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챙!
아슬란에 부딪쳐 날아간 건 투척용 창이었다.
푸욱!
빙글거리며 날아가 땅에 박힌 창과 함께 시미터가 정수리로 날아왔다.
쐐액!
찬영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그래비티 필드 20회 중첩重疊’
중력 속박이 반경 10m를 무겁게 짓눌렀다.
가중된 중력에 의해 날아오던 시미터가 느려졌다.
순간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속박이 안 돼?’
상대는 속박을 이겨내고 계속 시미터를 휘둘러 왔다.
‘어쩔 수 없지. 느려진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찬영은 상대가 느려진 틈을 노려 아슬란을 휘둘렀다.
츠즈즈!
시미터를 들고 있는 자가 반으로 나뉘어져 통째로 흩어졌다.
코란이었다.
‘환영 마법?’
그때, 숨어 있던 진짜 코란이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슬란을 회수하기도 전에 날아온 은밀하고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끝이다!’
코란은 확신했다.
그러나 찰나 간 마주친 찬영의 눈동자엔 패배감이나 당황스러움 따위가 없었다.
‘예상했다고?’
코란은 불길한 직감을 지우지 못했다.
‘당장 놈의 등이 보이는데……. 제길!’
결국 코란이 이를 악물었다.
직감이 평생 목숨을 구해 왔다.
무시할 수만은 없다.
쐐액!
시미터를 선회시켜 정수리 앞에 세웠다.
그때, 표창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어, 언제?’
파공음은커녕 다가오는 느낌도 가지지 못했다.
까강!
코란은 멈추었던 시미터로 재빨리 표창을 튕겨 낸 후 두어 걸음 물러났다.
비로소 찬영의 얼굴을 보게 된 코란의 눈에 놀람이 서렸다.
“……넌?”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몰래 빠져나온 건가?”
코란은 쇳소리 긁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찬영이 아슬란을 겨눈 채 대답했다.
“아니.”
“그럼?”
“대놓고 나왔지. 네게 악감정을 품은 친구가 많더군. 그들이 적당히 도와주기도 했어.”
뿌드득!
코란이 이를 갈았다.
워크 용병단이 언젠가 뒤통수를 칠 줄은 알았다. 몰랐다면 거짓말일 거다.
“그래, 네 정체가 뭐든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전부 죽이고 싶었는데 적당한 명분이 생겼다. 눈앞의 놈부터 죽인 뒤 워크 용병단까지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이날만 기다렸다. 말론 님도 더는 말리지 않으시겠지!”
코란은 허리춤에 매단 한 자루 쇼트 소드를 꺼냈다. 쇼트 소드와 시미터를 각각 양손에 집어 든 코란이 찬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두 번의 요행은 없다. 너와 관계가 있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죽여 주마. 아니지,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만들어 주지.”
“해 봐, 할 수 있으면.”
찬영이 아슬란을 고쳐 쥐었다.
그러면서 아까의 공방전을 떠올렸다.
우선 놈은 환영 마법을 쓴다. 그게 어떤 마법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테는 놈이 마법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방금 전의 그 환영 마법은 아티팩트거나 혹은…… 놈이 품고 있는 차원의 돌의 힘 덕분일 수도 있다.
라쿤 해적들을 부활시켰던 힘, 마나를 소모시켰던 디스펠 결계의 힘 등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차원의 돌이 가진 쓰임새는 꽤나 다양해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괜찮다.
놈은 차원의 돌을 갖고 있고, 렌즈는 환영 마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방금 전 일부러 허점을 보여주고 아쿤다의 표창으로 기습을 가한 것도 그 덕분이다.
‘정작 놈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코란이 다시 쇄도했다.
살의가 느껴진다.
놈은 이제껏 마을에 속한 누구든 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놈이 멋대로 날뛸 수 없는 날이다.
‘그래비티 필드 50회 중첩重疊.’
구궁!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높아진 중력에 의해 땅이 갈라졌다.
“크으윽!”
코란이 한껏 올라간 중력에 갇혔다.
“어림없다!”
중력에 결박된 찰나, 코란의 전신이 보라색 불꽃으로 타올랐다.
저벅저벅.
“이상한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중력 결계가 무효화된 건 순식간이었다. 중력 결계를 무효화시킨 보랏빛 불꽃이 코란의 몸 주위에서 이글거렸다.
찬영은 더 공격하지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이제야 알겠군, 놈이 내 그래비티 필드를 어떻게 무효화했는지.’
코란의 동공에 보랏빛 보석이 번들거렸다. 두 눈에 차원의 돌을 이식한 게 틀림없다.
마법을 차단하는, 즉 디스펠 능력이 있는 신체였던 것이다.
“잔재주라고 말한 것치고는 너무 금방 네 능력의 바닥을 보인 것 같군.”
찬영의 반응에 코란이 이를 갈았다.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 널 전력으로 부숴 주마.”
“언제까지 입으로만 떠들 거지?”
찬영의 도발에 코란이 이를 갈며 쇄도했다.
쐐액!
코란은 시미터와 쇼트 소드를 자신의 가슴께에 엑스 자로 교차하며 달려왔다. 코란은 두 무기를 번갈아 휘두르며 찬영을 몰아붙였다. 안개 속에서 기습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예리해진 공격이었다.
찬영은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방어했다.
‘무기엔 디스펠 능력이 전해지지 않나 보군.’
아슬란에 흘러 들어간 오라는 조금의 균열도 없다.
만약 놈의 몸에 작용하고 있는 디스펠이 무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아슬란의 오라는 당장 사라졌어야 맞다.
‘어디까지 신체에 한정된 디스펠이라는 얘기겠지.’
찬영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코란은 그사이 점점 여유를 찾으며 여유 있게 웃기까지 했다.
“크큭! 어디 한 번 아까처럼 입을 놀려 봐라!”
채채채챙!
코란의 쇼트 소드가 어깨를 가르고 시미터가 찬영의 목을 베려 했다. 찬영은 스툼으로 쇼트 소드를 쳐 낸 후, 아슬란을 일자로 세웠다.
펑!
암흑 마력인 코란의 오라가 아슬란과 부딪쳐 충격파를 일으켰다.
휘이잉!
강한 풍압이 주위를 휘몰아치며 찬영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와중에도 코란을 노려보는 찬영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불리한 순간임에도 찬영은 늘 그랬듯 차분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찬영의 장점이자 최고의 능력이었다.
“도망치는 꼴이 꼭 꼬리에 불붙은 쥐새끼 같구나!”
계속듣는 도발에도 찬영은 방어에만 치중했다.
찬영의 계속되는 방어에 공격만 하는 코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찬영은 한 번의 공격도 없이, 묵묵히 방어 태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자 지쳐가는 건 코란 쪽이었다.
‘네놈이 움직이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움직이게 해 주지.’
검을 부딪친 반동으로 뒤로 훌쩍 물러난 코란이 빠르게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코란을 보며 찬영은 렌즈를 작동시켰다.
한데 이제껏 하나의 점으로만 포착되던 목표물이 여러 개로 늘어났다. 렌즈에는 코란의 위치가 네 군데나 표시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진 환영과 실체가 확실히 구분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아니다.
‘그게 아니면…… 전부 실체이거나.’
찬영은 아슬란을 세운 채 호흡을 다스렸다. 코란을 표시한 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온다.’
시미터가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아슬란을 내려찍자마자 뒤에서 쇼트 소드가 날아왔다.
찬영은 스툼을 휘둘러 받아쳤다.
쐐액!
이번엔 무기와 사람을 통째로 벴다.
‘환영?’
코란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덩달아 렌즈에도 표적이 사라졌다가 다시 늘어난 게 확인됐다.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실체인 줄 알고 베었는데 또 다시 환영이 나타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렌즈가 오작동을 한 거라고?’
하지만 찬영은 생각을 더 잇지 못했다.
채채채챙!
다시 쏟아진 공세를 막기 위해 검을 휘둘러야 했던 것이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검을 내려놓으면 너를 말론 님께 바쳐 주마. 실험이 끝나면 이성 대신 본능이 널 집어삼킬 거다. 그리고 우릴 위해 싸우겠지.”
코란의 목소리가 안개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찬영은 침묵했다.
‘안 끝났어.’
놈의 말대로 실험체가 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해 내야만 한다.
‘실체인가? 환영인가?’
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렌즈는 실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베고 보니 모든 게 환영이다.
‘그럼 렌즈가 틀린 건가?’
쐐액!
순간, 사각지대에서 또 시미터가 날아들었다. 강한 오라가 응집된 일격을 튕겨 낸 찬영이 한 발 더 앞서가면서 코란을 베었다.
‘설마, 또?’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뒤편에서 시미터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환영을 베며 눈을 확인했다.
‘놈의 본체라면, 보랏빛이어야 할 텐데……?’
찬영은 호흡을 다스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환영마저 놈의 일부라면?’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수차례 환영을 베었다. 그런데 놈의 움직임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많이도 벴다.
하지만 네 개나 되는 목표물들은 베었을 땐 잠깐 없어졌다가 다시 네 개로 늘어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실체라고 표기하는 렌즈.
‘이유가 뭘까?’
안개 속에 돌아다니는 붉은 표적들을 노려봤다.
갈수록 렌즈의 능력에 대해 조금씩 의심이 생긴다.
하지만 의심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
적은 그대로였다. 렌즈를 뺀다고 한들 상황이 좋아질 리 없다.
그럴 바엔 막연한 의심보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믿는 게 낫다.
‘이제껏 단 한 번이라도 장비가 역량을 다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이번에도 아닐 거다. 어쩌면…… 렌즈는 맞게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찬영은 생각을 바꿨다.
의심을 버리고 렌즈를 믿는다.
렌즈가 진짜라면, 왜 렌즈는 환영을 실체라고 말했을까?
그것에서 출발했다.
‘생각해 보면 실체와 환영을 구분해 놓고 선뜻 움직이지 못했던 건 나야. 렌즈는 자기 일을 정확히 하고 있었던 거지.’
찬영이 가슴으로 날아온 쇼트 소드를 걷어 낸 후 아슬란으로 놈의 환영을 세로로 갈라 버렸다. 재차 환영이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났다.
‘그래,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끊긴 생각이 다시 이어졌다.
‘렌즈는 차원의 돌이 뿜어내는 힘을 정확히 표기한다. 만약 코란의 본체와 연결된 환영에서도 차원의 돌이 뿜어내는 힘이 들어 있다면?’
찬영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쓸데없는 생각이 사라지자 한 가지 확실한 생각이 스쳤다.
단언컨대 놈의 본체가 저 중에 있다!
그럼 더 망설일 게 없다.
‘블링크.’
순식간에 허공에 나타난 찬영이 안개에 덮인 지상을 내려다보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네 개의 붉은색 표적들이 방금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홀리 스트라이크.”
콰쾅!
커다란 황금빛 망치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표적들이 전부 사라지며 단 한 개만이 남았다.
“블링크.”
다시 그 표적으로 다가간 찬영의 눈에 코란이 들어왔다. 방금 전 일격에 몸통이 절반쯤 뭉개진 코란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6등급 신성 마법이다.
놈이 견뎌 낼 리 없다.
“쿨럭…….”
비틀거리는 코란의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시, 신성력을 감추고 있었구나. 크으윽……!”
“감추지 않았어.”
진짜다.
그저 확신이 없었다.
전부 환영일까 봐.
애초에 놈의 본체가 반드시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쉽게 끝날 전투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렌즈를 의심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본체는 있었고, 예상한 대로 환영은 본체와 똑같이 돌의 힘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큭. 그래, 아무렴 상관없다. 난 내 할 일을 마쳤으니. 그럼 잘 가라.”
“뭐?”
“잘 가라고.”
불길함이 찬영의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코란이 외쳤다.
“말론 님의 권능에 형님께서 부활하실 때가 왔다.”
찬영이 뭘 할 새도 없이 코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한데 그냥 붉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강한 바람이 놈의 주변에 불었다.
다음 순간 코란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폭발해 버렸다.
콰콰쾅!
그 폭발은 반경 30m까지 휘몰아치며 주위 땅을 모두 헤집고 불기둥을 일으켰다.
* * *
푸스스!
온몸에 뒤집어쓴 먼지를 털어 내며 찬영이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폭발은 강했다. 하지만 디푸스 갑옷과 공진이 가진 방어력에, 슬롯에 넣어 둔 프리징 스킨까지 방어벽을 세워 주었다. 프리징 스킨을 슬롯에 넣어 둔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찬영은 폭발 반경 밖에서 고고히 서 있는 첨탑을 바라보았다.
첨탑은 여전히 고요하다.
이젠 몬스터도 앞을 막아서는 존재도 없다.
오로지 주변엔 첨탑뿐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체 저 안에서 뭘 하기에 말론은 모습을 비추지도 않는 것일까? 루크를 빼고 코란과 몬스터만 싸우게 한 이유와 관련 있는 걸까?’
그리고 코란이 마지막으로 외쳤던 그 말…….
‘그건 무슨 뜻이지?’
모르겠다.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찬영은 시체까지 소멸된 코란이 마지막으로 남긴 차원의 돌을 흡수한 후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전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갈색 첨탑 안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점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