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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29화 (129/248)

# 129

129화

“아까운 목숨 하나 버렸군.”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마차를 보며 보테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때 로일 영지 마법 병단에 속했던 마법사 출신이었던 그는 지금의 현실이 씁쓸했다.

‘고작 외지인이나 납치하는 신세라니.’

그건 자신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마치 해적들이 몰려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움직인 사람처럼 행동한 기사 출신 로레인, 그리고 그녀와 함께 워크 용병단을 세운 경험 많은 용병 제리도 모두 그런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여전하다.

로일 영주는 침묵했고, 용병단을 비롯한 마을 자치대는 결국 해적 떼를 막지 못했으며, 결국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혹시나 접근하는 외지인을 납치하거나 몬스터를 산 채로 포획해 해적의 수장인 말론에게 가져다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거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그랬다간 볼모로 잡혀 있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을 거다.

그들을 두고 가기엔 모두가 모진 사람이 못 된다.

“……기분 더럽네.”

제리가 웃음기를 지웠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쓰러진 그 남자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온갖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할 것이다.

로레인이 제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어쩔 거야? 마을 사람들 다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제리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럴 순 없다.

떠돌이 용병을 때려치우고 로레인과 함께 삶의 터전으로 삼은 마을이다. 마을에는 많은 인연과 추억이 서려 있다.

마을과 이웃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긴 하다.

로레인이 계속 말했다.

“제리.”

“왜요?”

“흘려보내. 생각하면 복잡해지잖아. 지금은…… 마을 사람들만 생각해.”

“젠장, 압니다! 아는데도 기분이 더러운 걸 어떡합니까?”

로레인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무리들 모두 침묵했다.

같은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라비, 그 녀석의 얼굴을 하루라도 안 봤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보테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다시 입을 열었다.

로레인이 입을 보탰다.

“동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제리 역시 그랬다.

“나도.”

하나둘 농담처럼 다시 입을 열긴 했지만 모두의 표정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 * *

찬영은 눈을 떴다.

‘흐음.’

약 기운 때문에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하지만 심법을 통해 마나를 끌어올리자 점점 머릿속이 맑아졌다.

‘예상한 대로군.’

확실히 아까 만난 자들은 찬영을 단칼에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맞는 것 같다.

하긴…….

그럴 생각이었다면 얼굴이 보인 순간 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관찰하고 약에 취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귀찮은 일을 자처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찬영은 아마도 마을 안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 씨를 후방에 두고 오길 잘했어.’

처음 그들의 기척을 느낀 건 그들이 자신을 보기 전부터였다. 심법들의 수련이 깊어질수록 오감, 아니 육감까지 예민해지고 있는 덕분에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찬영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수를 후방에 두고 움직였고,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 역시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확실히 그 계획이 효과가 있었다.

“들립니까?”

찬영은 튼튼한 쇠사슬에 사지가 결박당한 걸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러자 우올로에서 지수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네! 들립니다! 괜찮으십니까?

지수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실렸다.

“네, 다행히요. 우올로는 귀 안쪽에 장착하는 초소형이라 그런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에요.”

-하아,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그래요, 무사하니까 이제 그만 마음 놓아요. 그나저나…….”

찬영이 마차 안을 둘러봤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마차 안엔 썩은 내가 진동한다.

“여긴 몬스터 시체를 실어 나르는 마차 안인 것 같네요.”

하도 많이 맡아 본 탓에 이게 몬스터 피 냄새 정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런, 함께 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같이 움직였으면 외부 상황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을 테고요. 들은 게 좀 있죠?”

-예, 꽤 많습니다.

“마을은 어때요?”

-소프 마을 역시 해적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럼 그들도?”

-그게 조금 이상한 점입니다.

“왜요?”

-말하는 걸로 봐선 해적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볼모로 잡혀 있어 어쩔 수 없이 해적들과 공조하는 마을 자치대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찬영은 그게 기회라는 말로 들렸다.

“상황이 바뀌면 그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네요.”

-예, 마을 주민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건 제가 해 보죠.”

-그럼 저는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싸움이 시작되면 가담해 주세요. 속전속결로 끝낼 테니 오래 끌진 않을 겁니다.”

찬영의 목소리엔 확신이 있었다.

그건 오만함이 아니었다.

상대의 주력, 병력이 협곡으로 향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내부의 상황만 파악해 두면 이 싸움…… 금방 끝낼 수 있어.’

마을 내부에 깊숙이 진입하고자 한 이유이기도 했다.

쿵!

그러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찬영은 재빨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다.

끼익! 드르륵!

마차의 뒤 칸이 열리고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터벅!

곧이어, 두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해적인가?’

하는 그때.

퍽퍽!

발로 얼굴을 맞았다. 거의 타격이 없는 정도다.

“일어나!”

“으음…….”

하지만 상황부터 파악하려면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다.

깨어나는 척 눈을 슬그머니 떴다.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의사소통 팔찌를 인벤토리에 넣어 뒀어도 알 수 있고, 어설프게나마 말할 수 있다. 바빴어도 대륙 공용어를 꾸준히 공부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얼굴을 들이민 해적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쐐액!

해적은 대답 대신 뺨을 때렸다.

‘초반부터 거칠겠어.’

곧바로 해적의 우악스러운 손이 멱살을 잡아당겼다.

“어이, 여기가 어딘지 알고 혓바닥을 놀리는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다시 날아온 손바닥.

찰싹!

또 다시 고개가 홱 돌아간 찬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대답은 허용 안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예’, ‘아니요’야. 대답 안 해?”

“예.”

“그래, 순종적인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적이 찬영의 뒷덜미를 잡고 마차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 * *

다섯 명 정도 되는 해적들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찬영은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잔뜩 안개 낀 가운데, 갈색 빛의 투박하고 낡은 건물이 보였다.

높이는 3층 정도, 규모는 다른 마을에서 본 여관의 세 배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위태롭게 메달려 삐걱거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루디의 휴식처’

해적들의 베이스캠프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빨리 안 가!”

쐐액!

잠깐의 생각 때문에 채찍이 날아왔다.

찰싹!

따끔하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채찍이 몇 차례 더 날아왔지만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닫았다.

“새끼, 제법 잘 참네.”

해적은 문을 열고 찬영의 옷깃을 낚아채 건물 안으로 던지듯 밀어 버렸다.

쿠당탕!

찬영은 균형을 잃는 척 하며 바닥에 볼썽사납게 굴렀다.

그 덕에 바에 앉아 있는 해적들부터 수십 개의 탁자에 자리 잡고 있는 해적들까지 찬영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웬 놈이야?”

해적 중 하나가 묻자 찬영을 데려온 해적이 대답했다.

“외지인이래.”

“그래? 왕국 출신 맞아? 이렇게 생긴 놈은 처음 보는데?”

괜히 앞에 와서 얼쩡거리는 해적이 찬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갑자기 오금을 가격했다.

퍽!

“꿇어 봐.”

찬영은 순순히 다리가 풀린 척 넘어져 주었다. 해적이 기다렸다는 듯 킬킬거리며 말했다.

“자존심이라도 상해? 어우, 무서워. 자존심 상하신 단다!”

찬영을 데려온 해적도 놀리는 해적을 따로 제지하지 않고 방관했다.

“신고식 잘 받으라고.”

오히려 찬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순식간에 몰려드는 해적들.

그들은 찬영을 발로 한 대씩 차면서 계속 못 일어나게 밟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술을 나르던 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끌고 나왔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은 해적은 그녀를 찬영의 앞에 쓰러트리며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야, 인사해. 마리사다.”

“아악!”

바닥에 나뒹군 금발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반항도 못했다.

찬영은 슬쩍 눈을 들어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고, 멍과 피딱지가 굳은 상처가 가득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해적 중 하나가 웃으면서 외쳤다.

“이야, 외지인님이 마리사가 마음에 드시나 보네!”

“오? 그래? 그럼, 바지부터 벗겨 봐야지. 우리 마리사한테 어울리나 한 번 보자고!”

해적들이 몰려들어 강제로 찬영의 바지를 벗기려던 그때, 해적들 사이로 한 손이 쑥 들어와 찬영의 덜미를 쭉 당겼다.

‘음?’

끌려간 찬영이 위로 눈을 들자 붉은 머리의 여자가 시야 한 편에 들어왔다.

찬영을 차갑게 내려다본 그녀가 해적들에게 말했다.

“대륙이 재건된 뒤 타 지역에서 처음 건너온 외지인이야. 말론이 꽤 탐낼 거 같은데, 생채기라도 생기면 싫어하지 않겠어? 안 그래? 제리?”

“암요.”

제리가 서늘한 눈동자로 로레인 옆에 서자 나머지 동료들도 우르르 로레인 뒤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해적들 사이에서 한쪽 눈에 검상을 입은 해적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네년이 언제부터 말론 님의 기분까지 걱정했지?”

애꾸눈의 깡마른 남자는 자신의 검집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로레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려고. 왜?”

“재미있네. 진짜 재미있어.”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때쯤 귀공자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질 좋은 예복을 갖춰 입은, 금발 머리의 코가 큰 남자였다.

“코른, 그 정도면 됐어. 괜히 분란 만들지 말자고.”

“그럴까?”

그의 한마디에 흥분을 가라앉힌 애꾸눈의 코란.

“운 좋은 줄 알아라.”

코란은 로레인에게 한마디 독설을 내뱉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 술잔을 들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코란을 지켜보던 금발 남자는 로레인에게 경고했다.

“로레인. 네 말대로 말론 님께선 상품이 흠집 나는 걸 싫어하셔. 네 뜻대로 하지. 그러니 그쯤하고 물러나.”

로레인이 두 손을 들며 한 발 물러났다.

“그러지. 루크.”

더 덤비지 않겠다는 뜻.

금발 머리의 남자, 루크도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이제 외지인 친구에게 방 하나 내주라고.”

찬영은 말없이 루크를 쳐다봤다.

‘이자가 말론의 일을 대행하는 자인가?’

이제껏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말론이라는 자가 이들의 수장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그 수장의 하수인이 루크와 코란이고.

하지만 방금 자신을 구하려 했던 나머지는 입장이 다른 것 같았다.

찬영은 일어나며 로레인을 힐끗 돌아봤다.

로레인의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낯이 익다.

하지만 끌고 가는 해적이 등을 밀치는 통에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 *

2층은 기다란 복도 입구 커다란 철창이 세워졌다.

철컹!

해적과 함께 들어선 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척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려 주세요!”

“제발, 보내 주세요!”

“우리 애라도 보내 주시오. 제발!”

한때 각 방의 문이었던 곳엔 겨우 손 하나 빠져나올 수 있는 틈의 철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방이 수십 개다.

해적에 의해 찬영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가게 됐다.

해적이 찬영을 밀어 넣으며 외쳤다.

“어이, 인사들 하라고.”

쿵!

다시 닫힌 문과 함께 찬영의 시야 한 편엔 여섯 명 정도의 사람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멀쩡한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어딘가를 다쳤거나 병을 앓고 있었다.

그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왔다.

“어, 어떻게 잡혀 오신 거예요?”

말을 더듬는 청년은 푸른 머리가 절반쯤 깎여 있었다.

그냥 깎인 게 아니다. 듬성듬성 칼로 베인 거 같다.

찬영은 조용히 청년을 바라보다가 유일한 두 명의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자들 중 한 명은 치마에 피가 가득했고 다른 여자는 구타당한 건지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기요?”

재차, 질문하는 청년을 쳐다봤다.

그도 왼쪽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청년이 찬영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이거요? 괜찮아요. 저보다는…….”

청년이 나머지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다른 분들이 더 걱정이죠. 여기 상황은 전혀 모르시고 오신 모양이네요. 다들…… 힘든 상태예요, 많이.”

청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찬영이 그의 어깨를 보듬어주며 이를 갈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실감하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살을 택할 만큼 독하지도 못했고, 고통을 이겨낼 만큼 건강하지도 못했다.

심신이 연약한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왔는데 심각하네요.”

“예상이요?”

“네, 전 잡혀 온 게 아닙니다.”

찬영이 들어온 입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 발로 왔지.”

말을 마친 찬영의 눈앞에 인벤토리 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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