는 사람 같군. 꼭 죄 지은 사람처럼.”
“이유야 어찌됐건 숨겼으니까.”
로레인의 이야기에 보테가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 나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보테가 제리를 쳐다봤다.
그러자 제리가 다른 동료들에게 물었다.
“나는 뭐가 됐든 관심 없어. 용병단이 로그 길드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럼, 영감이랑 나는 대장 따라가는 건가?”
“그런 셈이겠지. 너희들은?”
보테가 다른 동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모두 동의하진 않았다.
몇몇은 용병단을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이대로 은퇴하고 싶다고, 더는 싸우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그건 로레인 때문에 나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소프 마을에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은 동료들은 가족들과 같이 있기로 결정한 동료들을 이해했다.
로레인이 뜨거운 눈으로 모든 동료들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서운해하지 않는 그들이 고마웠다. 조건 없이 자신의 모든 상황을 이해해 주고 있는 거다.
“솔직히 면목 없어. 고마울 뿐이야. 하지만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볼게. 기회는 지금뿐이야. 날 따라나선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할 때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도 대장에게 원망을 하진 않을 게야. 누구의 탓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으로 결정한 일이니까. 안 그러냐?”
보테가 웃으며 말하자 제리가 한 마디 거들었다.
“말해 뭐 해? 입만 아프지. 근데 혹시…….”
“왜?”
로레인이 물었다.
“대장, 사실 그 갓피스 친구 따라가려고 이러는 거 아니요? 한눈에 반해 버려서?”
“푸하하!”
제리의 넉살에 보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로레인이 한술 더 떴다.
“나도 마음에 들긴 하는데……. 임자 있대.”
“엥? 진짜 관심 있었어요?”
“괜찮잖아. 매력 있던데?”
“대장이 남자한테 관심 있다는 말을 몇 해만에 듣는 건지 모르겠네. 와…….”
보테도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처음이다만?”
당황하는 동료들을 보며 로레인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기록만 유산으로 남긴 게 아닌 것 같다. 아버지의 유산을 지킬 생각으로 한 명, 두 명 함께하게 된 이 용병단, 지금 자신을 믿으며 즐겁게 웃고 있는 동료들이야말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아닐까?
그녀는 문득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 *
대부분이 잠든 새벽.
로레인은 여관 1층에 위치한 기다란 바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로그 길드로 자리 잡고 본격적으로 해 나갈 일들을 계획하고 의논하는 데에만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이젠 이렇게 한잔할 시간도 없겠지.’
분명히 그럴 거다.
그녀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그때.
탁.
꽤나 쌓인 문서들이 앞에 놓였다.
“뭐야?”
찬영이 카운터 앞에 나란히 앉으며 대답했다.
“제가 그린 그림을 포함해서 부탁드리고 싶은 몇 가지를 좀 적어 봤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알아봐 주세요.”
“벌써 끝났어?”
“네, 하다 보니 예상보다 금방 끝났네요.”
“열람하라고 준 것들도?”
“네, 보여주신 뉴 빌드 기록은 전부 살펴봤습니다.”
“소감이 어때?”
“상세한 기록이더군요. 그리고…….”
“그리고?”
“많이 두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느꼈어?”
“네, 곳곳에서요. 그런 와중에 미완성됐다는 올드 원의 주문도 입수하셨더군요.”
“대단하시지. 정말…….”
“솔직히…….”
찬영이 로레인을 그윽이 바라보며 덧붙였다.
“존경스럽습니다.”
“고마워. 아버지가 들으셨다면 내색하진 않으셨어도 내심 좋아하셨을 거야. 갓피스에게 존경받는 로그 길드장이라…….”
찬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난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꿀꺽.
그새 남은 술을 들이켠 로레인이 잔을 내려놓은 후 물었다.
“이제 가려고?”
“예, 그럴 생각입니다.”
“어디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침투하며 해적들을 각개격파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안가로 접어들 겁니다.”
“해안가?”
“네.”
“그사이에 베이콥 영주님이 로일시로 진격하시고?”
“그러실 겁니다. 아마…….”
“확실히 효과가 있겠네. 그쪽이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 뉴 빌드의 시선이 분산될 거야.”
“예.”
“그럼, 셋이서 계속?”
찬영 일행을 말하는 거였다.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겁니다. 진격과는 별개로 그들의 지상 보급로를 끊어 놓는 게 제 이동 경로의 목적이니까요.”
사실 소프 마을에서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다음 마을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확신할 순 없으나 소프 마을 때보다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뉴 빌드에서 내 움직임을 알게 됐을 테니까.’
사라져 버린 말론은 분명, 이 일에 대해 뉴 빌드 상부에 보고했을 테고 그것으로 인해 뉴 빌드는 바짝 긴장할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적이니까.
물론, 원하던 바였다.
“그래서 말인데…….”
로레인이 술잔 주둥이를 손끝으로 매만지다 말을 이었다.
“당분간 함께 움직이는 건 어때?”
“함께요?”
“왜, 부담스러워?”
“아뇨, 그런데 다른 분들과의 의논은?”
“진작 끝났지. 그쪽에게 한 번 물어보고 답변을 들어보기로 했어.”
“그랬군요.”
찬영의 반응을 살핀 로레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의외로 부정적이진 않네?”
“부정적일 거라고 예상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습니까?”
“서로 안지도 얼마 안 됐고……. 힘이 더 필요할 거 같지 않아서?”
“그럴 리가요? 솔직히 로레인 씨의 도움 없었으면 폭발을 막지 못했겠죠. 한 사람보단 두 사람이 낫습니다.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죠.”
“그렇게까지 띄워 줄 거 없어. 폭발을 막은 건 이 녀석 덕분인 걸.”
그녀가 숄을 벗어서 매만졌다.
찬영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는 ‘숄’ 형태의 장비를 쳐다봤다.
‘저번엔 망토였는데?’
찬영의 시선을 느낀 로레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형태 변화가 가능하더라고……. 망토는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편한 형태로 축소시켰어.”
“형태 변화가 가능한 물건은 처음이네요.”
“아, 그래?”
“네.”
“한번 만져 봐. 궁금한 것 같은데.”
로레인이 숄을 건넸다.
“그러죠.”
찬영은 사양하지 않고 숄을 받아 들었다.
폭발을 막았던 그녀의 장비가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침묵의 안개 ‘이타콰’
-희생 전용
-희생이 착용하지 않을시 효과 사용 불가
-가치 : 5,520
-효과 A : 소유자 30분의 수명을 줄여 반경 20m 안의 ‘침묵의 안개’를 일으킨다.(1회 사용 시 침묵의 바람 3분간 유지, 재사용 대기시간 : 24시간)
-효과 B : 침묵의 안개 발동 시, 소유자를 포함해 최대 다섯 명까지 지정 방어 할 수 있다.(지정 방어 시 3분간 모든 피해 무효화)
-효과 C : 지정 방어에 해당된 대상들만 체공 상태 유지(단, 침묵의 바람 소멸 시 추락)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수명이 줄어든다고?’
상상도 못한 대가였다.
소유자의 수명을 줄여 강력한 방어 결계를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습니까?”
“뭘?”
“그때 그 안개들 말입니다.”
“그건 그 장비의 능력인데, 왜?”
“그러니까 그 능력의 대가에 대해서요.”
그 순간 로레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알았어?”
“지금요.”
“……미치겠네.”
로레인은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알딸딸했던 술기운이 날아가 버린 기분이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것도 갖고 있는 능력 중 하나야? 물건을 쥐면 훤히 보이는 그런?”
“네, 대충은요.”
“그럼 발뺌도 못하겠네.”
“발뺌할 거리도 없죠. 어떤 능력인지 훤히 알게 된 거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로레인은 비어 있는 술잔에 술을 다시 따르려 했다.
그러자 찬영이 그 술병을 대신 집어 들어 로레인의 잔에 따라 줬다.
“뭐해?”
“위로요.”
“위……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녀를 향해 찬영이 자신의 잔도 가져다놓고 그 위에 술을 따랐다.
의외의 행동에 로레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래?”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요. 살려 줘서 고맙다고 얘기해 봐야 로레인 씨 수명이 돌아오는 게 아니니까…….”
“미안할 거 없어.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압니다. 그래서…….”
찬영이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바라봤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술이다. 마시고 싶은 날도 그냥 넘겼다. 그럴 시간에 검 한 번 휘두르는 게 나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위로 정도는 해 주고 싶습니다.”
“그게 이거야?”
“네, 해 줄 수 있는 게 같이 술이나 한잔하는 것 말곤 달리 생각나지 않아서요.”
로레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꺄르르 웃는 그녈 보며 찬영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괜찮네.”
로레인이 술잔을 들어 찬영에게 들어보였다.
“충분한 위로야. 수명이랑 바꾼, 비싼 술을 한잔 얻어먹었다고 생각하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될 것 같거든.”
찬영이 말없이 그녀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곧바로 로레인도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말했다.
“동행을 위하여.”
왕국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