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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44화 (144/248)

# 144

144화

지하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간 찬영과 로레인은 작은 동굴에 도착했다.

‘숨겨져 있었구나.’

찬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놀랐다.

‘여관의 설립은 모두 이 작은 동굴을 지키기 위한 거였어.’

동굴은 이끼 하나 없이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습기가 없군요.”

“아버지는 모이스처 블록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진과 그 마법진을 유지할 수 있는 마나 탱크를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 두셨어. 그 덕에 습도를 조절하는 마법이 삼 년 정도는 더 유지될 거야. 기록들이 훼손되지 않는 이유지.”

“그랬군요. 만약 삼 년이 지나도 상황이 그대로였다면 이 기록들은 어쩌려고 했습니까?”

“해적들 때문에 옮기지 못한다면 전부 소거할 생각이었어. 모든 건…….”

로레인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에도 있으니까.”

“다행히 그럴 일은 없게 됐군요.”

“그쪽 덕분이지.”

대답과 함께 로레인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의 등 뒤로 빼곡히 자리 잡은 책장들이 보였다.

책장들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동굴을 따라 벽에 붙어 있었다.

찬영은 그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각 책장에 투박하게 새겨진 글씨에 주목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로레인이 숫자를 가리켰다.

“아버지만의 분류법이야. 중요도에 따라 1부터 10까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지.”

“이 숫자가 정보를 분류해 놓은 순서들인가 봅니다.”

“맞아. 하지만 예외도 있어.”

“예외라면……?”

찬영은 말려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들 중 붉은 끈이 달려 있는 것들을 금방 발견했다.

“이건가 보군요.”

그가 붉은 끈이 달려 있는 두루마리를 가리키자 로레인이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장 낮은 중요도인 10 수준의 사건이 1이나 2 같이 높은 중요도를 가진 사건과 연관이 될 땐 따로 붉은색 끈으로 표시해 두셨어.”

“로레인 씨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네요.”

“당연하지. 누구 아버진데.”

로레인이 빙긋 웃은 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좀 많지?”

찬영이 대답 대신 볼만 긁적였다.

그렇긴 했다.

워낙 많은 양의 두루마리가 있어서 이걸 다 외웠다는 로레인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네, 많긴 하네요.”

“그래도 걱정 마. 내 머릿속에 있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해. 얘기해 주거나 찾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갓피스 앨범 창을 띄웠다.

남은 199명의 갓피스들의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사진 속 사람들.

하지만 사진만 있을 뿐 어떤 정보도 없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찬영이 로레인을 향해 말했다.

“당장 필요한 건 뉴 빌드에 대한 기록입니다.”

“뉴 빌드?”

“네, 적에 대해 잘 알아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좋은 생각이야. 그들에 관해선 제법 쌓여 있는 정보가 많아. 직접 들려줄까? 아니면 열람할래?”

“듣는 것보다 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생각할 것도 좀 있고 해서…….”

“그럼 그렇게 해.”

“네, 고맙습니다.”

“알면 됐어. 그럼 필요한 정보를 찾아 주는 것만 도와줄게. 뭐부터 찾아 줄까?”

“그 전에…… 드리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 유산을?”

“이것들을 포함해 로레인 씨의 거취를 말하는 겁니다.”

“글쎄…… 오랫동안 마을 일로 발이 묶여 있었으니 슬슬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 유산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이런 날이 정말로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런 날이 오지 않았습니까?”

찬영의 반문에 로레인이 입을 막 떼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더니 가라앉은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짐작하실 것 같은데요.”

찬영은 로레인이 예상할 거라고 생각했다.

로레인도 자신이 찾아온 목적이 사실 마셰로프의 기록이 아닌 로그 길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게 있어.”

로레인이 대답했다.

“아마 그 짐작이 맞을 겁니다.”

“나더러 로그 길드를 재건해 보라는 거겠지? 겸사겸사 도움도 받고?”

찬영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잠시 말을 잇지 않던 그녀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두 번 생각해 본 게 아니야. 하지만 늘 안 된다고만 생각했어.”

부정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찬영은 따로 설득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이건 선택의 문제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사이 로레인이 덧붙였다.

“예전이었다면 그랬을 거야. 당신의 제안을 거절했겠지. 로그로서의 자격을 따지기 전에, 아버지의 유지를 이을 만큼 내가 괜찮은 딸이었다는 생각이 안 들었거든. 난 복수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버지는 날 자랑스러워하셨어. 아버지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핑계로 죄책감에 찌들어 사는 건 마셰로프라는 이름을 이은 유일한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지.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눈을 내리 깔고 있던 로레인이 말을 이어가며 눈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이젠 만회해야지. 그쪽이 아니더라도 난 나대로 아버지의 유지를 이을 생각이었어. 이 기록들을 토대로 길드원들을 다시 복귀시켜 봐야지.”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희망이 실려 있었다.

찬영도 은연중에 그걸 느꼈다.

‘이미 결정했구나.’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그녀는 자신의 선택대로 로그 길드를 새로 세웠을 거다.

그녀가 무척 든든했다.

“그럼 제가 첫 고객이 되고 싶군요.”

“첫 고객이니 모든 정보는 무상으로 해 줄게, 고객이 고객이니만큼 말이야. 그리고…….”

말을 잇는 그녀의 눈동자에 살의가 실렸다.

“아버지의 빚을 되갚을 기회만 된다면 제대로 되갚아 줄 생각이야. 놈들 손에 중독된 채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으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한 짓의 대가를 충분히 치러야죠. 그래야…….”

찬영은 그들이 벌였던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틀렸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자, 뭐부터 시작할까?”

“우선 뉴 빌드에 관한 기록들을 중요도가 높은 순서대로 찾아 주시고……. 그림 그릴 게 좀 필요합니다.”

“그림?”

“예.”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때부터 찬영은 그림을 그렸다.

처음 한 장을 그릴 땐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를 그리는 수준이었다.

발로 그려도 이거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데 자꾸 그리다보니 조금씩 나아졌다.

무아지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그때.

-손재주 가치가 1 올랐습니다.

‘손으로 하는 것이다, 이건가?’

손재주 가치가 뭘 의미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간 검의 숙련도 등 손으로 하는 많은 것들이 능숙해져 갈수록 손재주 가치가 꾸준히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벌써 190(F)이면 말 다한 거겠지.’

어느 정도 쌓여 있던 손재주 가치가 방금 그림을 그리며 상승한 것까지 합해 190을 달성했다. 이제 손재주 가치가 200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것 덕분인 건가?’

그림도 조금씩 그림 실력이 나아지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나아졌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명암부터 윤곽까지 점차 명료해졌다.

어릴 때 열흘 정도 다녔던 미술 학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던 그림 실력이, 어느 순간 아마추어 화가 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열다섯 번째 그림이 완성됐을 때 로레인이 그가 그린 그림 두 장을 집어 들며 말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거 맞아?”

“여기 누가 또 없다면요.”

“없지. 그나저나 되게 묘하네. 그새 실력이 늘어버린 거야?”

찬영이 눈앞에 띄워져 있는 상세 데이터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알면 알수록 할 말 없게 만드는 능력이네. 어쨌든 그건 그렇고…….”

그녀는 찬영이 열네 번째로 그렸던 그림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이게 예비 갓피스들이라는 거지?”

“네, 제가 보고 있는 걸 그대로 그려 드리는 편이 설명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훨씬 나아. 특히 이렇게 잘 그린 그림이라면 찾는 게 더 수월할 거야. 잘했어.”

“칭찬은 고맙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그린 것만 해도 꽤 되는데 아직도 그릴 사람들이 더 남았단 말이야?”

“예.”

단호한 대답에 로레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들으면 갓피스가 동네 강아지 이름인 줄 알겠어.”

“아직 갓피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죠. 각성을 하는 건 스스로의 선택이나 역량에 달린 일이라…….”

“당신을 만나고 만나지 않고의 차이일지도 모르지.”

찬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앨범 개방이 됐을 때의 나왔던 문구에서 자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갓피스들이 더 빨리 각성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하지만 장담컨대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선택과 두려움을 주저하지 않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만약 차원의 돌의 폭발 속에서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 가정만으로도 찬영은 로레인의 갓피스 각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그녀 스스로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요. 로레인 씨의 각성에 제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저 지켜봤을 뿐이죠.”

“아니, 난 맞다고 봐. 당신은 내게 갓피스란 걸 알려 줬을 뿐 아니라 각성할 수 있게 은연중에 도와줬어. 내게 많은 감명을 줬지.”

그건 로레인의 진심이었다.

찬영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의 주저 없는 희생과 결정에 탄복했다.

찬영은 분명 특별한 사람이다. 정작 본인만 모르는 것 같지만…….

“그리고 굳이 수많은 사람들 중 당신이 예비 갓피스의 단서들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여신께서 당신에게 그만한 운명을 기대하고 있단 게 아닐까?”

찬영은 잠자코 로레인의 말을 곱씹었다.

운명이라…….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종종 머릿속에 떠오르는 ‘열쇠’, ‘사명’ 등의 이름들.

이 긴 여정의 시작을 하게 된 이유들마저 모두 자신에게만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능력이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게 알아서 이뤄지는 건 아니겠죠. 선택들을 두고 매번 어려운 결정을 하는 건 늘 우리들 아닙니까?”

“운명이 주어져도 그걸 선택하고 답을 내리는 건 우리다?”

“네, 모두가 그렇죠.”

“마음에 드네. 신에게조차 기대지 않는 남자라……. 아버지가 이런 남자한테 시집가라고 했던 거 같은데?”

로레인이 씩 웃었다.

그녀가 매혹적인 붉은 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어때?”

찬영이 대답 대신 새로 그린 그림을 넘겼다.

“전 됐고 이 친구는 어떻습니까?”

입맛을 다시며 그림을 받아든 로레인이 눈을 치켜뜨며 웃었다.

“호오, 잘생겼는데?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이 사람은 꼭 찾아야겠어.”

“그러길 바랍니다.”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다시 새로운 그림에 열중하려는 찬영에게 로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몇 명이나 더 남아 있지? 예비 갓피스들 말이야.”

찬영은 그려 놓은 그림들을 살피며 대답했다.

“185명 정도 남았네요.”

듣고도 믿기지 않아, 로레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 * *

밤새 그림을 그려 앨범에 있는 모든 이들의 기록을 마친 찬영은 앉아 있는 탁자 위에 그림들을 잘 쌓아 둔 후, 옆에 놓인 두루마리들을 살폈다.

‘여러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구나.’

찬영은 두루마리를 빠르게 읽었다.

뉴 빌드에 관련된 정보들을 준 증인과의 대담을 재구성해 써 내려간 내용도 있었고, 독백 같은 일기 형식의 문서도 있었다.

그중엔 이미 아는 사실도 있었고, 전혀 몰랐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지금 읽고 있는 기록이었다.

-……이번에 새로운 증인과 접선하려 했다. 워낙 흥미로운 일이라 직접 나섰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손에 잡힐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나긴 했으나 그 덕분에 증인이 알려 준 사실이 정확한 정보인 걸 깨달았다.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면 뉴 빌드가 나설 일이 없었겠지.

아쉽다.

만약 그와 무사히 접선만 했더라면 뉴 빌드에 감춰진 속살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번엔 물러나는 선택이 옳았다. 아직은 그들 손에 잡힐 때가 아니다. 좀 더 캐내야 한다.

진실을 알아낼수록 지쳐가는 게 사실이다. 대체 놈들은 얼마나 미쳐 있는 걸까?

……탁.

두루마리에서 손을 뗀 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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