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츠츠츠!
폭발은 안개 속에서 소멸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긴 강한 인력이 안개와 주위의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
풀밭을 휩쓰는 폭풍에 제리가 다급히 소리쳤다.
“폭풍이다! 영감! 바람을 막아 줘요!”
“알아, 이놈아!”
보테는 마나를 전부 쏟은 3서클 마법을 시도했다.
“스톤 볼!”
땅이 균열을 일으켰다.
구구구구!
강한 울림과 함께 반경 3m의 둥근 구체 형태의 돌이 솟아올랐다.
그걸 본 제리가 동료들을 챙겼다.
“저 돌 뒤로 숨어!”
돌 뒤에 몸을 숨긴 워크 용병단은 전부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보테조차도 굳은 표정이었다.
제리는 힐끗 지수를 쳐다봤다.
“검사 양반.”
“네.”
“우린……. 안 죽을 거요. 너무 걱정 마쇼.”
그녀가 머리칼을 넘기며 대답했다.
“걱정 안 합니다. 걱정해 봤자 늦기도 했고.”
“어차피 늦은 거 걱정 안 한다고? 칼 쓰는 것만큼이나 배짱이 두둑하네.”
“꼭 그런 것뿐만은 아니에요.”
“그럼?”
“각오했어요, 죽는 것까지…….”
“같이 온 친구가 꽤나 믿음직스러웠나?”
“늘 그랬죠. 한 가지 아쉽긴 하네요.”
제리가 반문했다.
“뭐가?”
“처음 뵈었을 때도 지금도…… 매번 중요한 때엔 늘 그분께 모든 걸 걸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제리는 이어서 하려 했던 찬영과 언제 처음 봤냐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갑자기 바람이 잦아든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든 건 마냥 좋아할 만한 게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응축되었던 공기가 일제히 흩어졌기 때문이다. 끌어당겼던 공기의 양만큼 응축된 공기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엄청났다.
“온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퍼지는 바람이 성난 노도처럼 들판을 휩쓸며 삽시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크으윽!”
스톤 볼을 유지하고 있던 보테조차 버거운 표정이었다.
“스톤 핸드!”
보테는 마나를 주입하고 있는 자신이 날아가지 않게 2서클 마법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땅에서 손의 형태를 한 돌이 튀어나와 보테의 두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런!’
이게 최선이다.
더는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나 여유가 없다.
보테는 다른 동료를 챙길 틈도 없이 스톤 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마나를 전부 쏟아 부었다.
솨와아아!
스톤 볼에 달라붙어 있는 제리도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있는 힘껏 돌을 움켜쥐고 바람에 저항했다.
푸스스!
하지만 강한 풍압에 스톤 볼마저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건 제리가 쥔 돌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어!”
제리의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실렸다.
뭘 어찌할 새도 없이 쥐고 있던 돌이 부스러지며 지탱하고 있던 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 돼!’
돌을 놓친 제리가 강한 풍압에 떠밀려 날아갔다.
제대로 눈도 뜰 수 없는 폭풍 앞에 제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동거리며 휩쓸리는 게 고작이었다.
‘젠장, 이렇게 죽는 건가!’
그때 제리의 팔목을 누군가 빠르게 낚아챘다.
‘누가?’
그 손을 있는 힘껏 맞잡은 제리가 힘겹게 눈을 뜨며,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지수였다.
“흡!”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키며 제리를 다시금 스톤 볼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꽉…… 잡아요!”
그 도움 덕분에 제리는 스톤 볼을 향해 다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제리의 손이 다시 스톤 볼의 튀어나온 돌을 움켜쥐려 할 때였다.
콰콰콰!
갑자기 더 큰 바람이 더 밀려와 제리를 뒤로 밀어 버렸다.
“끄아아앗!”
그 여파에 지수도 잡고 있는 돌을 놓칠 뻔하며 덜컹였다.
‘팔이 빠질 것 같아!’
하지만 놓을 수 없다.
솔직히 어떻게든 놓고 싶지 않았다.
찬영과 갓피스들은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런 그들과 똑같이 행동할 순 없었으나 적어도 할 수 있는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파짓!
그러나 지수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녀가 움켜쥐고 있던 돌 또한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절반이나 부서졌다.
탓!
지수의 손이 미끄러졌다.
‘안 돼.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놓을 거야!’
지수는 눈을 부릅뜨고 남은 돌을 손끝으로 움켜쥐었다. 지탱할 게 얼마 남지 않아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버텨.’
지수는 쥐고 있는 나머지 돌의 부분까지 풍압에 부서져가는 걸 보았다.
그녀가 다급히, 손을 쥐고 있는 제리를 보았다.
실눈을 뜬 제리가 입을 벙긋거렸다.
바람이 너무 불어 확실히 볼 순 없었으나 짧은 말이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놔.’
그 말이었다..
‘그럴 일 없어!’
지수는 제리의 손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지만 제리는 그녀와 맞잡은 손을 그대로 풀어 버렸다.
‘안 돼!’
순식간에 미끄러지는 제리의 손을 놓친 지수는 황급히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탁!
날아가기 직전 지수에 의해 다시 팔목을 잡힌 제리가 지수를 향해 소리쳤다.
“놔! 놓으라고!”
지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자신이 쥐고 있는 돌을 쳐다봤다.
조금 있으면 돌은 부서질 거다.
날아가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지수가 쥐고 있던 돌을 놓았다.
탁!
순식간에 바람에 떠밀리던 찰나, 그녀가 제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손에 잡히는 대로 검을 뽑았다.
찬영이 건네준 그라인더였다.
지잉!
모든 마나가 실린 그녀의 검이 땅을 내리찍었다.
콰드드득!
땅을 헤집으며 깊숙이 박힌 그라인더와 함께 지수가 제리를 반쯤 끌어안은 채 뒤로 빠르게 밀려났다.
“포기하지 말아요!”
그녀의 외침에 제리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포기한대!”
제리가 화답하며 자신의 검을 뽑아 땅 위에 박았다.
푸욱!
훨씬 더 안정적인 자세가 됐다.
‘버틸 수 있어!’
아까보다 힘의 소모를 덜게 된 지수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견디는가 싶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미친…….”
제리가 갑자기 욕설을 뱉었다.
같은 곳을 노려보던 지수 또한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집채만 한 돌덩어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보테의 마나가 모두 소진되어 땅 위에 자리 잡은 스톤 볼이 일제히 부서진 것이다.
‘버티는 건 힘들어!’
제리는 이를 악물었다.
한데, 이어서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 보였다.
지수가 또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땅을 내려찍으며 제리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뭐, 뭐하는 짓이야!”
제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날아오는 돌을 노려봤다.
‘후우.’
그녀는 거친 호흡을 차분히 다스렸다.
그래, 아무리 봐도 이건 미친 짓이다.
그런 걸 안다.
알지만, 그래도……해야 할 것 같다.
이유?
그녀는 문득, 찬영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하잖아.
위험한 상황에도 이상하게 입가에 미소가 난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라인더를 꽉 쥐어 몸의 균형을 잡고 쏟아지는 풍압을 견뎌 냈다.
‘한 번에 베어 내야 해!’
제대로 베지 않으면 돌에 부딪쳐 날아갈 것이다.
쐐애애액!
결국, 돌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돌 앞에 마주 선 지수를 보며 제리가 소리쳤다.
“안 돼!”
하지만 지수에게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날아오는 돌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지수도 모르는 새,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푸른 빛의 실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실선은 그녀가 쥔 브라이트 소드와 그라인더를 함께 묶어가며 순식간에 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푸른 빛은 눈 깜짝할 새 날아오는 돌들까지 퍼져나가 그 돌들을 거미줄처럼 감싸 안았다.
아니, 감싸 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틈에 지수는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몸이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거 같은 기분이다.
-두려우냐?
그때 마음속에 누군가 물었다.
‘그래.’
지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두렵다.
바람에 밀리지 않고 균형을 잡은 채 저 돌을 벨 수 있는 힘을 일으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자칫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집중했다.
바람을 봤고, 돌을 봤고, 두려움을 직면했다.
-너는 이미 두려움을 베었구나. 장하다. 내, 너를 열세 번째 별 중 감청紺靑별을 이어 받을 후예로 인정할 것이다.
그 순간 지수의 등 뒤로 그녀의 키를 훌쩍 넘은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와 똑같이 검을 곧추세운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지배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그 부드러움과 무거움이 뒤섞인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아니,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츠츠츠츠!
뒤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푸른 실선 같은 기운에 닿는 모든 돌이 잘게 쪼개지며 비산한 것이다. 소리조차 없이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 모조리 잘려 나갔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지켜보던 제리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대, 대체…… 이건 또 뭐야?”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갓피스들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구전에서나 들을 법한 정령 같은 게 나타났다.
‘헛것도 아니야.’
헛것이라기엔 모든 게 너무 생생하다.
저 정령은 간이 떨릴 정도로 엄중한 위압감을 일으키고 있었고, 정령을 중심으로 반경 20m 일대의 바람이 전부 가라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제리는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 * *
그사이 지수는 바람이 잦아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방금 전 영혼이 이끄는 대로 신들린 듯 휘두른 그 검법.
그건 생전 처음 겪는 검법이었다.
하나,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검법이었던 것처럼 머릿속에 검법의 동작들이 하나둘씩 각인되기 시작하고, 그 동작에 따라 마나가 일체화되어 주위를 휩쓸었다.
그 희열은…… 이제껏 검을 수련하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일체감이었다.
‘검과 하나가 됐어.’
신검합일.
마치 검이 수족처럼 느껴질 만큼 몰아를 경험한 그녀는 자유로워진 것 같은 강한 해방감까지 느꼈다.
그 기분으로 두려움을 베고, 돌을 베고, 바람까지 베어 버렸다.
‘대체 이 힘을 가져다 준 자는 누굴까?’
그녀는 검을 늘어트리고 섰다.
마침, 마음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태청검법은 너로 인해 성장할 것이고, 네가 직면하는 모든 두려움을 벨 것이다. 극성에 이르면 너는 능히 두려운 것이 없게 되리라.
‘대체, 누구시죠?’
그녀가 물었다.
-이미 알 것이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릿속에 선명한 이름이 떠올랐다.
‘태청수류심법의 창시자, 유타…….’
-한때의 이름은 사라져 버릴 바람과 같으나 내가 남긴 유산은 네게 온전히 전해졌으니……. 나는 이제야 미련을 털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유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이제 태청중검太淸中劍의 영혼이 너의 검에 깃들었으니, 평생 나를 지켜 온 그 검이 너를 두려움으로부터 지킬 것이다. 이제 너와 직면하는 적들은 마음 속 두려움을 꺼내 보게 되리라.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몸을 지배하던 강렬한 힘이 사라졌다.
바람을 베던 그 일체감마저 꿈을 꾼 듯 전부 사라졌다.
대신 손에 자리 잡은 건 본래 쥐고 있던 그라인더가 아니었다.
형태는 그라인더와 흡사했으나 전보다 훨씬 예기가 감돌았고, 검신엔 푸른 빛이 선명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연히 달라진 건, 검신에 새겨진 웅혼한 필체의 글자였다.
“태……청중검.”
잊힌 열세 번째 별들이 사용하던 문자였으나, 유타의 유산을 이어 받게 된 그녀는 그 검에 있는 그 글자가 무엇이라 쓰였는지 정확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후 그녀가 비틀거렸다.
“커헉!”
그리고 입 안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각혈이 아니었다.
내장이 뒤엉키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끄흑!”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바닥을 뒹굴며 쓰러진 지수는 저 멀리,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제리를 희미해진 눈으로 바라봤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바람이 고요히 잦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