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135화
* * *
김지수는 피 웅덩이를 내려다봤다.
로레인은 방어보다 선공하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망루부터 해적들의 거처까지 타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고 해적들은 모조리 일망타진됐다.
“후우…….”
거친 숨을 내쉰 지수는 찬영이 선물해 준 검을 꽉 쥐었다.
손이 떨린다.
막상 싸울 때는 괜찮았는데 다 끝나고 나니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가씨, 제법 잘 싸우는데?”
“그래, 정말 끝내줬어!”
지나가는 용병들이 한두 마디씩 건넸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일이 늘 있던 일인 것처럼 평온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익숙해져야겠지.’
멀리까지 찬영을 따라오면서 이젠 이런 광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피를 보는 게 익숙해진다는 건 아직 쉽지 않았다.
“이봐, 괜찮아?”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로레인이 물었다.
로레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수를 살폈다.
“네, 괜찮습니다. 잠깐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뭘?”
지수가 대답 대신 가까이 쓰러져 있는 해적들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로레인은 금방 짐작했다.
이제껏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초짜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초짜군.’
싸울 땐 몰랐다. 워낙 잘 싸우고 검을 잘 다뤄서 숙련된 검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면은 아직 숙련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안 괜찮다는 얘기 같은데?”
“괜찮아질 겁니다, 아마도요.”
“내 경험상 쉽게 안 괜찮아져.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로레인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뭘 위해 싸우는지 매번 기억해야만 해. 싸울 이유가 없다면…… 싸우지 않는 게 좋겠지.”
“목적도, 각오도……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네. 다만 적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수가 강단 있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로레인은 의외였다.
‘그냥 초짜는 아니라 이건가?’
자신을 찬영이라고 밝힌 그 갓피스가 스승이라면, 꽤나 후계자를 잘 키운 거 같다.
“잘 배웠네. 그가 가르친 건가?”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을 배우진 않았지만 가르침을 많이 받았죠.”
특별히 검을 배운 건 아니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찬영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줬다.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는 로레인 씨는요?”
“나?”
“네. 무슨 목적으로 싸우죠?”
“나는…….”
로레인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주위를 정찰하고 돌아온 보테와 제리가 돌아왔다.
“대장!”
“왜?”
“밖에 좀 나가 봐야겠는데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로레인과 지수가 거처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안개 속 저 멀리에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지수가 눈을 부릅떴다.
“저긴?”
“그래, 당신네 갓피스가 향한 첨탑이야.”
“가야겠어요.”
“간다고?”
“네.”
“좋은 생각이야. 우리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로레인이 보테를 불렀다.
“영감.”
“왜?”
“애들더러 장비 다시 챙기라 해. 계속 빚만 지고 있을 순 없잖아? 우리가 머무는 마을인데.”
“알았다.”
보테가 움직이자 로레인이 지수를 쳐다봤다.
“준비됐지?”
지수가 늘어트린 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대답은 아까 한 걸로 칠게요.”
로레인이 씩 웃었다.
* * *
“헉……헉!”
루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신체 재생 속도가 몸이 베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갓피스는 전부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났지?
갑자기 튀어나온 갓피스라는 놈에게 수치스럽게 당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우습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신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신이건만!
루크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는 안개 속에 고함쳤다.
“감히! 신이 될 내게, 손을 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찬영이 나타났다. 안개를 뚫고 나온 찬영이 무릎으로 루크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몸이 불타오르며 불꽃 소용돌이가 손짓과 발짓에 실렸다.
퍼퍼퍼퍽!
찬영은 선붕파와 초열봉황익을 연달아 펼쳐 루크의 온몸에 공격을 꽂아 넣었다.
루크는 제대로 반항도 못했다. 가슴과 얼굴 왼쪽이 함몰되고 오른쪽 허벅지도 부러졌다.
루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틀거리는 것뿐!
쿵!
연달아 진각까지 밟은 찬영이 주먹에 뜨거운 공기를 실었다.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강력한 일권이 루크의 왼쪽 가슴을 타격했다.
퍼억!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루크의 몸이 충격에 떠밀려 안개 속으로 날아갔다.
루크는 심장까지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혼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했다.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몸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재생력이 떨어질수록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끄아아악!”
한계치를 넘어선 고통으로 인해 결국 루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소처럼 돌진했다.
얼마나 빠른지 찬영이 달린 곳은 안개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빙판을 미끄러지듯 달리던 찬영이 허공에 몸을 날리자, 이번엔 붉은 수레바퀴가 그의 발을 감쌌다.
펑! 펑!
찬영은 허공을 밟으며 날아가는 루크의 몸 위로 몸을 날렸다. 찬영의 손에서 휘둘리는 아슬란.
‘북평검법.’
선회하며 휘둘린 혹한의 칼날이 루크를 단칼에 베었다.
쿠당탕!
허리가 갈라진 루크가 날개를 필 생각도 못하고 널브러졌다.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며 숨만 겨우 붙어 있는 루크에게 찬영이 다가섰다.
“내가 말했지?”
공기를 짓누른 차가운 분노가 찬영의 목소리에 실렸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 말과 동시에 아슬란의 검이 루크의 이마 위에 박히며 찬영의 광화 상태가 해제됐다.
-인식된 올드 원의 주문이 사라졌습니다. 근처에 있는 차원의 돌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이건?’
찬영은 루크의 머리 뒤에 박혀 있던 차원의 돌과 방금 뜬 창을 번갈아 쳐다봤다.
‘올드 원의 주문? 그럼 처음부터 루크의 차원의 돌은 흡수할 수 없었던 거였군.’
그게 어떤 주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올드 원과 관련 있는 뉴 빌드 측에서 만든 주문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주문엔 말론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 설마 저것도……?’
찬영이 점점 회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집채만 한 돌을 쳐다봤다.
* * *
첨탑은 이제 겨우 골조만 남아 있었다.
찬영이 다시 그 근처로 돌아오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글로리가 다가왔다.
“저 돌이 등장한 이후 접근해 보려 애썼소. 하지만 저 주변에 강한 결계가 쳐져 있더군. 그 덕에 몇 번이나 땅을 굴렀지.”
흙먼지가 묻어 있는 글로리의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찬영이 고마워했다.
“애쓰셨습니다.”
싸우는 사이 글로리는 허공에 떠 있는 돌에 뛰어들었고 그 주위에 쳐 있는 결계로 인해 튕겨 나간 것이다. 애초에 비행 기술 하나 없는 글로리가 다가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젠 제가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찬영이 땅을 박찼다.
‘에어 펀치!’
일정 체공을 주고 염왕초혼심법을 기반으로 한 진공나찰보를 펼쳐 돌에 접근했다.
차원의 돌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게 보여, 손을 뻗은 순간.
-인식된 올드 원의 주문이 차원의 돌이 가진 힘을 방출시키지 않고 응축시키고 있습니다. 차원의 돌은 15분 후 폭발합니다. 그때까지 주문을 해제하지 못하면 차원의 돌은 소멸됩니다.
강한 힘이 찬영의 손을 타고 쭉 밀려 들어왔다.
낯설고 음울하며 강력한 기운이었다.
찬영은 그 힘에 저항하며 눈을 부릅떴다.
치치치칙!
그러자 찬영의 몸 주변에서 그도 자각하지 못한 황금빛 광채가 일렁였다.
돌에서 뻗어 나온 보랏빛 기운은 찬영을 빠르게 뱀처럼 휘감으며 그를 잡아당겼고, 찬영은 그 힘에 저항했다.
그때 어디에서인가 따뜻하며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베아트리체였다.
-올드 원의 기운은 당신을 집어삼키려 합니다. 저항하세요, 견디세요!
그러자 소모됐던 신성력이 충만하다 못해 그 이상으로 차올랐다.
-나, 라인쉐리어가 인정한 기사여. 이대로 무너질 텐가? 마음속 믿음을 따르라. 그 믿음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소란 떨 것 없어.’
찬영은 눈을 부릅떴다.
“포기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어서 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보랏빛 돌이 더욱 빠르게 회전했고 찬영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
“저건, 또 뭐야?”
안개는 완전히 걷혔을 때쯤 김지수와 워크 용병단도 첨탑에 도착했다.
“저길 봐라!”
보테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폭삭 내려앉은 첨탑 위를 향했다.
보랏빛 암석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고, 찬영은 그 앞에 뜬 채, 돌에서 흘러나온 기류에 온몸이 묶여 있었다.
지수가 소리쳤다.
“양찬영 각성자님!”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 따윈 없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지수가 로레인을 쳐다봤다.
“구해 내야 해요!”
“아니!”
로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대답에 지수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껏 봐 온 로레인은 두려워서 물러날 인물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나요?”
“있지. 저 친구가 괜히 올라가진 않았을 것 아냐? 혹시 우리가 돕는 게 방해되는 꼴이라면?”
지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로레인이 물었다.
“뭐라도 아는 것 있어? 혹시 저 돌이 갓피스와 연관이 있는 건가?”
“차원의 돌일 거예요.”
“차원의 돌?”
“네.”
차원의 돌이 있다는 건 더 이상 브라이트만 알던 극비가 아니다. 알폰의 많은 이들이 유혹의 돌로 불린 차원의 돌에 대해 알고 있다.
그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지수가 로레인에게 차원의 돌에 관해 간략이 설명해 줬다.
로레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하……. 아버지는 분명 그 돌에 관한 정보가 왕국의 소수만이 아는 극비 정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요?”
“아, 별거 아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저 돌이 그 차원의 돌일 거라는 거지?”
“제 생각이에요.”
“그럼 그 돌을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저 친구고? 맞아?”
“예.”
“근데 흡수가 안 된단 말이지?”
그녀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건 보테밖에 없다.
“영감, 어떻게 생각해?”
함께 이야길 듣고 있던 보테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영감도 몰라?”
“전혀. 이런 건 처음이다.”
보테도 두 손을 다 들어 버렸을 때쯤.
제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또 뭐야?”
“뭔데 그래, 또?”
로레인이 제리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러고 난 후 로레인도 똑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뭐야?”
로레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장비를 짊어지고 오고 있는 토끼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 같이 걷는 토끼 사람.
몬스터인 줄 착각한 제리가 소리쳤다.
“무기 들어!”
용병단이 일제히 무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들려온 목소리는 용병단을 혼란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긴장을 푸시오. 나 역시 그대들과 같은 편에 서 있소. 갓피스가 나를 데려왔지.”
글로리가 돌과 함께 있는 찬영을 가리켰다.
그러자 용병단이 전부 로레인을 쳐다봤다.
“나 보면 답이 나오냐? 일단 무기들부터 거둬! 몬스터 아니고 같은 편이라잖아.”
로레인이 버럭 소리치자 용병단이 쭈뼛거리며 무기를 거뒀다. 글로리도 훨씬 안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고맙소.”
“나 참, 살다 살다 대륙 공용어를 입에 담는 토끼는 처음 보네.”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영혼이 다를 뿐, 그릇은 비슷하게 생겼으니 말이요.”
“말도 잘하네.”
“언제까지 놀랄 참이요? 궁금한 건 다 말해 주겠소.”
“그럼, 아까 질문이나 대답해 보셔.”
“좋소, 우린 대륙 공용어를 아는 게 아니오. 종족 특성상 모든 영혼과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또 질문 있소?”
“아니, 그 정도면 더 물어볼 것도 없어. 근데…… 둘은 서로 전혀 몰라?”
로레인이 지수를 쳐다봤다.
“그쪽이 저 친구와 가장 가까운 동료잖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생각 난 것이다.
‘아! 대리님이 양찬영 각성자님은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지. 그럼 저분이?’
이제야 글로리가 어디서 왔는지 깨닫게 된 지수가 스스로의 기억에 놀라며 소리쳤다.
“르리에!”
“맞소, 빨리 알아주어 고맙지만……. 인사는 이 정도로 끝내고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부터 푸는 게 어떻겠소?”
글로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찬영을 올려다봤다.
느낌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