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
“소프 마을에 은퇴한 전직 로그 길드장이 있다고요?”
누워 있던 찬영은 갓피스를 찾는 일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내 놓고도 정말 놀랐다. 이미 로그가 어떤 존재들인지 제이나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은 덕분이다.
“네. 마셰로프라는 사람이죠. 제가 알기로 그는 소프 마을에 있을 거예요. 고향이라고 했거든요. 확실하진 않아요. 가족 한 명 없는 혈혈단신이라고 들었죠.”
“놀랍네요. 제이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그가 수도에서 활동할 때 만나 본 적이 있어요. 그는 한 때 삼촌을 따르던 기사 출신이니까요. 그 사람은 아버지를 존경했다면서 제게 플로딘 추적에 관한 단서를 몇 개 넘겨줬었죠, 대가 없이.”
그녀가 찬영의 품에서 살며시 떨어지며 일어났다.
“이곳엔 이익을 위해 세워진 길드들이 많아요. 대장장이, 목수, 선원, 직업만큼 길드도 다양하죠. 로그 길드들은 그 중에서도 제일 은밀히 움직여요.”
“하긴, 그렇겠네요. 고급 정보를 사고파는 건 적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네, 그래서 대부분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필요하면 각자 길드의 연락 방법을 통해 합류하는 식이라고 들었어요. 그들은 거짓말도 진실로 만드는 재주가 있죠. 하지만…….”
제이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수많은 로그 길드들은 이제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게 없어요. 점조직들이 서로 연락 할 수 있는 방법이 차단되거나 길드 내부에 배신자들로 인해 분열됐죠.”
찬영은 짐작되는 게 있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뉴 빌드가?”
“맞아요. 그들은 자신들을 샅샅이 살필 수 있는 견제 조직을 증오했죠.”
“시작이 불특정 로그 길드들이었겠군요.”
“네, 로그 길드는 점조직이라 뭉쳐 있지 못해요. 뉴 빌드는 그걸 잘 이용했죠.”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알려 준 거죠?”
“마셰로프요. 그는 하나둘씩 궤멸되어 가는 로그 길드들의 상황을 알려주고 다시 사라졌어요. 그의 마지막 흔적을 본 사람 중의 하나가 저였죠.”
“그럼 그가 고향에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그래요. 하지만…… 만약 그가 죽지 않았고, 찬영 씨가 그를 찾는다면 다른 갓피스들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왜죠?”
“제가 만나 본 그는 기록을 남기고 다니지 않았어요. 늘, 머릿속에 남겨 뒀죠. 그가 살아 있다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게 확실해요.”
* * *
‘마셰로프라…….’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던 찬영은 곧바로 갓피스 앨범을 올려다봤다.
현재까지 개방된 앨범의 숫자는 총 203명.
자신과 제이나 글로리를 포함한 숫자다.
또한 개방된 앨범마저도 현재 갖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이름과 얼굴 밖에 없다. 하지만 마셰로프를 찾는다면 정보들이 더 늘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소프 마을에서 그의 흔적을 함께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라쿤 마을을 떠난 지 이틀 뒤.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비를 피할 동굴을 찾은 뒤 장작을 피웠다. 금세 따스함이 동굴 안을 감싸 안았다.
타닥!
지수가 타고 있는 장작을 보며 말했다.
“훈련 받을 때도 노숙을 자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적진 한 가운데서 하는 건 처음이네요.”
찬영이 불쏘시개로 장작을 쿡 찌르며 대답했다.
“그래서 긴장되나요?”
“예, 물론입니다.”
“저도 그래요.”
후두두!
그러면서 찬영은 동굴 밖을 쳐다봤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걸 보니, 비를 피하려면 조금 오래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장작을 피우는 게 몬스터의 주의를 끄는 행동은 아닌가요?”
“훈련 중에 그렇게 배웠나요?”
“예.”
“그럼 그럴 겁니다.”
김지수는 난색을 표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그도 그럴 게 빛을 보고 몬스터라도 쫓아오면 꽤나 성가실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해가 안 가는 듯한 눈치네요.”
“아…… 그건 아닙니다.”
볼을 긁적이는 그녀를 보며 찬영이 가볍게 웃었다.
“이해가 안 되면 물어봐도 좋아요.”
“음,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될 것 같습니다.”
찬영은 가볍게 웃었다.
김지수는 눈빛, 표정부터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다.
“얼마든지요. 더 많이 물어봐도 좋아요.”
“아닙니다. 저 역시 우리가 라쿤 마을에 쏟아질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팀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몬스터가 몰릴 건 걱정 안하십니까? 여긴 야생 몬스터가 돌아다니고도 남을 숲인데…….”
“걱정됩니다.”
“예?”
“걱정이 되니 이렇게 뜬 눈으로 밖을 지켜보고 있죠.”
“그런데 어째서……?”
“굳이 피해갈 생각이 없어서요.”
순간 김지수가 할 말을 잃은 사이에도 찬영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움직인 겁니다.”
김지수는 지금의 대답을 통해 이번 여로를 찬영이 왜 걱정했었는지 확실히 알 거 같았다.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거야.’
몬스터든 해적이든…… 전부 다.
무모한 길이라는 건 감안하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여정을 내가 잘 따라갈 수나 있을까?’
일렁이는 불꽃 사이로 반쯤 얼굴이 밝혀진 찬영을 바라보았다.
그때 찬영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좋아요. 계셔 주시면 큰 힘이 되겠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아뇨, 저는…….”
고민하던 그녀가 결심이 선 눈빛으로 말했다.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찾아온 잠깐의 정적.
그 틈을 뚫고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침묵하던 지수가 물었다.
“그런데 양찬영 각성자님은 왜 싸우십니까? 실례지만 그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이유요?”
“예, 그걸 듣고 나면 정말 모든 게 정리될 것 같습니다.”
“음, 특별한 건 없어요. 그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죠.”
대답 후 찬영이 오히려 물었다.
“지수 씨는요?”
“저는…….”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다 머뭇거렸다. 아직 밝히기엔 때가 아닌 거 같다. 말하기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개인 사정이 있는 이유라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누구나 말 못할 사연 정도야 다 있죠.”
“예…….”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찬영이 다시 물었다.
“의외인가요? 올바른 소명 의식이라도 있을 줄 알았어요?”
“네, 사실 조금은 그랬습니다.”
“음, 그래도 다신 잡지 못할 기회라서 이 일을 시작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어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까요.”
“앗! 꼭 그렇다고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네, 알아요.”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준 찬영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어요.”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왜요?”
“솔직히 타인을 위해 많은 곳에서 희생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삶이란 건 나만 살아남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모두가 있어야 내가 있는 거죠. 그래서 자처하는 겁니다.”
“모두가요?”
“네, 모르는 사람과 인연을 맺기도 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 혹은 친구, 가족, 동료가 모두 살아 있어야 삶이죠. 소멸은 그 모든 게 사라지는 거잖아요. 전, 그게 싫은 거고. 물론…….”
찬영이 말을 마친 뒤 불쏘시개용으로 들고 있던 기다랗고 굵은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제가 지구에 벌어 놓은 돈도 제법 돼서 은퇴 후 사용할 재산을 지켜야 되거든요.”
‘픽’ 하고 잠깐 웃은 지수를 보며 찬영이 다시 물었다.
“결정이 끝났나요?”
재차 묻는 그에게 지수가 대답했다.
“안 떠날 겁니다. 이미 수백 번 고민해서 온 길이기도 하고,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전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떤 거죠?”
“양찬영 각성자님을 보필하는 일입니다.”
의외의 대답이라 찬영이 콧잔등을 긁었다.
“보필이란 단어는 너무…….”
찬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부담스러운데요.”
“그러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양찬영 각성자님은 서먼 홀부터 블루게이트에 이른 지금까지 매번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부득이하게도 그랬죠.”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 중 하필 양찬영 각성자님이 갓피스가 되신 특별한 이유요.”
“그래서요?”
“하시는 일을 돕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저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견고히 생각을 정리한 걸 재차 확인한 이상 다신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그래요. 이제 한숨 푹 자요. 비가 좀 줄어들면 이동할게요. 불침번은 제게 맡기고.”
“아뇨,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자 둬요. 일주일 내내 잠 안 자고 버틸 수 있어요? 난 돼요. 지수 씨는?”
“그럼 눈 좀 붙이겠습니다.”
냉큼 자리에 눕는 그녀를 보며 찬영은 피식 웃었다.
* * *
“그르릉! 음냐……. 엄마!”
잠꼬대가 어째, 천둥소리보다 크다.
“적진 안에서의 노숙이라서 긴장된다고 하더니만, 원…….”
세상에…… 지수는 자고 있다. 잠꼬대까지 하면서.
자고 있는 그녀를 웃으며 바라보던 찬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환해놓은 아슬란을 내려다봤다.
-프라이의 아슬란 +1
세트 형 : 프라이의 북빙진기 보유 시 북풍천하北風天下 발동 가능
-가치 : 9,600
-효과 A : 적중 시 빙결 효과 발생
-효과 B : 마나 70 소모 시 주문 없이 2서클 아이스 스피어 발동
-효과 C : 아이스차징 20회 연속. 회당 마나 100 소모.
-효과 D : 마나 2,200 소모 시, 반경 10m 주문 없이 5서클 아이스 랜드 발동.
‘엄청난 변화야.’
아슬란의 변화는 비단, 능력 부문에서만 달라진 게 아니다. 손잡이가 새하얀 색으로 변해, 푸르고 날선 검신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하지만 형태만 변한 게 아니다.
아슬란의 변화가 가져온 영향이 지대했다.
‘북빙진기가 성장했지.’
찬영은 아슬란을 끌어안은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북빙진기를 통해 휘몰아치는 마나가 내부에 도도히 흐른다.
푸른 별의 북빙진기北氷眞氣 세트
-가치 : 6,480
-숙련도 : 24%
-수水 속성 친화력 30% 상승
-북평검 중첩 발동 시 확산 범위 4% 증가
-북풍천하北風天下(아슬란 보유 시. 1초당 마나 400)
-북빙진기 1회 운기를 통한 마나 획득량 기준으로 1% 증가(아슬란 착용 시)
보통 마나 심법 훈련을 통해 얻는 건 점진적인 마나 증가이다. 극소량이긴 하지만 꾸준한 심법 수련으로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제 아슬란을 쥐고 북빙진기를 훈련하면 1회 운기를 통해 얻는 마나량의 1%를 더 획득할 수 있어.’
말이 쉬워 1%지, 이는 기존의 운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선 1% 추가를 뜻한다.
스스로 훈련해서 얻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수치다.
한데 아슬란의 성장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후우.”
푸른 입김과 함께 가볍게 1회 운기를 마친 찬영이 푸른 안광을 빛냈다.
‘북빙진기의 성장으로 인해 섬뢰보와 북평검은 전보다 더 날카로워지고 빨라질 거야.’
방금 전의 수련 덕분인지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훨씬 또렷해진 찬영의 시선이 어느새 반대편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구슬을 향했다.
‘놀랍네.’
푸른빛의 티 없이 맑은 구슬, 3차 20회 보상이다.
녀석과 아슬란을 함께 쥐고 훈련을 하고 나니 체감상 성과가 2배는 늘어난 기분이다.
‘캘린더 보상 중에 가장 오래 사용하겠어.’
얻어 두긴 했지만 최근 훈련할 시간이 없어 잠시 미뤄 두었던 이 장비는 직접 사용해 보니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훈련용 장비였다.
그도 그럴 게 푸른 보주 역시 수 계열 심법에 한해 1회 운기 시 마나량 1%를 더 획득할 수 있게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즉, 이것으로 인해 1회 운기 할 때 늘어나는 마나량을 기준으로 2% 정도를 추가 획득할 수 있게 된 셈.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밑거름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만족스럽다. 하지만 더 큰 성취감과 충족감을 원한다.
하루라도 빨리.
스륵!
자리에서 일어난 찬영이 어둠 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왔구나.”
기다리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