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 * *
“그럼 주민들 모두 갇혀 있다는 겁니까?”
자신을 니유라고 소개한 푸른 머리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곳을 포함해 행정관께서 머물던 관청 주변 건물들에 나눠 갇혀 있어요.”
니유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은 관청을 포함한 세 채의 건물에 나뉘어 갇혀 있었다.
찬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니유에게 들은 얘기들은 마을의 현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마을의 책임자인 지방 행정관과 치안 자치대는 대부분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로레인이라는 용병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건가?’
그들은 마을 주민들의 안위만 보장되면 당장 아군으로 돌아서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함께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풀어 줘도 문제다.
오히려 뿔뿔이 흩어지면 지켜 주는 게 힘들다.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순 없다.
‘차라리 이곳을 요새화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찬영은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니유 씨.”
“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별거 아닌 일인 걸요. 그런데…… 아까 스스로 이곳을 택해 들어오셨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세요?”
“알게 될 겁니다.”
찬영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잉!
동시에 소환된 아슬란.
“어, 어?”
이를 본 니유는 경악했다.
탄탄한 신체로 봤을 때 떠돌이 기사나 용병 정도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마, 마법사님이셨나요?”
“네, 뭐…….”
대답과 함께 아슬란을 바닥에 박아 넣은 찬영은 양손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슬쩍 잡아당겼다.
뚜둑.
그러자 힘없이 떨어지는 쇠사슬.
니유는 할 말을 잃었다.
“바, 방금 마법사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힘이…….”
니유가 생각하는 마법사는 쇠사슬을 종이처럼 끊어 버릴 수 있는 힘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러면서 찬영은 아슬란을 집어 들었다.
웅웅!
아슬란이 기쁘게 운다.
찬영이 뒤를 돌아봤다.
“지금부터 이곳이 새로운 도피처가 될 겁니다.”
니유가 뭔가를 얘기하기도 전에 찬영은 막혀 있는 쇠창살을 검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쇠창살이 빠르게 얼어붙으며 산산조각 났다. 반대편 창살에서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처, 철창을 베고 나왔어!”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외쳤다.
“우릴, 우릴 구해 주세요!”
쇠창살을 잡고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찬영은 그들을 탈출시키지 않았다.
흥분한 주민들이 이곳을 탈출해 도망치면 오히려 지켜 주는 게 더 힘들어진다.
그럴 바에는 잠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이곳에 있게 하는 편이 낫다.
‘나보단 익숙한 사람이 안심시키는 편이 나을 거야.’
찬영이 고개를 돌렸다.
“니유 씨.”
“예, 예?”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마른침을 삼킨 니유에게 찬영이 말했다.
“제가 아래에 내려가는 동안 다른 분들을 안심시켜 줘요. 풀어 주는 건 이곳을 정리한 후에 할게요. 할 수 있겠습니까?”
“이유가 있나요?”
“당장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진 저와 엮이지 않으시는 게 나아요. 상황이 정리된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찬영은 일부러, 더 독하게 말했다.
그 말에 니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그를 나서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니유는 그럼에도 자신들을 위해 싸워 주려 하는 그가 고마웠다.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감사 인사는 아직 이릅니다.”
말을 마친 찬영이 걸음을 옮기며 렌즈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반경 15m 안에 있는 목표물들이 나타났다.
몬스터와 마정석, 그리고 차원의 돌일 거다.
이전의 경험으로 고려해 봤을 때 렌즈가 차원의 돌까지 탐색이 가능한 건 파악한 지 오래다.
렌즈는 그것 외의 다른 것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여관 안의 해적들은 렌즈의 목표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안에 있는 해적들이 차원의 돌을 주입하고 있지 않단 얘기겠지.’
오히려 렌즈는 여관 밖을 가리키고 있다.
그 말은 곧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주력들이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이 된다는 얘기였다.
어중이떠중이가 차원의 돌을 갖고 있진 않을 테니까.
‘뛰어난 장비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하긴, 이번 잠입만 해도 이게 없었으면 생각조차 못했겠지.’
렌즈가 동공 위를 덮어 준 덕분에 갓피스 문양을 가리고 잠입할 수 있었다.
다방면에 쓰이는 효자 장비인 셈.
저벅!
복도를 막고 있는 철창 앞까지 온 찬영은 렌즈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었다.
찬영이 쥐고 있는 아슬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철창이 단숨에 베어 나갔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찬영이 연주 소리가 들리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젠장…… 아무리 봐도 역겨워 죽겠군.”
제리는 술 한 잔을 전부 들이켠 후 힐끗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마리사가 해적 세 명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인형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냥 추는 게 아니다. 옷이 반쯤 벗겨진 채 해적들의 우악스러운 손을 감당하고 있었다.
“보지 마.”
로레인이 손을 뻗어 제리의 고개를 다시 정면을 보게 했다.
제리가 말했다.
“언제까지요?”
“다른 방법이 생길 때까지.”
“차라리…… 싸우다가 뒈지는 게 낫겠습니다, 대장.”
“나도 그래.”
“그런데 왜 안 움직입니까? 영감도 더는 못 참겠다면서요?”
보테가 말했다.
“응, 그렇게 말했지. 왜?”
“그럼 대장 좀 설득해 봐요.”
“못 해.”
“왜요?”
“대장이 괜히 대장이냐? 어렵고 힘들 결정을 하라고 있는 게 대장이란 거다. 대장이라고 보기 좋을까?”
말을 마친 보테가 로레인을 쳐다봤다.
로레인은 그 시선에 쓰게 웃었다. 편을 들어 주는 보테에게 고맙긴 했다.
하지만 무능력한 자신이 씁쓸했다.
‘언제까지…… 방관해야만 할까?’
자신도 여자다.
그렇기에 마리사의 처지가 더욱 화가 났다. 당장 해적의 머리통이라도 검으로 베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말론과 몬스터들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로레인이 해적을 경계하며 제리에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우린 마을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야. 신중히 움직여야 돼. 죽는 건 쉬워.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남아 있을 저들은?”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모를까? 로레인에게 벌써 이런 말만 수차례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슬프다.
제리는 다시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냥 술이나 퍼마시고 잠이나 자렵니다. 꿈에서라도 저 새끼들 대가리를 베야 속이 풀리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2층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제리…….”
로레인이 제리를 툭툭 쳤다.
“아, 왜요? 술 마실 겁니다.”
치지 말라며 어깨를 흔든 제리에게 로레인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저길 봐.”
* * *
찬영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술에 취해 자신과 마주 올라오던 세 명을 계단 위에서 단숨에 베었다.
쿠당탕!
해적들은 반항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렌즈에 나타난 대로, 차원의 돌의 힘을 통해 부활하는 해적은 없었다.
대신 세 명이 계단을 뒹굴며 떨어지자, 음악을 연주하고 있던 세 명의 악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쥐죽은 듯 꺼진 음악 소리.
그걸 대신한 건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 뿐.
모든 해적의 시선이 일제히 찬영에게 쏠렸다.
“저, 저 새끼 뭐야?”
나직이 입을 연 건 찬영을 처음 데려온 해적이었다.
그를 발견한 찬영이 순간,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목이 떨어진 해적들.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진 찬영.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해적들은 눈만 휘둥그레 뜰 뿐이었다.
‘뭐야, 어디 갔지?’
해적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때, 그의 옆에 새카만 그림자가 나타났다.
“허억!”
깜짝 놀라 황급히 검을 뽑아 들려던 해적의 손등 위로 찬영의 손이 먼저 다가왔다.
철컥!
검이 뽑히다 말고 다시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내가 말해 주었던가?”
반항도 못하고 서 있는 해적에게 찬영이 말했다.
“환영할 거 없어.”
쐐액!
말이 끝나자마자 쐐액 아슬란이 날아갔다. 해적은 더 보지 못했다. 보기도 전에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툭, 투투툭.
피를 쏟아 내며 쓰러지는 해적의 몸과 함께 찬영은 돌아섰다.
“너부터 갈 테니까.”
“죽여!”
이를 본 해적 중 누군가 소리쳤다.
하지만 해적들이 일제히 혼란에 빠졌다.
찬영이 다시 사라진 것이다.
“어디 갔지?”
“찾아!”
“도망쳤다!”
갖가지 소리가 들리던 와중에 찬영이 다시 나타난 건 마리사를 둘러싸고 있던 세 명의 해적들 사이였다.
방금 전까지 마리사를 주무르고 있던 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젠장! 어디 있는 거야!”
“보이면 당장 죽여 버려!”
하지만 정작 그를 발견한 건 마리사였다.
너무 놀라 입을 벌린 그녀와 찬영의 시선이 부딪쳤다.
찬영은 먼저 자기가 입고 있던 망토, 공진을 벗어 그녀의 찢어진 옷 위를 덮어 주었다. 그녀가 누군지 묻기도 전에 찬영이 먼저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곧바로 돌아선 찬영의 아슬란이 해적 세 명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툭, 툭, 툭!
각각 왼팔, 오른 다리, 왼 다리가 잘려나간 해적들이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끄아아!”
마리사는 그 광경을 눈을 부릅뜨고 봤다.
분명 잔인한 광경이다. 하지만 두 눈에 더욱 힘을 줬다.
이제껏 그들의 손아귀에 언제 죽을지 두려워하며 정작 죽을 결심은 하지도 못 하는 비참한 삶이었다.
그 속에선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고 평범한 삶을 꿈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적들의 손에 희롱 당하던 방금 전까지도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게 달라지고 있었다.
희망이 생겼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거라면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와 함께 싸울 순 없어도…… 눈을 피하고 두려움에 떨며 그가 싸우는 걸 방관하고만 싶진 않다.
두렵더라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디 구원을 가져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죽어!”
그녀는 죽어 있는 해적의 몸통 위에 옆에 보이는 의자를 내려찍으며 오열했다.
* * *
한편, 찬영은 맹수처럼 해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지켜보던 제리가 급히 보테를 불렀다.
“마, 맙소사! 영감, 영감!”
“왜 불러, 인마!”
“방금 저거, 사라진 저거 마법 맞습니까?”
“맞아!”
“블링크, 맞습니까?”
“그래!”
로레인이 연이어 물었다.
“4서클 마법으로 알고 있어. 맞지, 영감?”
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런데 벌써 몇 번째지? 슬롯을 사용해서 주문을 쓴다고는 하지만 벌써 여섯 번째 블링크야!”
보테가 말했다.
“안다.”
“믿을 수가 없군. 5서클이 넘는다는 얘기야. 5서클 마법사가 이 작은 마을에 왔다고?”
“그래, 보고 있지 않느냐?”
말을 마친 보테는 찬영의 움직임을 가만히 살폈다.
그래, 분명 녀석들 말대로 5서클 이상의 슬롯 보유를 가진 건 맞다.
5서클은 되어야 여섯 개의 슬롯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저 움직임은 제 아무리 마법 병단에 속한 전투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쉽게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훈련받은 기사가 따로 없다. 아니, 웬만한 기사는 이름도 못 내밀 거다. 무슨 마법사가 검술까지 완벽히 구사한단 말인가?
“저게…… 어떻게 마법사야?”
너무 놀란 보테가 머릿속에 떠올리던 생각을 뱉고 말았다.
로레인도 그 목소리를 듣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보테가 놀라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저 움직임은 장내에 있는 해적들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가능은 해.’
분명 자신도 장내에 있는 해적들까진 압도할 수 있다.
특히 장내엔 루크와 코란이 말론과 접견하러 자리를 비웠다.
녀석들과 몬스터 ,그리고 말론을 비롯한 놈의 호위대만 없다면 자신 역시 진작 해적을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는 건 그가 보이는 움직임 때문이다.
‘간결한 동작만으로 해적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어!’
그뿐만이 아니다.
검이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한 번 정도는 끊길 법도 한데, 스텝과 검로, 모두가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며 이어지고 있다.
한 번 검이 휘둘릴 때 두세 명의 해적의 목이 떨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번 휘두른 검이 수십 개의 변화를 일으키는 검로로 이어지는 건 생전 처음 봐.’
돌아가신 아버지조차 그러진 못하셨다.
타닥!
그사이 그가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검을 늘어트리고 멈춰 선 게 보였다.
해적들의 전멸, 전멸이다!
로레인은 움직임을 멈춘 그를 살피며 잠깐의 상념을 접었다.
이젠, 물어봐야 할 시간이다.
“당신, 대체…… 누구야?”
찬영이 아슬란을 나무판자 위에 박아 넣으며 대답했다.
“갓피스.”
그 순간, 렌즈를 착용하고 있던 찬영의 눈동자가 본래의 문양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