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화
* * *
찬영은 고민하며 새롭게 나타난 창들을 살펴봤다.
예상대로였다.
라인쉐리어와 베오 루퍼는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 못한 것도 있었다.
-베오 루퍼와 라인쉐리어 간의 인연을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와 베오 루퍼 간의 인연을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인연 성립이 중복될 경우 하나의 인연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주세요.
‘이런 건 예상 못했는데…….’
앞전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당연히 라인쉐리어와 베오 루퍼 간의 인연 성립만 이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베아트리체라니?
‘베오 루퍼와 베아트리체 사이에도 인연이 있었단 얘긴가?’
그렇다면 또 다른 실마리가 나온 셈이다.
찬영은 생각에 잠겼다.
‘인연이 있다는 건 그들이 뜻을 함께할 만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 아닐까?’
아무 이유도 없이 함께 어쌔신, 성기사의 직위를 박탈당한 배신자, 둘과 전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성녀가 함께 있을 리 없다.
분명 셋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거다.
‘혹시, 뉴 빌드일까?’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다.
베아트리체는 올드 원, 뉴 빌드의 적이 분명 하고 둘은 그녀와 인연 성립이 된다.
‘셋 모두 뉴 빌드의 적이었다는 전제로 접근해 본다면……?’
찬영은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우선 라인쉐리어가 걸려.’
그도 그럴 게 그는 성물을 훔쳐 낸 대가로 노티스 교단의 배신자가 됐다. 그에게 딱히 규정한 적은 없다는 얘기다.
만약 그에게 적이 있다면 그를 노리고 있는 교단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긴 힘들어.’
베오 루퍼가 한 얘기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베오 루퍼는 라인쉐리어에게 로그 길드와 어쌔신 길드가 무너지거나 포섭되고 있다고 들었어.’
그 얘기대로라면 라인쉐리어는 로그 길드를 향한 뉴 빌드의 음모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건 결국 뉴 빌드의 존재, 혹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단 말이 되겠지. 그리고 그랬다면…….’
멸망을 가져오려 하는 뉴 빌드와 여신의 신탁을 받을 역량의 성기사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래,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라도 라인쉐리어는 베아트리체와 함께 뉴 빌드와 싸우고 있었던 거구나.’
놀라운 일이다.
교단의 배신자를 교단의 가장 성스러운 성녀가 조우했고 함께 움직였다는 건…….
‘예민한 문제다. 조심스럽게 알아봐야겠어.’
드러난 진실에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럼 결국 라인쉐리어와 조우하게 된 베오 루퍼 또한 뉴 빌드와 적이 됐겠군.’
방금 보았던 베오 루퍼와 라인쉐리어 간의 인연을 성립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만 봐도 그게 확실해 보인다.
만약 베오 루퍼가 던진 마지막 질문, 자신의 적이 로그 길드를 섬멸하고 있는 적과 같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면…… 공통점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라인쉐리어는 그렇다고 대답했을 거다.’
확실하다. 둘의 적이 다르다면 교단에 쫓기고 있는 라인쉐리어가 괜히 베오 루퍼를 찾아가 그의 생명을 구해 냈을 리 없다.
‘베오 루퍼 또한 자신의 적을 놔두고 라인쉐리어와 함께할 리 없겠지. 이제야 세 사람 사이의 공통점이 명료해지는군.’
찬영이 눈을 빛냈다.
‘적이 같다면 서로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해.’
찬영은 이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더 생각해 봐야 나올 것도 없다.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짜깁기해서 도출해 낸 결론이니까.
‘이게 최선이자…… 최상이야.’
찬영은 충분히 만족했다. 이번 기회로 인해 베아트리체와 라인쉐리어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또한 짐작이 가능해졌고, 세 사람의 적이 뉴 빌드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물론 몇 가지 풀리지 않은 게 있긴 하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라인쉐리어와 베아트리체가 어떤 경유로 손을 잡았는지 등과 같은 것들.
하지만 조급하진 않다.
‘다음 캘린더의 인물을 통해 그걸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베오 루퍼로 인해 베아트리체와 라인쉐리어의 관계를 짐작하고 유추할 수 있었듯 말이다.
찬영의 복잡했던 눈빛이 훨씬 평온해졌다.
세 사람 사이의 관계 추측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젠, 선택해야겠지.’
찬영은 앞에 놓인 창을 유심히 바라봤다.
베아트리체와 베오 루퍼.
베오 루퍼와 라인쉐리어.
창을 응시하던 찬영이 오래 생각하지 않고 과감히 결정했다.
‘베오 루퍼와 베아트리체를 택하겠어.’
라인쉐리어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어서 베아트리체의 영혼 교류 수치를 상승시켜야 해. 인연 성립이 되면 관련된 인물의 교류 수치가 함께 상승하니까.’
찬영은 올드 원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한 베아트리체와의 대화가 절실했다.
‘베아트리체의 말대로 그동안 쌓아 온 영혼 교류가 조금이라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라면…….’
이를 위해 그녀와의 영혼 교류를 상승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택하겠어.’
그 순간, 손끝을 타고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다보자 검은색 연기 같은 게 손등 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대편 손으로 검은색 연기를 잡으려던 찰나, 뭉쳐 있던 연기가 갑자기 손등 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유심히 지켜보던 가운데 검은 연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베아트리체와 베오 루퍼의 인연 성립으로 인해 숨겨진 기억 조각 (1)이 흡수되었습니다. 기억 조각 (1)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연관 기억을 일부 볼 수 있습니다.
-베오 루퍼와의 인연 성립으로 인해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6% 상승하였습니다.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21.8%가 됩니다. 20% 달성으로 인해 중화가 업그레이드됩니다.
-베아트리체와 영혼 교류 20% 달성으로 인해 신성력이 1,200 상승합니다.
-최초 영혼 교류 20% 달성 업적으로 인해 플래티넘 1급 박스가 주어집니다.
영혼 교류 상승은 순식간에 많은 부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플래티넘 박스 획득과 신성력의 상승 같은 부차적 보상과 20% 달성으로 인한 중화의 업그레이드까지…….
하지만 찬영은 그 놀라운 보상에 감탄할 새가 없었다.
눈앞에 아까 끊겼던 라인쉐리어와 베오 루퍼 사이에 이뤄졌던 대화 한 장면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 * *
온몸에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베오 루퍼는 침상에 누운 채 라인쉐리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찬영은 그들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내 적이 뉴 빌드라는 자들이라는 건가?
베오 루퍼가 물었다.
-그렇소. 그들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로그 길드와 어쌔신 길드를 압도하고 섬멸하고 있소.
-그걸 어떻게 알지?
-난………. 여신을 모시고 성녀를 지키는 성기사요. 거짓을 고하는 건 내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요.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꼬락서니는 거지가 따로 없지만.
-…….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당신에게 의뢰하려고 했던 그자는 뉴 빌드의 일원이오. 유혹의 돌의 힘을 가진 6인의 선지자 중 하나이며 선지자들은 리치로 짐작되고 있소.
-영원불멸의 삶을 산다는 리치? 차라리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드래곤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현실성 있겠군.
-내가 그를 한 번 죽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부활이라도 했단 얘긴가?
-그런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조우하지 못했겠지.
-그럼 놈이 도망칠 때 쫓아야 했군.
라인쉐리어가 물었다.
-그 몸으로?
-못했을 것 같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이는 베오 루퍼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라인쉐리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담력과 기세는 인정하겠으나 이번엔 우리가 운이 좋았소. 그가 먼저 물러서서 사라져 주었으니.
-놈이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인가? 듣기 거북하군.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이오. 날이 갈수록 그의 힘이 강력해지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언젠가 다시 그를 보게 되면 그를 쉽게 제압할 순 없을 거요.
-나약한 자들의 변명같이 들리는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자조적으로 읊조린 라인쉐리어가 차분한 눈길을 보였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것이기도 하오.
-왜지?
-우린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 말이오.
-거절하지. 난 혼자 움직여.
-그러시오. 단,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제공하겠소. 혼자 하는 것보단 도움을 받는 게 움직이기 쉬울 것이오.
-우리? 뒤에 누군가 있는 건가?
-있소. 단, 그분의 안전이 걸린 일이라 발설할 순 없소.
-누군진 모르지만 몸을 어지간히 아끼나 보군. 그런데…….
말을 잇던 베오 루퍼가 눈을 힐끗 치켜뜨며 라인쉐리어에게 물었다.
-혹시 그들이 암살을 의뢰하려고 했던 대상이 지켜야 한다는 그자인가?
-맞소. 그들은 그분을 노리고 있소. 내부와 외부, 모든 곳에서 그분을 노리고 있지.
-왜?
-그래야 그들의 세상이 빨리 올 테니까.
그 대화 후 마치 필름 끊긴 영화처럼 보고 있던 모든 게 반투명해지며 사라졌다.
* * *
찬영은 몇 번 눈을 깜빡이며 현실감을 찾은 후 방금 들은 대화들을 곱씹었다.
‘내 생각이 맞았어.’
라인쉐리어와 베오 루퍼의 공통점, 즉 공동의 적이 뉴 빌드가 맞았던 것이다.
거기다 뉴 빌드에 관한 새로운 힌트도 알게 됐다.
‘6인의 선지자.’
라인쉐리어는 그들이 여섯의 리치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일전에 만났던 녀석들의 리더들이겠지.’
적의 이름을 알았다는 건 굉장한 수확이다.
연기 같이 모호하던 놈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걱정 때문에 흡족해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라인쉐리어가 수호하는 인물에게도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냈기 때문이다.
찬영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 속에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키고 있다는 게 베아트리체일까?’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세 명의 관계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생각이 맞다면 라인쉐리어가 말한 내부와 외부의 음해하는 세력은 아마…….’
찬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노티스 교단!”
그 말을 뱉고 나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돼.’
세상의 희망이라 불려야 할 노티스 교단이 뉴 빌드에 의해 분열되고 있었다고?
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탄다.
‘진실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과거에 있었던 일의 파장이 결코 적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당연했다.
지금 있는 얘기들만 되짚어 봐도 교단의 교황청 안에 암투가 뉴 빌드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찬영은 아니길 빌었다.
그들이 흔들렸다는 게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방황할 거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얘기하면 안 되겠어.’
자신은 지구에서 왔기 때문에 충격이 덜했지만, 이곳은 시드 대륙이다. 노티스 교단은 신성 왕국을 정신적으로 지탱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시드 대륙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생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찬영의 말을 믿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것들이 갖춰지기 전엔…….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그랬다간 괜한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
자신은 과거의 인물들과 많은 기억을 공유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고민을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후우…….”
답답한 마음에 깊은 숨을 뱉었다.
‘그들도 그랬겠지.’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 베오 루퍼 모두가 자신처럼 많은 고민들을 해 가며 앞으로 걸어 나갔을 것이다.
‘난, 그들보다 더 나아가야 해.’
부족하면 안 된다.
그들의 기억들을 통해 과거의 그들보다 더 많은 고민과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실패한 걸 내 손에서 다시 성공시킬 수 있어.’
실패와 성공의 간극을 좁히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들도 그걸 원할 거야.’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찬영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알고 있었다.
스스로 짊어진 운명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걸.
걱정하던 찬영은 다시 눈을 들었다.
눈앞에 그를 더 강하고 견고하게 만들 수많은 보상들이 가득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베오 루퍼의 교류창이 보였다.
“이거였나.”
역시나……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