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
찬영의 공격은 고모라가 대응할 수조차 없었던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고모라의 목을 향해 날아온 찬영의 수도.
쐐액! 툭!
뒷목을 가격당한 고모라의 목이 툭, 아래로 꺾였다.
기절한 것이다.
이를 확인한 찬영이 중력 필드를 해제시킨 후 고개를 돌렸다.
“찬영 씨!”
제이나가 다가와 있었다.
‘후우…….’
찬영은 제이나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화염 장벽을 보고나서 얼마나 달렸는지.’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된…….”
찬영은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걱정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진짜다.
달려오는 중에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하지만 무사하니 그걸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러니까 잠깐만 안고 있을게요.”
그 따뜻한 목소리에 고모라를 향한 적의로 가득하던 제이나도 잠시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 *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오는 길에 거대한 진흙 몬스터가 보이던데, 대체 그건 뭐죠……?”
서로 떨어진 후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찬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먼저 얘기하세요.”
“찬영 씨부터요.”
“저는…….”
찬영이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줬다.
제이나는 무척 놀라워했다.
“마을 주민들이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요.”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대로다.
절벽을 이용한 마을 잠입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도 그런 게 먼저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놈들의 통신까지 막았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그들은 매번 신전에 모여 다른 지역과 통신을 한다고 하더군요. 뉴 빌드와 그곳에서 통신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럼……?”
“이젠 못 할 겁니다. 신전에 자리 잡고 있던 해적들을 전부 소탕했으니까요.”
찬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제이나는 그 눈을 마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물론 그가 든든했고 늘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왕국의 일에 휘말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냉혹해져 가는 게 눈에 선히 보였기 때문이다. 점차 피가 튀는 전장에 익숙해져 갔었던 자신의 한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굳이 언급해도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우린 계속 가야 해.’
그도, 자신도 모두.
그렇기에 그저 할 수 있는 건 서로의 손을 잡고 앞을 보는 것뿐이다. 언젠가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아버지도 그러셨나요?’
문득, 희망을 품으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제야 그 가르침이 이해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이나?”
그때, 어깨 위에 느껴진 찬영의 손길.
그로 인해 상념을 접은 그녀가 눈을 돌렸다.
“네.”
“무슨 일 있습니까?”
“없어요. 하지만…….”
제이나가 골렘이 나타난 진입로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영주님이 계신 곳에는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들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 * *
“고작 이런 구슬 하나에 그 고생을 했다니…….”
기어코 골렘을 쓰러트린 영주는 기세를 몰아 전 병력을 마을로 진격시켰다.
그 후, 소수의 마법사와 자리에 남은 영주는 골렘의 원동력이었던 핵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핵의 크기는 성인 남자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사백의 병력이 고전을 면치 못 한 걸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짜증도 좀 나는군.’
가볍게 인상을 찌푸린 영주가 구슬 주변에서 구슬 내부를 조사하고 있는 마법 병단의 마법사들을 지켜봤다.
아마, 곧 골렘이 어떤 식으로 작동됐는지에 대한 보고가 이뤄질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작은 시골 마을에 골렘까지 동원한 것인가? 골렘은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한 마법 병기가 아닌가? 뉴 빌드…… 무엇을 노리는 것이더냐?’
영주는 뉴 빌드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아 호위를 맡고 있는 부단장, 크루거 경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크루거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이름이신지요?”
“골렘 말이야. 뉴 빌드가 이 마을에 골렘을 가져다 놓은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로일 영주님에게 향할 저희의 원군을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우릴 견제하기 위한 용도였겠지. 한데, 왜 로일 영주님을 노렸을까?”
“그건…….”
말문이 막힌 크루거 경이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지?’
그러고 보니 뉴 빌드가 영주님의 말대로 빅토르 지방일 이유가 뭐가 있을까?
크루거 경 역시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뭘 그리 고민 하나?”
영주가 묻자 크루거가 대답했다.
“빅토르 지방을 목표로 삼을 만한 이유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 무엇일지는 쉽게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나, 뚜렷하게 보이는 건 우선…….”
영주가 뼈만 남기고 소멸되어 버린 해적들을 돌아봤다.
“해적과 공조하는 것만 봐도 그들이 수로를 장악하겠다는 뜻을 알 수 있지.”
“샤이닝해를 말입니까?”
“그렇네. 샤이닝해를 장악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지.”
그 말을 뱉은 영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해안을 완벽히 장악한 그 다음은?’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려 봤다.
샤이닝해는 대륙의 북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바다이다.
북동쪽으로 배를 몰면 신성 왕국의 수도가 있는 트리븐 지방을 지날 수 있고 더 나아가면 혹한의 제국이라 불리는 오딘의 유타 지방과 인접하게 되는 해안인 것이다.
한참 생각하던 영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큰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일세. 놈들은 해안에 있는 수많은 섬을 거점 지역으로 삼고, 빅토르 지방에 자리를 잡으려는 거였던 게 아닌가 싶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혼란에 접어들었다 하더라도 왕국의 국력은 제국에 비견됩니다.”
“아네, 우리가 제국들과 국력이 비등함에도 제국이라 지칭하지 않는 것은 늘 여신께로 향하는 마음을 낮추고 겸손히 하겠다는 뜻으로 한 것임을. 하나…….”
영주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국력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각개격파 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세. 우리 또한 그랬지 않나?”
영주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대륙 복원이 진행됐는데도 각 지방에 원군을 보내거나 혹은 수도의 사절단이나 전령도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듣고 있던 크루거 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큰일이군요.”
현재 다른 지방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 없으나 왕국이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영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거 경의 말이 맞다.
하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큰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 그 말이 맞네. 큰일이지. 그러나 이건 그저 그들의 교두보에 불과한 일일 거라는 생각까지 드는군.”
“교두보라 하심은……?”
영주가 대답했다.
“우리가 어딜 가는 길이었었나?”
“수도이지요. 허면, 설마?”
“그래. 로일 영주를 돕지 않으면 이곳은 뉴 빌드의 거점 지대가 될 테고, 그 이후엔…….”
영주가 왕성이 있는 방향을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놈들은 수도로 진격할 걸세.”
그때 영주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쉽게는 안 될 겁니다.”
“음?”
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영주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야 한편에 찬영과 제이나가 기절해 있는 남자를 옆에 툭 던져 놓는 게 보였다.
“돌아왔군.”
영주가 반기자 찬영은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골렘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나타났었지. 지금은 핵을 채취하는 중이고.”
영주가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등 뒤에 있는 핵을 보여 줬다. 찬영의 시선이 핵에 향한 사이, 남자를 본 영주가 물었다.
“한데, 이자는?”
찬영 대신 제이나가 대답했다.
“골렘을 소환했던 마법사입니다. 그런데, 특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플로딘을 아는 것 같습니다. 일부 정보를 품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녀의 사연을 아는 영주의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그대가 그토록 염원하던 끈이 여기 있었군. 아직 놈을 잡은 게 아니기에 시기상조이긴 하나……. 어쨌든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래, 하나 놈에게 캐내야 할 건 그 일만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게.”
“예. 뉴 빌드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겠습니다.”
“좋아, 그건 그대에게 맡기지.”
고모라의 조사를 그녀에게 전담하게 한 영주가 다시 찬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네가 여기 온 걸로 보아 안전할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모두 안전해졌습니다.”
찬영은 곧바로 제이나에게 해 줬던 얘기들을 그대로 영주에게 전해 줬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졌다.
“다행이로군. 그럼, 자네 말대로라면 현재 마을에 남아 있는 해적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겠군.”
“예, 나머지는 영주님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겁니다.”
보고를 마친 찬영에게 영주가 어깨를 두드렸다.
“큰일을 해냈군, 늘 그렇듯이.”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로버트 경의 조언이 없었으면 이런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사실이다.
그의 조언은 분명 큰 힘이 됐고 이번 작전을 주민들의 별 피해 없이 정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하의 칭찬이 들리자 크루거 경이 꽤나 좋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주는 크루거 경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상관 밑에는 좋은 수하가 생기기 마련이지. 자네 공이 컸네.”
“아닙니다. 영주님.”
“아니기는? 영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세, 어흠!”
가볍게 웃으며 크루거 경을 독려한 그는 마을을 향해 걸음을 떼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세.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 어서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으니까.”
영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눈빛이 무척 날카로워졌다.
모두들 이번 마을 전투를 겪으며 느낀 것이다.
큰 전투가 앞에 놓여 있다는 걸.
* * *
고모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익숙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음…….’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자 더욱 확실해졌다.
‘여긴……?’
눈을 부릅뜬 고모라.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제이나가 들어섰다.
잡힌 게 틀림없다.
그럴 바엔 자결을…….
막을 입을 떼려던 순간.
“읍!”
턱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말조차 할 수가 없다.
‘왜지?’
당황한 그에게 제이나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증발의 구속구’라는 아티팩트다. 자결하고 싶어도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차가운 눈길을 건넨 그녀는 구속구를 착용한 고모라 주위를 걸어 다니며 말했다.
“네가 이 방 주위로 펼쳐 놓은 온갖 마법진과 장비들……. 그건 사람과 몬스터를 결합시키는 실험이 대부분이더군.”
말을 하면서도 제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실험실을 찾고 난 후 보았던 끔찍한 결과물들과 광경은 당장, 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어린아이, 임산부 할 것 없이 모두 데리고 와서 했던 네 실험과 그 과정, 결과들이 기록된 기록지까지 전부 확인했다.”
이쯤 되니 고모라는 불안해졌다.
이 모든 건 뉴 빌드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서 가능했다.
한데, 그 일부 기록이 드러났다.
이건 뉴 빌드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쌓은 꼴이 됐다.
고모라는 죽고 싶었다. 차라리 당장 혀라도 깨물고 싶을 정도의 공포가 자리 잡았다.
“너, 불안해하는구나.”
제이나는 고모라의 불안함을 눈치채고 넌지시 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게 아니다.
놈이 불안해하면 할수록 흔들기 더 쉬워진다.
특히 지금은 더더욱 놈을 흔들어 놔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보를 얻어내기 힘들다.
‘당장 놈의 자백 말고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로우지 각성자를 통해 기억을 읽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나, 로우지는 4서클 마법사인 놈의 정신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로우지의 한계이며 현재 상황의 한계이기도 하다.
특히 정신 계열 마법은 굉장히 고차원이며 어려운 주문이다. 그중 정신 타격을 주는 건 오히려 쉬운 축에 속한다.
하지만 기억을 읽어내고 삭제하는 등의 기억 조작 마법은 높은 서클의 마법사여야 가능하다. 결국, 놈이 직접 얘기를 하게끔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놈의 말에서 정보가 될 만한 거리를 찾아야겠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던 제이나는 본격적으로 고모라를 추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