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화
지수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를 보이자, 로레인이 손사래를 쳤다.
“전혀 모르는 눈치네. 아니면 됐어.”
지수도 그에 관해 더 질문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각성자님이 달리 남긴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당신에게?”
“네.”
“없었어. 합류하라고 한 게 다야.”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상황 파악에 필요한 얘기는 로레인과 통신하며 모두 들었다.
“그나저나, 당신들 어디 출신이야? 오딘 제국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묘하게 다른데? 진작 그 사람한테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물어보게 되네.”
“오딘 제국이요?”
“그래, 오딘.”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기에 지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딘 제국이 신성 왕국과 인접한 또 다른 나라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한데 오딘 제국의 사람들이 동양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런 건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아뇨, 저희는 오딘 제국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대답이 의외였는지 로레인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아니라고?”
“네.”
“그럼 어디 사람인데?”
“말하자면 길어요. 짧게 설명할 일도 아니니, 나중에 말씀드리죠.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지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로레인도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산더미 같은 질문이야 나중에 최후의 성전에 대한 내용과 함께 물어보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로레인이 곧바로 망루를 벗어났다.
* * *
그 시각, 찬영은 몬스터를 쓰러트리며 마을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목표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보조 장비가 없었다면 더 힘들었겠지.’
찬영은 힐끗, 미니 맵을 살폈다.
어디쯤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붉은 점이 보인다. 이것으로 현 위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렌즈를 통해 목표물에 제대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체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 왔군.’
벌써 열 번째 목표물이다.
사실 15m 반경 안의 몬스터들를 처음 처리할 때만 해도 이 정도 규모일 줄은 몰랐다.
한데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이건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가던 걸음을 멈춘 찬영이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홀리 웨폰.’
구현된 건 수십 개의 황금빛 검.
쐐액!
그 검들은 찬영의 손짓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지금!’
찬영은 주저하지 않고 그 검들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푸욱! 푸욱!
검들이 일제히 땅에 박혔다.
-키에엑!
상처 입은 놈들이 일어났다.
숫자는 총 다섯, 렌즈가 보여 준 그대로다.
‘……땅에도 숨어 있을 줄이야.’
이건 생각도 못했다.
지상에 움직임이 없다고 해서 몬스터가 없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몰랐을 거야.’
보테, 로레인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진작 말해 줬겠지.’
단언컨대 말론이라는 마법사의 소행일 게 분명했다.
차원의 돌을 통해 조종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땅 속에 숨겨 둔 것이다.
‘로레인 일행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겠지.’
만약 용병단이 자신 없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들은 꼼짝 없이 호랑이 굴에 갇히게 된 꼴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키이익!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피해야 해!’
한발 먼저 고개를 젖힌 찬영의 앞으로 날카로운 손톱이 지나갔다. 신속히 스쳐간 몬스터를 살펴보았다.
-케이브에서 태어난 젤럿
-가치 : 6,200
‘즉사하지 않았나 보군.’
느껴지는 숫자는 두 마리, 총 다섯 마리 중 세 마리는 즉사했고 두 마리가 버텨 낸 모양이다.
끈질긴 생명력이다.
‘곧 끊어질 테지만.’
또 다시 손톱이 날아왔다.
하지만 여러 번 놈들과 상대한 경험 덕분일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미끼다!’
단언컨대 정면에 보이는 젤럿에 아슬란을 휘두르는 순간, 다른 한 놈이 기습해 올 것이다.
‘대비해야 해!’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쐐액!
날아간 아슬란의 검날이, 부딪친 젤럿의 손톱을 단숨에 동강 내 버렸다.
당연한 일이다. 강화된 아슬란의 날카로운 칼날은 젤럿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콰직!
그때 예상대로 발밑에서 또 한 마리의 젤럿이 튀어나왔다.
집단성이 빛을 발한 완벽한 타이밍의 기습.
그러나 아슬란은 이미 정면의 젤럿을 통째로 베어 버리고 있었다. 검 끝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상황!
아슬란의 공격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발밑까지 접근한 젤럿보다 빠르진 않다.
-키에엑!
젤럿이 지체 없이 다리를 물어왔다.
당장, 다리가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차폐遮蔽.”
순간, 찬영의 입이 달싹였다.
콱!
젤럿이 물기 직전 강력한 신성력이 찬영의 다리를 감쌌다.
갓피스였던 라인쉐리어의 권능이다.
-키이익! 키이익!
젤럿이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찬영의 다리에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물리는 건 한 번이면 족해!’
찬영이 회수한 아슬란으로 젤럿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콰직! 서걱!
젤럿이 입을 채 닫기도 전에 쪼개졌다.
툭!
쓰러진 놈의 시신과 함께 찬영은 주변을 확인했다.
‘끝인가?’
15m 반경 안에는 더 이상 젤럿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렌즈의 반경이 닿지 않는 땅속에 몬스터가 얼마나 더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더 뒤져 봐야 해.’
마을 주변을 그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니까.
‘말론은 그다음 문제고.’
찬영이 다시 땅을 박찼다.
* * *
찬영은 렌즈에 표시되는 젤럿들을 쉴 새 없이 베어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외곽에 당도했음을 깨달았다. 안개 속에서 건물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저건?’
5층 높이의 갈색 첨탑이었다.
‘보테가 말했던 말론의 거처가 여기인가 보군.’
저 갈색 첨탑이 말로만 들은 말론의 실험실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몬스터 떼가 입구를 띠처럼 두르고 있지는 않겠지.’
한 겹만 두르고 있는 게 아니다.
대략 사십 마리의 몬스터가 세 겹으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히 마흔여덟 마리다.
‘웬만한 던전 수준이군.’
대체 첨탑 안에 뭐가 있다고 이만한 규모의 몬스터 떼를 마을 땅 속 곳곳에 두더지처럼 숨겨 놓은 걸까?
‘혹시…….’
찬영은 문득 보테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몬스터를 매번 산 채로 포획해 넘겨줬다고 했지.’
보테는 어떤 실험을 강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가능한 일일지도…….’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몬스터와 관련한 어떤 실험이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거라면?
이를 경계하기 위해 몬스터 떼를 깔아 둔 거라면?
‘그럼 말이 돼.’
느낌상 쉬운 싸움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기다릴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찬영은 지체 없이 첨탑의 대문을 향해 달렸다. 이번엔 홀리 웨폰을 쓰지 않을 작정이다. 홀리 웨폰으로는 놈들의 견고한 가죽을 뚫기 힘들다는 걸 아까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타타타탁!
그사이 북빙진기를 기반으로 시전한 광속섬뢰보는 극대화된 속력을 일으켰다.
쐐액!
눈 깜짝할 새 첨탑의 대문에 도달하자, 땅에 자리 잡고 있는 젤럿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밖으로 내밀기 시작했다.
지반의 흔들림을 느낀 걸 테다.
-키이익!
-키에에엑!
콰직!
땅을 뚫고 나온 젤럿들이 찬영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됐다.’
렌즈를 통해 놈들이 전부 달려오는 것을 확인한 찬영은 첨탑을 두르고 있는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쾅!
젤럿 떼는 찬영을 뒤쫓으려 담벼락을 박살내며 몰려들었다.
-키에엑!
그런데, 달리던 찬영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블링크였다.
찬영에게 뛰어든 젤럿 떼가 허탕을 친 건 당연했다.
콱! 콱! 쿠당탕!
젤럿들이 서로 부딪치며 땅을 나뒹군 후 일제히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크르륵?
-키이익!
흥분으로 달아오른 젤럿들이 적의를 주체하지 못하고 머리를 땅에 쿵쿵 박아 대며 찬영을 찾았다.
그러던 중 한 젤럿이 다시 달렸다.
제일 먼저 찬영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잔뜩 신난 젤럿이 앞으로 치달렸다.
하지만 젤럿을 반긴 건 찬영이 아니었다.
쐐액!
화살이었다.
콱!
적중당한 젤럿이 날아온 화살의 속도에 견디지 못하고 몸이 꺾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이이…….
그 자리에 즉사한 젤럿.
-키에엑!
놀란 젤럿들이 비명을 질렀다.
집단성 때문이다.
놈들은 같은 무리에 속한 개체가 죽자 위험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위험이 안개에 가려져 명확히 보이지 않자, 그 능력은 오히려 혼란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키에엑!
-키에엑!
놈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분명 안개 속에서 인간 냄새가 계속 자리를 옮기고 있는데, 쫓아갈 만하면 냄새가 사라지고 화살이 날아왔다.
쐐액!
화살은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콰직!
강한 파괴력을 가진 화살은 이번에도 머리를 꿰뚫으며 젤럿 한 마리를 즉사시켰다.
-키이익!
죽어 가는 젤럿이 경련을 일으키며 계속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머리가 반쯤 쪼개진 상태로 일어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틈에 또 다시 날아드는 여러 발의 화살들.
쐐액! 쐐액!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젤럿들은 하나둘씩 바닥을 뒹굴었다.
놈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늘 안개 속에서 포식자의 역할을 하던 젤럿들은 오히려 사냥감이 된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키이…….
젤럿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다급히 흩어졌다.
뭉쳐 있는 게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깨닫고 흩어진 것이다.
또 다시 집단성이 빛을 발한 전략적 선택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저벅.
찬영이 방금 전 젤럿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만한 정예 병사들 수준이야.’
위기 속에서 퇴각을 선택하는 건 지능이 있는 생물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확실히…….
가면 갈수록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같은 가치를 갖고 있어도 지능적인 면이 높거나 혹은 다른 면의 우수성이 있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 같았다. 찬영은 젤럿들이 흩어지는 것에 놀라면서 시선을 돌렸다.
렌즈와 미니 맵의 통해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눈에 훤히 보인다.
반경 15m 안에서 움직이는 몬스터라면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나호스의 활의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화살촉이 안개 속을 향했다.
웅! 웅!
그러자 찬영에게서 흘러간 기운이 하나둘씩 철제 화살에 응축됐다.
이제, 이 화살은 단순한 철제 화살이 아니다.
나호스의 활을 통해 두 가지 효과가 부여됐다.
먼저 윈드 커터가 중첩됐고, 세 개의 관통 10급 보석 효과로 인해 관통 확률이 0.5%씩, 총 1.5%가 증강됐다.
‘마무리를 지어야지.’
여기에 염왕초혼심법을 통해 일으킨 마나까지 주입시켰으니…….
탕!
찬영이 시위를 놓았다.
로버트와 계속 훈련해 온 나이프 샷이다. 날카로워진 화살엔 나이프 샷의 파괴력까지 얹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사중 중첩 화살이다.
지잉!
날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붉은 표적이 또 하나 사라졌다. 이제 미니 맵에 표시된 붉은 점은 여덟 개.
놈들까지 정리하고 난 후엔…….
‘너다.’
찬영이 첨탑을 올려다봤다.
* * *
-키에엑!
기어코 마지막 젤럿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찬영도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빗나갔어.’
계속 즉사시키던 걸로 봐선 화살의 위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젤럿은 즉사시키지 못했다.
계속 같은 중첩 방식을 사용했으니 파괴력의 문제는 아니다.
‘조준이 흔들렸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아직 부족해.’
찬영은 나호스의 활을 내려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활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좀 더 성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다. 안개라는 환경적 요인이 생기자 활이 가진 가치가 무척 높아졌다.
‘궁술 훈련의 강도를 좀 높여야겠어.’
찬영은 새삼 나호스의 활이 가진 활용 가치가 높다는 걸 느끼며 아슬란을 꺼냈다.
콰악!
더 지체할 것 없이 숨을 헐떡이는 젤럿의 목덜미에 검을 내려찍었다.
콰직!
한데, 그 순간 싸늘한 기척이 찬영의 감각을 건드렸다.
‘젤럿?’
아니다.
녀석을 마지막으로 놈들은 전부 죽었다.
그럼 답은 하나다.
“말론……?”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무언가가 안개를 뚫고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