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갓피스!”
제리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놀란 것이다.
워크 용병단 모두가 그랬다.
질문을 던졌던 로레인 역시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할 말을 잃었다.
갓피스.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어…….’
분명 아버지는 그들이 최후의 성전 이후, 전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갓피스가 있었다.
“그쪽 말이야.”
그녀가 찬영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최후의 성전에서 살아남은 갓피스인 건가?”
찬영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눈에 이채가 흘렀다.
최후의 성전에 대한 것은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전에 대해 묻고 있었다.
‘뭔가 아는 걸까?’
하지만 찬영 또한 최후의 성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멸망이 왜 시작된 거지? 성전에서 패배한 건가?”
찬영은 로레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최후의 성전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니까.
오히려 찬영이 로레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최후의 성전에 대해 질문한다는 건 그녀가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이거나, 혹은 그 속사정에 대해 조금은 안다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분명 최후의 성전에 대한 궁금증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상, 지금 다룰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막 입을 떼려던 찬영의 곁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정말…….”
얼굴에 피가 튄 그녀는 몸을 감싸고 있던 망토, 공진을 벗어 찬영에게 건넸다.
“괜찮습니다.”
찬영이 받지 않으려 하자 마리사가 말했다.
“더는 염치없이 기대고 싶지 않아요. 뭐든 돕고 싶어요.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요.”
찬영은 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해 봐야 소용없다. 눈빛만 읽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찬영이 피 묻은 공진을 다시 받아 들며 로레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질문만 던질 겁니까?”
찬영의 곁엔 그가 구한 마리사가 서 있었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알겠어. 나중에 듣지.”
“현명하군요.”
“그쪽 생각대로 질문보다는 모두의 생존이 먼저니까. 솔직히…… 면목이 없기도 하고.”
원하는 대답을 들은 찬영이 워크 용병단을 돌아봤다.
이곳에 모인 인원은 스무 명이 좀 넘었다.
“해적의 규모는 백여 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찬영이 대답 대신 위층을 쳐다봤다.
“사람들한테 들었군.”
“예.”
“맞아, 해적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 당신이 방금 죽인 해적은 서른 명쯤 돼. 그럼 남은 건 지금 죽인 녀석들의 두 배 정도가 된다는 얘기겠지.”
그때, 보테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적이 아니라네.”
지팡이를 짚고 시체 밭을 걸어 나온 그가 로레인의 옆에 서며 말했다.
찬영의 시선이 보테에게 향했다.
시선을 맞춘 보테가 사과부터 건넸다.
“그 전에 아까 일에 대한 사과부터 하지. 난…….”
보테는 민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찬영은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갔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건 맞다.
하지만 세상은 흑백의 나뉨처럼, 옳고 그름이 완벽히 구분되어 흘러 갈 수 없다.
“괜찮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도 전부 들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고맙네, 정말.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안 그런가? 대장?”
로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안해. 변명할 여지없는 우리의 잘못이야.”
그녀를 시작으로 제리와 다른 용병단원들이 진심으로 찬영에게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찬영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제야 보테가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얘기를 계속해도 될까?”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어쨌든, 우리가 쉽게 움직이지 못했던 건 말론이라는 마법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친위대, 그리고 몬스터들이라네.”
찬영이 물었다.
“그들 말고 나머지는요?”
보테가 대답하기 전에 로레인을 쳐다봤다.
“가능하겠나, 대장?”
로레인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머지는 우리 선에서 해결 가능해.”
이어서, 로레인이 제리의 어깨를 툭 쳤다.
“제리, 항상 저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지? 지금이 그때야.”
지켜보던 보테가 외쳤다.
“자자, 움직이자고!”
용병단이 사람들을 풀어주기 위해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찬영이 로레인에게 말했다.
“몇 가지만 더 부탁하죠.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마을 주민들을 이곳으로 모아 줘요. 차라리 한곳에 모아 두고 지켜 주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럴게. 내 생각에도 그게 나을 것 같으니까.”
“좋습니다. 그리고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놈들은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스물 정도야.”
얘기를 들은 찬영이 잠시 우올로를 켜서 지수를 불렀다.
“지수 씨.”
-네.
“지금부턴 로레인 씨라는 분과 함께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 후 김지수와 자세한 얘기를 나눈 찬영은, 귀에 착용했던 우올로를 분리해 로레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혼잣말이나 하고…… 왜 이래? 미치기라도 한 거야?”
반사적으로 물러나는 그녀에게 찬영이 손바닥 안에 있는 우올로를 보이며 말했다.
“놀랄 거 없어요. 마법 통신구 같은 겁니다. 직접 해 보면 압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로레인이 귀를 내밀자, 찬영이 그녀의 귀 안에 우올로를 장착시켜 줬다. 그리고 우올로의 사용 방법을 알려 주었다. 로레인은 찬영의 설명에 따라 우올로를 조작하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웬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저와 통신하고 있는 동료입니다.”
“동료? 한 명이 더 있어? 근데, 우리가 왜 못 봤지? 가만……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뜬 로레인에게 찬영이 속을 훤히 들여다 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럼 일부러 여길 들어온 거라고?”
“그런 셈입니다.”
“하, 전부 놀아났군!”
헛웃음을 흘리는 로레인에게 찬영이 덧붙여 말했다.
“제 동료와 교신한 뒤 합류하세요. 다른 건 말 안 해 줘도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지리를 꿰뚫고 있을 테니까요.”
“염려 마. 차려 준 밥상도 못 먹을까 봐? 해적들이 눈치채기 전에 마을 주민의 안전을 확보할 테니 염려 말라고…….”
“그러죠. 그럼 뒷일을 부탁합니다. 로레인.”
“그래.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게 내 이름까지 들은 모양이네.”
찬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니유를 통해 안 게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어 감옥 안에서 갓피스 앨범을 살펴보았다.
그곳에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로레인, 2백 인의 갓피스 중 한 명.’
“뭘, 그렇게 빤히 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는데?”
찬영은 그녀에게 숨김없이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건 그녀 스스로의 몫이니까.
“뭐냐니까?”
“저한테 갓피스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어. 달리 안 믿을 이유가 없지. 안 그래?”
“그럼 당신이 갓피스라는 것도 믿을 수 있겠네요.”
순간 곁에 서 있던 보테를 포함해 주변에서 바삐 움직이던 용병단원이 전부 얼어붙었다.
하지만 표정이 가장 딱딱하게 굳은 건 당사자인 로레인이었다.
“뭐라고?”
“충분히 이해한 거 같은데…….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 갑자기 나타난 갓피스가 너도 갓피스라고 얘기하는데 그쪽 같으면 뭐라고 하겠어?”
찬영은 그녀의 혼란을 이해했다.
당연할 거다. 하지만 감당해 주어야 한다.
반면 로레인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더 말이 없어?”
“더 해야 합니까?”
“아니, 갓피스가 되기 위한 시험이라든지, 조건이라든지, 어떤 조언이든지 뭔가 더 있을 거 아냐?”
“없습니다, 그런 거.”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가이드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런 가이드도 없는 마당에 그녀를 도울 게 없었다. 대신 해 주고 싶은 말은 하나 있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귀를 쫑긋 세운 로레인에게 찬영이 말을 이었다.
“부담 갖지 마세요. 갓피스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거니까. 저 역시 그랬었고.”
로레인은 순간 멍해졌다.
“어이, 정말 그게…… 다야?”
“예.”
“특별한 얘긴 없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해 줄 얘기가, 정말 그게 다라고?”
몇 번을 다시 묻는 그에게 찬영이 다시 말했다.
“더 물어도 다른 대답은 안 나옵니다.”
“그래, 알았어. 더 안 물어볼게.”
“대답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가 봐야 하거든요.”
찬영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로레인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이봐.”
“또 질문입니까?”
“아니, 네가 혼자 감당하려는 적들 혼자선 힘들 수도 있어. 말론이 사용하는 마법은 무척 까다로우니까.”
“그래요?”
고개를 까딱인 그녀가 보테를 쳐다봤다.
“영감, 일러 줘.”
“그러지. 자, 가세.”
보테가 찬영과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우선 말론을 얘기하기 전에 루크와 코란에 대해 말해 주지. 코란은 루크의 졸개야. 검을 쓰는데 힘이 무지막지해.”
“루크는요?”
“마법사야. 말론이 데리고 다니는데……. 듣자하니 로일 성의 감옥에서 도망쳐 나온 죄수라고 하더군. 실력이 상당해. 주로 사용하는 건 화염 계열 마법이야.”
찬영은 잘 새겨들었다.
적들을 상대할 때면 가치 측정으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늘 방심하지 않고 싸웠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다.
“말론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보테가 그 얘기를 꺼낼 때쯤, 문을 벗어났다.
밖은 안개가 자욱이 껴 있었다.
처음 이 문을 열고 들어왔던 아까 전과는 비교되지도 않는 수준이다.
옆에 있는 보테까지 한 걸음 내딛으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보테도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안개가 시작됐군.”
“이런 안개가 익숙한 것 같네요?”
“여기 산 지 제법 됐으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조심하게. 안개가 있다면 녀석의 장기가 더 강력해져.”
이어서 보테가 알고 있는 바를 전부 얘기했다.
한참 듣고 있던 찬영이 나직이 말했다.
“까다롭겠네요.”
“두렵지 않나? 마나와는 다른 힘을 구사하는데도?”
“어느 정도는 겪어 봤습니다. 이런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랬군. 하긴, 갓피스라면 산전수전 다 겪어 봤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테가 마른침을 삼킨 후 말했다.
“그의 거처에 정기적으로 몬스터를 실어 놓았었네. 안에서 몬스터를 가지고 뭔가 실험을 하는 거 같은데, 한 번도 뭘 하는지 보여준 적은 없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걸세.”
“유념해 두죠.”
“끝이네. 더 조심할 게 있다면 자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 안개겠지.”
“글쎄요. 그의 능력이 활용되기 완벽한 환경이란 건 인정하지만…….”
찬영이 안개 속으로 걸어가며 보테를 돌아봤다.
“저라고 그걸 이용 못하란 법은 없겠죠.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찬영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 * *
-이봐, 지금 망루로 뛰어.
지수는 오울로에서 들려온 로레인의 말에 안개를 뚫고 뛰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쓰려고 가져온 장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선 탐지기.
고글처럼 생긴 이 도구는 군에서도 사용되는 장비다.
열이 방사되는 화재 환경에선 무용지물이지만, 지금처럼 안개가 끼거나 어둠 속 한가운데 서 있을 땐 이보다 유용한 물건은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후우…….’
순식간에 망루 옆에 붙은 지수는 우올로를 켰다.
“움직일게요.”
-좋은 생각이야.
로레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수를 망루 위를 빠르게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열선 탐지기로 감지된 적의 숫자는 총 일곱.
이미 찬영이 차려 둔 밥상이다.
‘후우…… 할 수 있어!’
지수는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
이제 와서 코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
그녀를 이를 악문 채 빠르게 망루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망루 안을 슬쩍 엿보니 해적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래서 그년이 살려 달라고 울면서 비는데, 여기가 딱딱해지는 거야.”
“큭큭, 재미 좀 봤나 보네.”
“죽여줬지.”
“……몹쓸 새끼들.”
순간 모르는 목소리가 해적들의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해적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지수가 그들 가운데로 난입했다.
쐐액!
그녀의 검이 빠르게 해적들을 훑고 지나갔다. 해적들은 자신들의 검에 손도 대지 못한 채였다.
모여 있던 네 명의 해적 중 두 명의 목이 단번에 베여 쓰러졌고, 나머지 두 명은 왼 다리와 오른팔이 베였다.
쿠당탕!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해적들을 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마침 낄낄거리는 세 명의 해적이 좁은 망루 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습으로 넷을 쓰러뜨렸지만, 정면에서 세 명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것 같다고 느꼈다.
지수를 발견한 해적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네년은 뭐냐?”
하지만 대답은 그들의 등 뒤에서 들렸다.
“뭐긴 뭐야? 적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적 세 명의 목이 나뒹굴었다.
망루는 깔끔히 정리됐다.
처음 로레인을 대면한 지수가 물었다.
“……당신이?”
“그래, 내가 당신과 계속 통신한 로레인이야.”
“김지수예요.”
지수와 로레인의 첫 만남이었다.
의사소통 팔찌를 차고 있는 그녀의 말은 정확히 공용어로 변환되어 로레인에게 전해졌다.
“알아, 아까 들었어. 그런데 하나 묻자.”
“네.”
“그쪽도 갓피스라서 저 남자를 따라다니는 건가?”
“예?”
무슨 상황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지수는 로레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