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 * *
지수는 찬영이 새로 추가해 준 보석 한 개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
“감사 인사는 됐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말로…….”
지수는 매번 신세만 지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말했다시피 신세 아니에요. 날 위한 거라고 얘기했죠?”
“예.”
“네, 그래요. 내일 봐요.”
찬영의 대답과 함께 지수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고, 그제야 혼자 남은 찬영은 차분한 눈길로 30회 보상 받기에 눈을 뒀다.
-지잉!
매번 설렌다.
‘이번엔 뭐가 나올까?’
일전에 나온 푸른 보주만 해도 훈련의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온 놀라운 물건이었다.
어떤 쓰임새로 쓰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어딘가에 효용 가치가 있는 물건이 나올 거다.
-3회차 로그인 캘린더 30회 보상 받기가 완료되었습니다. 30회 보상으로…….
띵!
익숙한 소리와 함께 찬영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유령 소스(5회 이상 사용 불가)
-가치 : 1,820
-설명 : 섭취 시 30분 동안 한시적으로 투명 상태가 유지된다. 단, 부딪히거나 충격을 받을 경우 투명 상태가 해제된다.
찬영은 새로운 창의 문구를 한참 읽은 후 고민에 잠겼다. 푸른 보주처럼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나 쓰임새에 따라선 뛰어난 효용 가치를 보일 물건이다.
‘이번에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어.’
최근 겪은 일들을 돌아봐도 투명 상태를 유지한다는 건 정찰, 매복, 습격 등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특히 적들이 인질을 잡고 있을 때 훨씬 더 쓸모 있는 물건이 될 것 같다.
‘그 기회가 다섯 번이라는 게 더욱 마음에 들기도 하고.’
찬영은 새로운 아이템에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만족한 후 시갈 끌 것 없이 31회 보상 받기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찬영은 반짝이고 있는 31회 보상받기를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이번엔 어떤 인물일까?’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의 버프와 인연 성립만으로도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단언컨대 이번에 만나게 될 전대 갓피스 또한 앞으로 있을 싸움에 큰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시작해 보자고.’
준비는 끝났다.
-출석 보상 31회 달성으로 인해 2차 캘린더를 완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새로운 소울 카드를 고르세요.
촤라락!
카드 움직이는 소리.
곧이어 붉은색, 파란색, 검은색이 나타났다.
‘없어.’
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하얀색 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온다는 보장이 없긴 했지만…….’
설마, 아예 리스트에서 빠질 줄은 몰랐다.
‘인연 성립 확률이 높을 카드를 고르려고 했는데…….’
이제껏 하얀 카드를 뽑았을 때 베아트리체와 라인쉐리어 같은 노티스 교단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예상했고 마음속으로 이미 하얀 카드를 고르기로 선택했다.
이유?
인연 성립으로 인한 결과물을 목표로 하기도 했고 이를 통해 베아트리체와의 영혼률을 더 높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녀와 1초라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눌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얀 카드가 배제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찬영은 앞에 놓인 카드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고민도 오래 가진 않았다.
‘원하는 경우의 수가 나오지 않은 이상 어떤 카드를 고르던 각기 다른 변화가 생기겠지. 그 변화가 뭐든 간에 이를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건 내 몫이게 될 거고.’
그러니 고민은 사치다.
찬영은 지체하지 않고 시야 가장 오른쪽에 놓여 있는 검은색 카드를 고르기로 결정했다.
‘이거.’
세 가지 중 검은색 카드를 고른 건 하얀색 카드를 가장 많이 갖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음양, 흑백처럼 무엇이든 균형은 중요하다.
흰색을 두 개나 가졌으니 이번엔 그에 반대되는 검은색을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결정했다.
츠츠츠!
그러자 검은 기류가 카드 주변에 일렁이더니 다른 카드들을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찬영은 카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마주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인쉐리어와는 다른 느낌이야.’
라인쉐리어는 베아트리체 같이 온화한 빛이 아니라 맹렬한 차가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검은색은 맹렬하지 않다.
오히려 라인쉐리어가 뿜어냈던 기세보다 고요하게 일렁인다.
‘하지만 차가워.’
잠깐 마음을 놓으면 단숨에 압도될 거 같은 냉혹한 차가움이 느껴지고 있다.
서늘한 칼날 같다.
한때 아슬란의 주인 프라이를 직면했던 날이 생각날 만큼.
‘점점 궁금해지는군.’
그 생각이 든 순간 찬영이 모르는 새 그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바뀌었다.
* * *
삽시간에 주위가 암전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찬영은 자신이 낯선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라인쉐리어 때와 같아.’
이미 이전의 경험한 때와 다르지 않다.
찬영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순응했다.
침잠한 채, 지켜볼 것이다. 검은 카드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갓피스로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움직인다.’
찬영의 의지를 벗어난 몸은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장소는 밤이 내려앉은 항구였고 길거리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정박되어 있는 배 그림자 뒤에서 새하얀 동공을 가진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그러자 입술이 찬영의 통제를 벗어나 달싹였다.
“……날 왜 찾지?”
노인이 대답했다.
“의뢰를 맡기고자.”
“날 찾아왔다면 이미 내 정체 정도는 파악하고 왔겠지. 그런데 궁금하군. 누가 내 거처를 말해 줬지?”
“루퍼가 없는 리번은 손쉽게 요리되더군. 알아내는 건 쉬웠지. 왜, 복수라도 하고 싶은가?”
“그럴 리가? 리번은 해체됐다. 그 구성원이 어떻게 되든 더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희한한 일이군. 길드를 버린 우두머리를 놈들은 어째서 그렇게 옹호했을까? 다들 널 지키려고 발버둥 치더구나.”
“상관없다. 그들이 어떻게 되건. 하지만……. 상관없어질 일이 네가 나를 찾아옴으로써 상관있는 일이 됐지. 너를 베고 고문한 뒤에 묻겠다. 날 거슬리게 하는 게 누군지.”
그 말이 끝났을 때, 찬영이 보고 있던 모든 게 멈춰 버렸다.
그렇게 정지된 시간 속에서 한 줄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기어 다닐 때부터 리번에 있었고 그때부터 어쌔신이 됐다. 그건 운명도, 숙명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
찬영은 서늘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번 카드의 주인공이 어쌔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가 계속됐다.
-이유는 없었다. 당시 지휘봉을 잡은 32대 루퍼는 고르고 고른 1백 명의 아이 중 한 명만이 살아남는 잔혹한 시험을 내렸고 난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내가 어쌔신이 된 이유다. 나중에 알았다. 그들이 다음 대 루퍼를 찾기 위한 여정 중 하나였다는 걸.
-그 후 난 루퍼가 되기 위해 살았다. 32대 루퍼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살인에 주저하지 않는 어쌔신이 됐다.
찬영은 그의 이야기에 몰입됐다. 아니 이미 눈앞에 투영되며 스쳐가는 그의 기억들이 찬영을 점점 동화되게 만들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난 룰을 바꿨다. 그들이 전통이라고 말하는 32대까지 내려온 룰을 전부 없앴다. 전통을 따르라며 악을 지르는 것들을 전부 처형했지. 혼자 조직의 절반을 죽였다. 따를 자들과 따르지 않을 자들을 구분해 또 죽였지. 그리고 룰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
찬영은 동화된 기억 속에서 그가 말하는 룰이 뭔지 선명히 알게 됐다. 루퍼를 만들지 않는 것, 즉 조직의 해체를 위한 기반을 쌓는 거였다.
-그 룰을 바탕으로 루퍼가 뻗치고 있는 모든 끈을 지우고 죽이고 말살시켜 버렸다.
찬영은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수많은 기억들 속에 한 부분을 들여다보며 깨달았다.
그건…… 한 여성 때문이었다.
33대 루퍼인 그는 오히려 죽음을 기다린 목표물을 처음 만났고, 그녀가 감정을 제거하라는 32대 루퍼의 아이를 갖고 있는 여자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찬영이 놀란 사이 루퍼의 독백이 이어졌다.
-그때 결심했다. 신이든 어쌔신이든 누군가의 죽음을 결정할 순 없다. 감정과 본능을 억제한다고 자부하는 그조차 자신의 과오를 지우고자 나를 보냈으니, 할 말 다한 셈이지. 그렇게 난 길드를 정리하고 떠났다. 날 따랐던 자들은 죽이지 않고 그냥 보내 줬다. 그들은 더 이상 루퍼의 어쌔신이 아니고 그저 갈 길을 잃은 영혼들일 뿐이었으니까.
그 독백을 끝으로 루퍼와 노인 사이의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워워, 진정하라고.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이곳에 왔을 것 같나?”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박된 수많은 배들 안에서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어쌔신들 수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인이 그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네가 리번과 닿은 끈을 제거할 때 건드린 어쌔신 길드가 제법 되더군. 널 찾았다고 하니 알아서들 도움을 건네더라 이 말이지. 아, 적당한 돈도 건넸지만.”
“큭큭…….”
“왜 웃지?”
노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우습지 않나?”
찬영의 눈에 달이 보였다. 이 순간 웃고 있는 건 찬영이 아니었다.
33대 루퍼인 베오였다.
“저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널 죽이겠다고 말한 줄 아는 것 같아 웃었다.”
“뭐?”
“날이 시원하니…….”
베오가 살의를 품었다.
“죽일 맛이…… 나겠군.”
그리고 다시 시간이 멈추면서 베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후 난 살아남았다. 내 목숨을 살린 건 라인쉐리어, 그였다.
-그가 내게 말하더군. 로그 길드와 어쌔신 길드가 한 길드에게 포섭되거나 섬멸되고 있다고. 로그 길드까지 그런 처지라니, 무척 의외였지.
-정보를 팔아넘긴 배신자는 죽이면 그만이지만 한 번 흘러간 정보는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로그 길드는 어쌔신 길드보다 훨씬 은밀하게 움직인다. 그런데도 궤멸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그냥 흘려듣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다. 날 죽이려는 자와 관련이 있냐고.
베오 루퍼의 독백은 그걸로 끝이었다.
동시에 보고 있던 항구에 서 있던 어쌔신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투명한 눈을 가진 노인까지 없어졌다.
그리고 찬영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고 찬영 또한 신체의 통제력을 찾았다.
그 순간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사람 형체의 그림자가 나타나 찬영의 정면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찬영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루퍼.”
-오래 기다렸다. 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그 질문에 찬영은 망설였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유가 있나?
“난 싸워야 하고 당신의 힘이 필요해.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
-간결한 대답, 마음에 드는군.
검은 그림자는 대답과 함께 찬영에게 스며들었다.
-말하라. 이제 베오 루퍼의 칼이 너를 도와 적의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다시 시야가 좁아지면서 주위가 암전됐다.
의식마저 고요히 침잠했다.
* * *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쉰 찬영은 침대에 누웠다. 몸 상태가 본래 컨디션도 아니었는데 새로 알게 된 전대의 갓피스와 조우까지 이루고 나니 몸이 잔뜩 무거웠다.
눈앞에 떠 있는 수많은 새로운 창들을 열어 볼 기운도 없을 만큼 한동안 멍해졌다.
‘죽겠군.’
라인쉐리어 때처럼 카드 뽑기 후 새로운 전대 갓피스의 영혼 동화가 이뤄질 땐 정신적 소모가 상당한 것 같다.
찬영은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손이 흠뻑 젖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방금 전 베오 루퍼와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은색 카드를 택한 게 잘했다 싶다.
‘인연 성립…….’
아마 저 수많은 창들 중에 장담컨대 인연 성립에 관한 창이 떠 있을 거다.
그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던가, 라인쉐리어가 자신을 구했다고 말이다.
‘희한한 일이야.’
그는 어째서 자신도 도망자인 처지에 어째서 베오 루퍼를 찾아갔을까?
‘무슨 이유였을까?’
찬영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제이나가 해 줬던 얘기를 떠올렸다.
‘제이나는 로그 길드들을 뉴 빌드가 궤멸시켰다고 했지. 그럼 그 얘기로 추정해 봤을 땐 분명 뉴 빌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결국 어쌔신 길드를 움직이고, 로그 길드를 궤멸시키며 흡수한 게 뉴 빌드 조직이란 것이다.
그럼 도망자인 라인쉐리어와 베오 루퍼가 손을 잡고 뉴 빌드와 대적했다는 건데…….
‘이렇게 되면 라인쉐리어와 베아트리체의 인연은 두 사람이 손잡은 후일까? 전이었을까?’
아직도 베아트리체와 라인쉐리어 사이가 어떤 사이였는지 모르는 찬영의 궁금증은 점점 깊어졌다.
아직 그의 새벽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