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너, 누구야?”
로레인이 물었다.
찬영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로레인에게 반대편 자리를 권하며 그 맞은편에 앉았다.
“갓피스입니다. 아니, 대한민국에 살던 양찬영이라고 소개하는 게 맞겠군요.”
로레인과 찬영은 그제야 제대로 된 통성명을 시작했다. 찬영은 간략히 자신이 소프 마을에 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마주 앉아 그 얘길 듣고 있던 로레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다른 행성이 있고…… 당신은 그곳에서 왔다?”
“믿어도 됩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내게 최후의 성전에 대해 물어봤죠?”
“그래.”
“다른 행성에서 온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를지도 모르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저 몇 가지만 알 뿐이지.”
“뭡니까?”
“안 돼. 지금은 내가 궁금한 것부터.”
“그러시죠.”
동의한 찬영에게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소릴 했다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지금은?”
“내가 갓피스가 된 것만으로도 당신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건 증명됐다고 봐. 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찬영의 표정을 살피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게 마셰로프의 성을 알고 있는 이유가 될 순 없지.”
“압니다.”
“그럼, 말해 봐. 어떻게 알았지?”
찬영은 제이나가 들려준 얘기들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놨다.
그 얘길 가만히 듣고 있던 로레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이나라고 한 그 사람…… 성이 뭐지?”
찬영은 그녀의 가문 이름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로덴 가문의 영애였습니다, 한때는요.”
로레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오히려 대답을 마친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놀라서 그래.”
찬영이 놀란 게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로레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말이 끊긴 찬영은 그녀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네.”
“당신은 그 공작 영애와 무슨 사이이기에, 그 속사정까지 알고 있지? 그녀의 남편인 건가? 아님 애인? 집사?”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됩니까?”
“중요해. 대답 안하면 의심하겠어.”
“의심하시죠.”
“고집 세기는…….”
로레인은 더 묻지 않았다.
가벼운 농담이었을 뿐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찬영은 목숨 걸고 마을을 지켰고, 차원의 돌이 폭폭발할 때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없었다면 어차피 아버지의 모든 유산은 사라졌을 것이다.
이 정도면 그를 신뢰하기 위한 정황들은 충분했다.
‘그 행동들마저 거짓이었다면 그것도 내 운명이겠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쯤, 찬영이 말했다.
“이제 제 차례군요.”
“잠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
“나를 찾아온 거야, 아니면 마셰로프란 성을 찾아온 거야?”
“둘 다입니다.”
“무슨 소리야?”
“전 당신처럼 아직 각성하지 못한 갓피스들을 찾고 있어요.”
“갓피스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소리야?”
“얼굴만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각성자라는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들이 있죠.”
“하……!”
로레인은 할 말을 잃었다.
들을수록 가관이다. 새로운 행성부터 각성자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빠르게 적응했다.
‘하긴, 한 번 멸망했던 세상인데. 뭐가 나온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찬영의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성 있게 들렸다.
“그래서 얼굴만 아는 갓피스들을 찾기 위해 마셰로프라는 성을 가진 분을 찾아왔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로그 길드 중 한 곳의 수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마셰로프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면 그들을 찾는 게 조금 더 수월해질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당신은 혹시 그분의 딸입니까?”
“맞아, 내 아버지지.”
그녀의 눈동자에 회한이 서렸다.
그건 그리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적 감상을 금방 털었다.
이젠 전처럼 죄책감이 밀려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남긴 건 그저 단순한 유산이 아니었다.
‘희생과 사랑이었지.’
그건 죄책감에 스스로를 옭아매라고 자신에게 남긴 게 아니었다.
로레인은 갓피스로 각성하면서 그걸 깨달았다.
로레인이 굳었던 표정을 풀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돌아가셨어.”
순간 찬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실수를 한 셈이다.
‘마셰로프’란 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려야 했을 테니까.
찬영의 사과에 로레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세 살짜리 어린 애도 아니고. 나이 사십이 다 돼가. 아버질 잃었다고 해서 징징 짤 나이는 아니지.”
“알겠습니다.”
“그래,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면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고.”
로레인이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바람에 덜컹이는 창을 ‘탁’ 하고 닫으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는 용병단 식구조차 모르는 일이야. 물론 마을 사람들도 그렇지.”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빛은 그녀를 지금까지의 쾌활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지적이고 차분해 보이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찬영에게 로레인이 다시 다가와 앉았다.
“아버지는 고아였던 날 거두어 기사로 키우셨어. 자라면서 자연히 알게 됐지, 아버지가 로그 길드의 수장이란 걸.”
“그랬군요.”
“그래, 그랬어. 그래서 아버지께 늘 졸랐지. 로그가 되고 싶다고……. 그랬더니 아버진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 ‘그럼, 언젠가 네가 나를 찔러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래도 할래?’ 그 질문에 난 아무 대답도 못했지.”
쓰게 웃은 로레인이 말을 이었다.
“그 후 기사가 됐지. 영주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기사단의 1대대에 속하게 됐어. 특히 1대대는 로일 가의 친위대라고 불릴 만큼 소수 정예로 분류되지.”
“기뻤나봅니다.”
“그래, 기뻤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출세해도 아버지께서는 별말이 없으셨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내가 잘 해내고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깨달았어. 아버지께서는 날 충분히 자랑스러워하고 계셨다는 걸. 하지만 그 깨달음은 좀 늦은 감이 있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로레인의 눈빛이 깊게 침잠했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로그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게 된 건…….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는 게 내 삶의 목적이 된 순간이었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군요.”
“맞아, 돌아가실 때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짐작도 안 되거든. 내가 로그였다면 가까이서 지켜드릴 수 있었겠지.”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찬영은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유산을 지켜온 겁니까?”
“맞아, 유산은 마을에 있지. 그리고 유산을 열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야. 그리고 그 유산은 로그 길드와 깊은 연관이 있지.”
“어떤 유산이기에……?”
“기록이야.”
“기록?”
“그래, 기록. 그 기록엔 아버지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수많은 정보들이 있지. 그 정보 중엔 당연히 뿔뿔이 흩어진 로그 길드원들의 정보들도 있고.”
가만히 듣고 있던 찬영이 눈을 부릅떴다.
로레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유산이라고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 정보와 관련 있는 길드원들이 살아 있다면…….
‘마셰로프의 로그 길드를 재건할 수 있어.’
찬영은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마셰로프의 성을 가진 그녀라면 정통성이 있고도 남는다.
더구나 그녀는 이제 또 한 명의 갓피스다. 그녀 말고 로그 길드를 다시 재건할 만한 인물을 찾긴 힘들다.
그녀를 설득해야만 한다.
“뭘 그렇게 쳐다봐? 놀랐어?”
찬영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로레인이 넌지시 물었다.
“네, 여러모로.”
“하긴, 그럴 만도 해.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 받은 후 나도 놀랐으니까. 그래서…….”
잠시 말끝을 흐리던 로레인이 찬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젠 어쩔 거야?”
“허락하신다면 로레인 씨의 아버님이 남긴 기록들을 활용해야겠죠.”
“언제든지 가능해. 특히 로덴가와 관련이 있다면.”
“로덴가라……. 아까 놀란 것과 연관이 있는 얘기 같네요.”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참이었던 찬영은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묻기로 했다.
“아, 그건 아버지가 남기신 말씀 때문이었어.”
“어떤……?”
“로덴가가 우릴 찾아온다면 도움이 필요하거나, 혹은 다시 움직일 때일 거라고. 아마 그때가 유산이 제대로 쓰일 기회일 거라고 하셨지.”
“아, 그래서?”
“맞아, 그래서 놀란 거야. 로덴가가 움직였다는 건 물밑에 있던 브라이트가 움직인 것일 테니까.”
“브라이트를 알고 있었군요.”
“그래, 알아. 물론 아버지의 기록을 공부한 덕분이지. 당신도 혹시 브라이트?”
“그건 아닙니다. 그저 로덴가와 연관이 있을 뿐이죠.”
“브라이트란 조직을 알 정도면 적게 연관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후, 그녀에게 이어서 물었다.
“최후의 성전은?”
“그 기록은 얼마 안 돼. 아버지도 깊이 아는 부분은 없는 거 같아. 아까 말한 대로 몇 가지 언급된 부분만 있지.”
“어떤 겁니까?”
“홉스.”
“예?”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반문하는 찬영에게 로레인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최후의 성전 전에 ‘홉스’라는 단체가 있었대.”
“뉴 빌드에 대항하던 단체인가 보군요.”
“그래, 홉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들이 갓피스들로만 이루어졌던 단체라는 거지. 나라, 직업, 종족 어떤 차별도 없는 단체였었다고 해.”
“성전을 대비한 단체였을까요?”
“글쎄, 모를 일이지. 하지만 누가 창설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어.”
“누굽니까?”
“알폰의 성녀, 베아트리체. 교황의 눈엣가시이면서 동시에 교단의 마지막 희망이었지. 듣기로는 여신의 신탁을 가장 많은 받은 성녀라던데?”
찬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제야…… 이제야 닿았다.’
라인쉐리어, 베오 루퍼, 베아트리체 사이의 관계와 그들이 함께하게 된 이유까지 모두 다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 같다.
‘그래, 그들은 같은 목적을 위해 손을 잡은 거였지.’
그 이유가 마침내 진실이란 이름으로 수면 밖에 나온 거 같다.
‘홉스.’
그 조직이 그들을 잇는 매개체였던 것이다.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아직 질문이 더 남았다.
“그런데, 눈엣가시란 얘긴 뭡니까?”
“아, 그거? 그건 나도 기록을 보면서 놀랐던 부분이야. 아버지에 따르면 교황의 신탁에 의심 가는 일이 많았다고 해.”
“어떤 의심 말입니까?”
“여신의 신탁은 원래 세상에 큰 희생이 따를 때만 내려 주었는데, 지금의 교황이 집권한 이후론 신탁이 너무 잦게 내려왔다는 거지. 그것도 교황에게만. 거기다가…….”
로레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부분이 군사 배치에 관련된 거였대. ‘수도의 수비 병력을 줄여라.’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이런 의심을 품고 교황의 뒤를 파헤치기 시작한 게 왕과 성녀였다는 거지.”
“둘이 손을 잡은 것이군요.”
“그래, 그런 것 같아. 어쩌면 둘 모두 교황에게 위협을 느낀 걸 수도 있고.”
그 얘길 들으며 찬영은 생각이 더 깊어졌다.
‘그럼 라인쉐리어의 일이 교황과 성녀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이뤄진 일일 수도 있겠어.’
라인쉐리어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성물을 훔쳤다고 했다.
찬영은 이 일이 그 일과 맞물려 뭔가 커다란 흐름을 가져왔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더욱 로레인이 열람했다는 마셰로프의 유산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계속 질문하고 대답하는 식보단 그게 나을 거 같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분이 남겼다는 유산을 직접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로레인이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후 두 사람은 1층의 한 식료 창고로 향했다.
“여긴……?”
“루디의 휴식처. 지금은 식료 창고로 쓰고 있어. 이젠 해적들이 수탈한 식량들이 가득하지. 곧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 하겠지만.”
그녀가 빼곡히 쌓여 있는 식료 창고들을 지나 한 철문 앞에 섰다.
“여긴 뒷문이야. 나가면 여관의 울타리가 있는 후문으로 통하지. 하지만…….”
그녀가 철문을 연 뒤 철문이 열린 밑바닥 홈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조그만 열쇠 형태의 목걸이를 끌러 홈 한 가운데에 그 열쇠를 꽂아 돌렸다.
그러자…….
철컥! 구궁!
그들이 디디고 있던 창고 바닥에 균열이 생겼다.
아니, 균열이 아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크기의 직사각형을 그리는 점선들이었다.
쿠구궁!
바닥은 굉음을 내며 어느새 지하로 가는 계단을 드러냈다.
숨겨져 있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