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 * *
새벽녘.
로일 영주는 회의장에서 잠깐 눈을 붙인 동안 좋지 않은 꿈을 꿨다. 로일시의 마지막 보루인 자신의 영주성이 함락당하는 꿈이었다.
끼익!
그때, 문 밖에서 오르테즈 수석 행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님. 오르테즈입니다.”
전시 상황으로 돌입한 후부터 오르테즈는 세 시간마다 현황 보고를 계속해 왔다.
“그대가 고생이 많구려.”
직접 의자에서 내려온 로일 영주는 수척한 얼굴로 오르테즈를 맞이했다.
“아닙니다. 그럼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예, 두 시간 전 몰려온 몬스터들은 물리쳤습니다만……. 사망자가 백이십 명, 부상자가 이백십 명 늘었습니다.”
“그랬군…….”
씁쓸한 영주의 표정.
당연했다.
현황 보고에 낭보는 없었다.
계속된 비보만 있을 뿐.
“또한 성 내부에 있는 세 번째 물 저장소가 동났습니다.”
“남은 건 두 곳인가? 이대로라면 지금 보유한 식수로는 한 달도 채 못 버티겠군.”
“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대로라면 말씀하신 한 달이 아닌 스무 날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오르테즈가 계속 말했다.
“품고 계신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오르테즈는 또 다시 냉정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실 전부터 수차례 영주에게 얘기했던 사항이다.
“또한 전시용 군량과 물을 저장해 놓는 내부 식수 시설을 구휼 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들은 영리하게도 성으로 통하는 수로들을 막아 외부로부터 식수가 유입될 수 없도록 하였고, 성벽 주변 곳곳에 해적들을 배치해 직접 식수를 길어 올 수도 없게 만들었다.
로일시를 완전히 틀어막은 것이다.
해적들은 로일 시민들의 생존을 볼모로 영주의 투항을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의 수호는 영주의 마지막 남은 신념이었다.
“백성은 왕국의 기반일세. 그들이 없다면 왕국 역시 존재하지 않지. 항쟁하는 우리가 사라져도, 그들은 살아남아야 해. 나는…… 패배한 영주가 되더라도 백성을 희생시킨 영주가 되고 싶진 않네.”
오르테즈가 반박하려 입을 뗐다.
“하오나 영주님……!”
“이 얘기는 그만 하세. 루호 제독에게는 또 다른 보고가 들어왔나?”
루호 제독.
현재 로일항을 지키고 있는 국경수비대 제독이다.
즉, 그가 무너지면 항구를 비롯한 남아 있는 해상 장악권마저 빼앗겨 버린다.
“오르테즈.”
영주가 아무 말 없는 그를 재차 불렀다.
“영주님…… 이대로 아무 것도 못해 보고 죽기만을 기다릴 순 없습니다.”
오르테즈는 루호 제독 얘기로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
“백성을 버리자는 것에 나더러 어찌 동의하라고 하는가?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야.”
“압니다. 알고 있으나 이대로 성을 버리실 것입니까?”
영주는 말을 못 잇자마자 오르테즈가 그동안 담아 두었던 얘기를 꺼냈다.
“소신 또한 영주님의 뜻을 존경합니다. 하오나 현실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적들은 저희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아까, 루호 제독을 물으셨지요?”
“그랬네.”
“그가 전한 바에 따르면 군소 해적들의 합류가 쉬지 않고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악이로군.”
“통신 또한 여전히 불통입니다. 블롱 협곡 밖의 지역으로는 마법 통신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마법 통신은 진작 마비됐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현재 블롱 협곡과 로일시를 장악하고 있는 뉴 빌드가 그렇게 만든 게 틀림없다. 하나, 영지 내의 마법사와 마법 공학자들은 해결할 실마리조차 풀지 못하고 있다.
“영주님.”
“듣고 있다네.”
“저희는 멸망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랬지.”
“그 말은 상황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징조라고 말씀하셨지요.”
“암…….”
“저는 영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전쟁,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영주님. 계속 버티고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영주는 골을 짚었다.
“그럼 내가 다시 묻지. 백성을 내보내서 우리가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은가?”
“아낀다면 두 달까지도 가능할 것입니다.”
오르테즈 또한 살겠다는 마음은 진작 버리고 있었다.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최고의 충성심이다.
그렇기에 영주는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로일성의 현실은 냉혹하고, 오르테즈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오르테스의 선택을 따르면 백성은 고통받는다.
“오르테즈.”
“예, 영주님.”
“나는 안 되겠네.”
오르테즈는 침묵했다.
영주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데 더 어떻게 밀어붙일까? 그의 마음을 알기에 오르테즈 또한 더는 영주를 몰아붙이지 못했다.
“하나 이대로 버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네. 그래서 앞으로 보름 동안 다른 낭보가 없다면…….”
마른침을 삼킨 오르테즈의 귀에 영주의 다음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수송선에 백성을 태워…… 수도로 가게.”
“하오나 수도 또한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곳을 지키다 죽어 가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살 수 있는 길이겠지.”
“하면, 영주님은 어찌 하려고 하십니까?”
“나는 여신과 폐하께서 허하신 이 땅을 지켜야겠지. 그것이…….”
로일 영주가 쓰게 웃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임일세.”
* * *
나무 위.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은 여자가 눈을 빛냈다.
그녀의 이름은 로레인.
한때 촉망 받는 기사였으나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 준 양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향에서 몬스터 토벌을 주요 임무로 삼는 용병단을 설립하여 단장직을 맡고 있다.
이젠 처지가 좀 바뀌었지만.
‘그나저나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남자…….’
“정체가 뭘까?”
이제 소프 마을을 찾아오는 외지인은 없다. 아니,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게 이곳으로 오려면 꽤 많은 몬스터 무리를 뚫어야 할 테니까.
그건 훈련받은 정병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혹은 실력 좋은 용병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뉴 빌드이거나.
하지만 느낌상 그런 것 같진 않다.
“용병 같아?”
“글쎄요? 저도 쉽게 감이 오지 않습니다.”
대답한 건 그녀와 함께 은신하고 있는 제리였다.
그는 그녀와 마을과 계약한 용병들 중 한 명으로서 그녀가 창설한 용병단의 초창기 멤버다.
하지만 그런 그도 로레인이 이렇게 고민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마치 오래 살아온 여든 살 노인처럼 현명했고, 다방면으로 지식도 많았다.
“전혀 기사 같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럼 용병일까요? 입은 건 저희처럼 입었잖아요. 경갑옷도 그렇고.”
“아니, 그것도 아니야. 딱 봤을 때 어때? 우리 같아?”
“아뇨, 확실히 용병처럼은 안 보이네요. 용병이라면, 세 걸음당 술 한 잔씩은 먹어 줘야죠.”
말이 끝나자마자 제리가 손바닥 크기의 휴대용 술병인 힙 플라스크를 꺼내 목을 축였다.
“캬……!”
만족스러워하는 제리의 표정에 로레인이 피식 웃은 뒤 길을 내려다봤다.
정말이다.
이 미친 세상에 검을 쓰는 용병이라면 맨정신으로 갈 수 없다. 의식이 흐려지지 않는 정도의 술은 몬스터에 맞설 용기를 준다.
그러니 용병이라면 술을 습관적으로 홀짝일 것이다.
물론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용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정말 적다.
“설마 상인?”
“에이, 그럴 리가요. 상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옵니까?”
“하긴, 그럼 용병, 기사도 아니면 몬스터 밭을 뚫고 여기까지 올 외지인의 정체가 대체 뭐지?”
“글쎄요?”
“안 되겠다. 영감 투입시켜.”
“아, 알겠습니다.”
스륵.
사라진 제리와 함께 로레인이 인상을 썼다.
“외지인이라…….”
* * *
본의 아니게 수많은 이목을 끌게 된 찬영은 지수 없이 혼자 길을 걷고 있었다.
‘노인?’
길목에 노인이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뜬금없는 상황.
찬영은 난데없이 나타난 노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인에게서는 술 냄새가 많이 났다.
“어르신.”
“으음…….”
슬며시 눈을 뜨는 코가 벌게진 대머리 노인.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괜찮으십니까?”
“으응? 나? 괜찮소. 암, 괜찮고말고. 흐흐.”
손사래 치는 노인이 널브러져 있던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어이쿠.”
하지만 일어나다 말고 옆으로 쓰러지는 노인을 찬영이 반사적으로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암, 자네가 내 손을 잡아 줬지 않나?”
헤벌쭉 웃은 노인이 겨우 찬영에게서 떨어져 다리를 바로 서고는 반쯤 풀린 눈으로 물었다.
“근데 우리 마을 사람 같이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어디서 왔나?”
“라쿤 마을에서 왔습니다.”
“라쿤? 그곳에서 왔다고?”
“예.”
“거긴 멀쩡한가?”
찬영은 말을 아꼈다.
노인이 대충 이해간다는 양 손사래를 휘휘 저었다.
“거기도 난리도 아닌가 보구먼. 도망쳤나? 딸끅.”
찬영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허어, 사람 참……. 과묵하구먼. 비밀이 많은 남자라 이거지? 딸꾹.”
거나하게 취한 노인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하자 찬영이 다시 옆에 붙었다.
“마을로 가실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죠.”
“그럴 텐가?”
“예, 한데 이곳은 괜찮습니까?”
“괜찮기는 무슨? 박살이 났지. 라쿤 마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해적들이 있어서 상황이 좋진 않습니다.”
“여기도 비슷하이. 수비대가 대부분 괴멸되고 이제 해적들이 마을에 득실거리지.”
“수비대가 전부 괴멸됐습니까?”
“어쩌겠나? 몬스터를 앞세워서 밀고 들어오는데……. 방도가 없었지. 그러는 자네는?”
“저는…….”
“됐네, 말 안 해도 되네. 안 들어도 대강 알겠군. 자네도 마을 자치 수비대였지? 그렇지? 딸꾹.”
캐묻는 노인에게 찬영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그걸 긍정의 의미라고 여긴 노인.
노인이 말했다.
“그럼 여긴 왜 왔나?”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그럼, 좋지. 끄억.”
트림하는 노인에게 찬영이 표정 아랑곳 않고 말했다.
“지원을 좀 받으러 왔습니다.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찾으러.”
“딸꾹, 그래?”
“예, 마을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암, 무사하니 내가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니겠나? 딸꾹, 우린 분란이 싫다네. 그냥 말만 잘 들으면 되거든.”
“하지만 그들은…….”
“흐흐, 암, 무자비하지. 그래도 어쩌겠나? 우릴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딸꾹.”
그러면서 노인이 품속에서 힙 플라스크를 건넸다.
“한잔하겠나? 어차피 우리 마을로는 갈 수 없지 않겠나. 속이 쓰릴 테니 같이 한잔하게나.”
잠깐 술병을 내려다보던 찬영.
“싫으면 말고.”
손을 빼려는 노인에게 술병을 빼앗아 든 찬영이 마개를 열고 꼴깍 술을 들이마셨다.
“흐음, 잘 마셨습니다.”
몇 모금 들이킨 후 술병을 돌려주자 이를 받아든 노인의 눈빛이 묘해졌다.
“이제 조금 어지러울 걸세.”
“예?”
순간, 찬영의 마나가 날뛰었다.
‘독?’
눈살을 찌푸린 찬영에게 노인이 말했다.
“독은 아니니 걱정은 말게. 잠깐 잠만 재우려는 것이니까. 이따 보세.”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이 툭 쓰러지자 로레인이 나무 위에서 신속히 뛰어내려 왔다.
곧이어 그녀를 따라 속속들이 자리 잡는 동료들.
“영감, 뭐래요?”
로레인이 다가와 묻자, 한때 용병이었던 3서클 마법사인 보테가 대답했다.
“기사는 아니고 마을 수비대였던 같다.”
“수비대? 수비대 수준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너도 한 땐 기사였잖느냐?”
“나야, 특수한 경우죠.”
“이 녀석도 그럴 수 있지.”
보테가 찬영을 힐끗 내려다봤다.
그때 일행 사이로 한 쪽 머리로 눈을 가린 꼽추가 나타났다.
“뭘 고민해? 당장 말론 님께 데려가지 않고! 니들은 말론 님의 개라는 걸 잊지 마!”
마을을 장악하고 있는 해적단의 앞잡이였다.
로레인은 인상을 썼다.
거슬리지만 어쩔 수 없다.
해적들은 현재 마을을 장악하여 마을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
괜히 반항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친다.
이때, 제리가 이를 갈았다.
“저 새끼가 진짜…….”
로레인이 제리의 가슴을 떠밀며 말했다.
참으라는 뜻.
“주머니 좀 털어 보고 데려가마.”
“진작 그러셔야지. 헛수작 부리지마. 알았어?”
눈을 치켜뜨는 꼽추가 씩씩거리며 돌아서자, 로레인이 한 쪽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춰 찬영을 내려다봤다.
“어이, 운 나쁜 친구. 자넨 여길 오지 말았어야 했어.”
* * *
같은 시각, 찬영이 있는 장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김지수는 찬영과 연결되어 있는 우올로를 통해 모든 상황을 귀로 듣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