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제이나는 생각에 잠겼다.
고모라와의 대화를 생각해 봤을 때 녀석이 걱정하는 건 죽음이 아니다.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긴 하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죽는 걸 환영하는 척이라도 할 거다.
그렇다면 놈이 두려워할 건 하나뿐.
‘조직에게 버림받는 거겠지.’
그녀는 그걸 이용해 보기로 했다.
“나 역시 너희들이 입이 무겁다는 건 익히 겪어 왔다. 그러니 네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쯤은 충분히 예상했어. 그래서…….”
말끝을 흐린 그녀가 냉담한 눈길로 고모라를 향해 덧붙였다.
“몇 가지 얘기만 전해 주도록 하겠다. 결정은 네 몫이야.”
이 얘기가 어느 정도 고모라를 흔들어 놓을지 확실히 직감하긴 힘들었다. 하나, 이 이야기를 듣고도 계속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어려울 것이다.
“우선 네가 남긴 연구 기록지를 투항의 증거라고 국왕폐하께 보고드릴 생각이다. 몇몇 끄나풀은 그 보고를 상부에 전달하겠지. 네가 배신했다는 얘기가 순식간에 그들에게 전해질 거야.”
고모라가 눈을 부릅떴다.
슬슬 흥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걱정하고 있어.’
놈이 부담을 느끼는 게 확실하다.
그럼 이제 폐부 깊숙이 파고 들어갈 이야기를 던질 때다.
“우린 너희가 상부에 이 일을 전달하지도 못했다는 걸 알아. 그러기도 전에 소탕 당한 게 분명하지. 하지만…….”
제이나가 쐐기를 박았다.
“그걸 네가 도왔다고 바꿔서 덧붙일 거다. 내부의 조력 덕분이었다고, 그 조력자가 바로 네가 되는 거지.”
고모라의 눈이 당장 터져 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구속구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덤벼들었을 기세다.
그러나 제이나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말했다.
“그 뒤 우린 널 풀어 줄 것이다. 배신자라는 걸 너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 되겠지.”
이어서 허리를 숙인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비수 같은 말을 쏟아 냈다.
“그때부터는 네가 자결을 택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죽어도 뉴 빌드 내에 네 불명예스러운 추문이 따라다닐 거야.”
스륵.
그녀가 이젠 숨이 닿을 만큼 그와 가까워졌다.
“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영혼이 되는 거야.”
위압적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처럼 서늘했다.
“안 그런가?”
마지막 말을 던진 그녀는 거침없이 구속구를 풀었다.
기익!
놈의 전신을 얽매고 있던 구속구가 풀리자마자 그녀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 네년을 죽여 버리겠어!”
고모라가 구속구를 떨쳐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빠르게 두세 번 휘둘린 주먹.
하지만 제이나는 가볍게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고모라의 주먹을 피해 냈다.
‘어리석긴.’
고모라의 주먹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스쳐가는 궤적이 제이나의 눈에 전부 다 보일 지경이다.
타닥!
주먹을 피해 낸 후 빠르게 고모라의 왼쪽을 돌았다.
놈의 등과 오금이 훤히 보였다.
빠각!
제이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그대로 내리찍었다.
“으악!”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반쯤 쓰러진 놈이 보였다.
타닷!
이번엔 발을 박차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놈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쳤다.
“커헉!”
놈이 반쯤 눈이 풀리며 쓰러졌다.
“후…….”
그제야 제이나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린 후 고모라에게 말했다.
“반항은 소용없어. 넌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니까.”
“뭐?”
고모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크윽…….”
찾아온 건 고통뿐.
“날 어떻게 한 거지?”
제이나가 대답했다.
“내가 네 마나 링크를 부수었다.”
마나 링크는 마법사의 생명과도 같다. 그도 그런 게 마나 링크는 주문을 구현할 때, 몸속에 마나가 거쳐 가는 장소다.
검사와 비교하자면 마나가 담기는 그릇.
즉, 코어와 같은 거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였다.
고모라는 더이상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린 네 죄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 신성 왕국의 백성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 자를 그냥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나?”
그녀는 그 말을 남긴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던 고모라가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고모라는 저항할 수 없는, 앞으로 다가올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 *
탁!
소형 마법진을 통해 완벽히 봉쇄된 감옥에서 나온 제이나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주에게 다가갔다.
하나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굳이 보고하지 않았다.
제이나가 2서클 마법, ‘미러 패네트’를 통해 밖에서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준비한 덕분이다.
그로 인해 방 안의 사정을 전부 투시하듯 들여다보게 된 영주는 그녀의 의중이 무척 궁금했다.
“그가 자결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건 무책임한 대답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그에게 다른 정보를 얻어내긴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회유할 수도 있지 않나?”
“그가 마나 링크를 부순 저희들에게 순순히 협조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하긴, 그건 그렇겠지.”
“네, 하지만 그보다 이번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뉴 빌드에 충성하는 자가 죽이겠다는 말에 두려워하며 입장을 바꿀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뭘 두려워할 지를 고민해 보고 움직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영주의 가신들과 심문에 함께 참관하게 된 W.A.L. 의장인 찰스 모두 어떤 반박을 하지 못했다.
뉴 빌드의 슬로건은 ‘멸망’을 숭배하며 이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자처하는 건 혼란과 죽음.
그 한가운데에 있는 일원이 죽음을 걱정한다? 그건 확실히 제이나 말대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하나, 앞으로가 문제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이를 찰스가 제기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군요. 그가 배신자가 된 것에 자괴감을 느낀 건 충분히 봤습니다만, 그게 우리가 원하는 충분한 정보를 내어주는 데에 협조한다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제이나의 시선이 찰스를 향했다.
하나,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그 부분을 가장 오래 고민한 게 사실이긴 했지만.
그녀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는 배신자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 뭘 할 수 있을 지 고민하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 갈 겁니다.”
“그렇겠죠. 아니면 최악의 경우, 반대로 무기력함을 느끼고 자결을 택할 수도 있을 겁니다.”
찰스가 계속 말했다.
“하나 그 부분은 굳이 반박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 역시 제이나 경이 택한 방법보다 나은 방법이 떠오르진 않으니까요.”
괜한 걸로 지적하지 않겠다는 찰스의 깔끔한 태도를 눈여겨 본 영주가 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래, 그의 말이 맞네. 확실히 놈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정보를 수집하는 것엔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아뇨.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는 마나를 잃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습니다. 여전히 4서클 마법사의 정신력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그녀의 눈이 빛났다.
“지금의 그라면,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방법을 꺼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지켜보던 찬영은 그녀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고 엷게 미소 지었다.
맞다.
그녀 말대로 때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처음부터 로우지란 패를 꺼내들 작정이었던 거구나.’
로우지는 이제껏 접어 둔 패였다.
제이나를 통해 알게 된 고모라의 마나량은 4서클 수준.
그 말은 곧 그가 4서클이란 얘기였고, 이곳에 모인 이들은 로우지가 4서클 마법사의 정신력을 압도할 만큼의 실력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로 인해 모두가 그녀를 배제했던 거다.
하나 그럼에도 제이나는 그녀를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패로 생각하고 움직였던 모양이다.
‘분명히 도박이야.’
극단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게, 4서클 마법사가 마나를 잃었다고는 해도 정신력이 완벽히 무너졌다고 볼 순 없다.
로우지라는 패가 통하지 않으면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이유가 사라진다.
‘하지만 제이나 말대로 뉴 빌드 조직원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어.’
찬영도 그 점에 동의했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자들이나 다름없는 그들에게 어설프고 쉬운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녀처럼 완벽히 흔들어 놓는 게 나을지도 몰라.’
찬영은 어쩌면 제이나의 계획이 제대로 들어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침묵하던 영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뭘 기다리나?”
결국 제이나의 뜻에 따르겠다고 선언한 영주.
그가 찰스를 보며 말했다.
“그대도 내 뜻에 따르겠나?”
“그러시지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군요.”
의장인 찰스마저 동의했다.
곧바로 로우지가 영주 앞에 불려 왔다.
찰스에게 모든 얘기를 듣게 된 로우지는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고모라의 기억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영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듣고 왔습니다만, 그런 게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 역시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네. 그러나…….”
잠시 말을 멈추고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영주.
그가 힘주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를 알면서도 그대에게 이 일을 청하는 것은 그대가 지금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일세.”
“하지만 4서클 마법사의 정신에 접근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마법사의 정신에 접근해 본 적이 없지요.”
“알고 있네. 여기 있는 모두가 알지.”
영주의 대답에 로우지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정신 제압에 실패하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자칫 억지로 제압을 하려다 실패하면 자신에게만 타격이 있는 게 아니라 대항하던 상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영주님.”
그건 놈으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다신 캐낼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방금도 얘기했지만 우리도 다 인지하고 있다네. 실패하든 성공하든, 어느 쪽이건 그대의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야.”
“책임 소재로 인해 주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저는…….”
로우지가 찬영을 쳐다봤다.
그와 함께 전투를 뛰어다니며 힘겨운 삶에 던져진 마을 사람들과 밀착하게 됐었다.
생존권도 보장 받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보며 하루라도 빨리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양찬영 각성자가 늘 보고 느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함께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주했습니다, 잔혹한 현실을.”
마른침을 삼킨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젠 압니다. 어째서 그가 그토록 이 모든 전투에 희생을 자처하려 했던 건지…….”
말끝을 흐린 로우지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그렇기에 이 기회가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회가 저로 인해 무산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제 실패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고통스러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부담감과 두려움.
그 모든 감정 속에서 로우지는 영주의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물론, 영주는 이번 사절단의 전권을 가진 책임자다.
즉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단 얘기.
하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찾아올 죄책감을 두려워하는군.”
로우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긍정이다.
이쯤 되자 영주도 더는 그녀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대의 뜻은 알겠네. 그로 인해 찾아온 부담도 알겠고. 하나 주저하는 것이지, 이를 거절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주겠네. 단, 사안이 사안인 만큼 오래는 못 주네.”
결국, 영주는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을 내준 뒤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 * *
로우지를 쫓아간 찬영은 야트막한 언덕에서 나무둥치를 등지고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가가진 않았다. 그녀 혼자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길 바랐고, 그녀의 생각이 어느 정도 끝나길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건 그녀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어?”
찬영이 그제야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로우지 씨.”
“언제부터 계셨어요?”
“방금 전에 따라 나왔어요.”
“그럼, 계속 기다리신 건가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찬영이 그녀의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생각은 좀 해 보셨나요?”
“해 봤죠. 하지만 어려운 문제네요.”
쓴웃음을 지은 그녀가 찬영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겁쟁이 같나요?”
“아뇨.”
“절 독려해 주러 나오신 것 아닌가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꼭, 그것 때문에 뒤따라 나온 건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또 있나요?”
“네, 용기를 불어넣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거든요.”
“그게…… 뭐죠?”
“공감이요.”
“어떤 공감이죠?”
“지금 걱정하시는 것들, 두려움, 이런 것들을 혼자서만 떠안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요. 모두가 그렇다는 걸 알고 계셨으면 해요.”
“하지만 결국 이 일을 하는 건 성공해야 하는 건 제 몫인 걸요.”
“그 일을 부탁한 건 우리죠.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죄책감과 걱정이 없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건…….”
“모두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늘, 그렇죠.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찬영이 웃었다.
“이 전쟁의 끝이니까요. 하지만, 모두 다른 것에 집중하는 거예요. 죄책감을 갖기 시작하면 무너져 버리니까. 그래 버리면 모든 게 끝나 버릴 거라는 것을 아니까요.”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줄 수 이야기는 다 해 준 것 같다.
이제 결정은 그녀 몫일 거다.
“잊지 마세요. 우린 혼자 선택하고 결정하며 싸우는 게 아닙니다. 같이하고 있는 거지. 그게…….”
찬영이 미소 지었다.
“‘공존’이라는 것일 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