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
한편, 이규복은 찬영이 본 불의 장막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마법이 얼마나 더 가능한 거지?’
마법을 마주할 때마다 마법사가 괜히 고급 인력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런 불의 장막을 이렇게 광범위로 펼칠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일 테니까.
멀찍이 보이는 제이나 경이 오늘따라 크게 느껴진다.
‘슬슬 끝이 나고 있는 건가?’
좌우지간 상황이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보다 빨리 끝날 줄 알았다.
여긴 영주님도 있고 기사단장 크루거 경과 마법병단의 단주인 제이나까지 쫓아온 대행렬이다.
병력의 숫자부터 그 수준까지 모두 우위에 있었다.
훈련되지 않은 해적과 몬스터 들이 정예 병력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예상보다 오래 걸린 건 해적들이 가진 재생 능력 때문이다.
‘당황했어.’
그건 다른 기사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이나 창에 베이거나 찔려 죽었던 해적들이 낮게 웃으면서 다시 재생되는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던 광경이었다.
그때 제이나가 활약했다.
그녀는 차원의 돌이 해적들에게 재생의 힘을 준다는 걸 눈치채고 심장에 박힌 차원의 돌을 빼 내야 한다고 전파했다.
‘그때부터였지.’
전황이 쉽게 돌아간 건 사실상 그녀의 지시가 전달되고 난 뒤였다.
다만 그러는 사이, 소수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는 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두가 희생을 각오하고 온 길이긴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동료를 보는 건 분명 슬픈 일이었다.
이규복 역시 희생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애도를 하기에는 아직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야.’
현재 전황만 봐도 그렇다. 해적들을 전멸시킬 때쯤 나타난 검은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와 그가 소환한 스켈레톤들이 또 다시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불의 장막이라면…….’
장담컨대 스켈레톤은 전부 녹아 버렸을 거다.
‘그나저나 아까 그 마법사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불의 장막 이후 완벽히 자취를 감춘 마법사의 흔적을 찾던 그때.
쿠쿵!
이규복의 표정이 굳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솟아오른 흙으로 빚어진 손이 불의 장막을 뚫고 튀어 나온 것도 모자라 양손으로 장막을 찢고 꺼트린 것이다.
“골렘이다!”
옆에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골렘?’
이규복은 골렘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골렘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맙소사, 저건 또 뭐지?’
이규복은 주위를 검은 그림자로 감싸 버린 커다란 골렘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찬영 씨에게 알려야겠군.’
그가 걱정할 수도 있다.
지금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게…….
이규복이 곧바로 우올로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움직이던 손끝이 잠시 방황했다.
‘아 참, 부서졌지.’
해적의 재생 능력에 당황하며 공격받던 병사를 구할 때 입은 충격이 우올로를 부순 것이다.
‘젠장!’
하지만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골렘의 몸뚱이가 불꽃을 찢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높이는 대략…….
‘8m는 되는 것 같다!’
거기다 형태는 거대한 고릴라처럼 보였다.
기다란 양팔로 바닥을 짚으며 전진하고, 그보다 작은 양발로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대체 무엇으로 저런 거체를 움직이는 거지?’
전혀 모르겠다. 온몸이 진흙으로 덮여 있는 탓인지 동력원이라고 추정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아예 약점 같은 게 없어 보여.’
쿵!
놈이 다시 발을 내딛자 영주의 목소리가 전장 위로 울려 퍼졌다.
“전군! 베이콥 방진!”
부웅!
영주 곁에 있던 뿔피리 든 기사들이 그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뿔피리를 불었다.
뿔피리는 정해진 대열마다 다르게 불기로 약속되어 있다.
“베이콥 방진이다!”
서로 약속되어 있는 신호이기에 사백의 정예 병력이 신속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규복도 그 속에 포함됐다.
‘마법사들을 보호해야 해!’
베이콥 방진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마법사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다.
타격을 가할 원거리 마법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최후방으로 후퇴하는 마법사들과 함께 원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일부 각성자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규복처럼 초인적 신체 능력을 보유한 각성자와 기사 혹은 정예 병사들은 전부 선두 대열에 자리 잡았다.
히이잉!
영주가 말을 달렸다.
다그닥!
선두 대열이 베이콥 영주의 뒤를 쫓았다.
마나가 실린 영주의 목소리가 피어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나를 따르라! 내가 앞장서겠다!”
영주는 어느 때보다 강인하고 신속히 움직였다.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
신속히 말을 몰아 달려 나간 영주가 앞을 가로 막는 스켈레톤의 머리부터 툭툭 베어 나갔다.
스켈레톤은 영주의 돌격을 막지 못했다.
그는 소드 오라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
영주의 뒤를 쫓던 크루거 경은 영주의 무위를 보며 피가 들끓었다.
“모두 앞장서서 적들을 물리쳐라! 영주님의 뒤만 따르면서, 과연 우리가 가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크루거 경이 뒤를 바짝 붙으며 할버드를 휘둘렀다.
후웅!
오라가 실린 크루거 경의 할버드가 스켈레톤 무리를 휩쓸자, 스켈레톤들은 접근도 못한 채 전부 허물어졌다.
두두두!
스켈레톤은 공격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밀려드는 말발굽에 짓밟혀 산산조각 나고 으깨졌다.
순식간에 골렘의 다리 사이를 통과한 선두 대열.
그 선봉에 선 영주의 검 끝에서 하얀 오라가 맺혔다.
“팔을 베어라!”
그의 검 끝에 맺힌 하얀색의 오라가 순식간에 골렘의 팔을 단칼에 베고 지나갔다.
뒤를 따르는 병력도 영주가 베어 나간 자리를 똑같이 베어 가며 말을 달렸다.
콰쾅!
단숨에 밀어붙인 선제공격에 골렘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하나 그것도 잠깐, 잘려나간 팔의 일부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골렘은 핵을 베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일 수도 있고, 재생도 계속된다고 한다.
영주는 이를 방금 확인해 봤고 알고 있던 지식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문제는 핵이 골렘의 어느 부위에 있느냐다.
‘진흙으로 덮여 있어 핵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특히 목이나 머리 쪽이라면 직접 기어 올라가 놈을 찔러 봐야 한다.
‘하지만 굳이 말이라는 기동성을 버리고 진흙 위로 기어 올라간다?’
썩 좋은 생각이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놈을 쓰러뜨린 후 해체시켜 버리는 게 낫다.’
누워 있으면 놈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도 한정적이 되고 제대로 공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공격하기도 쉬울 터!’
좀 더 수월하게 놈의 몸속을 헤집고 벨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핵을 파괴하면 골렘은 반드시 쓰러지겠지!’
말을 선회해 다른 발로 향하는 영주의 눈동자에 강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크루거 경!”
그를 부르자마자 골렘이 기마대 사이로 거대한 손을 내리찍었다.
대열을 끊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쾅!
하지만 여긴 모인 병력은 전부 정예 병력이며 수많은 던전을 탐사한 실력자들이다. 이만한 공격에 휩쓸리지 않는다.
말을 탄 대열이 순간적으로 산개했다가 다시 대오를 갖추며 영주의 뒤를 따랐다.
영주가 무사히 따라온 크루거 경에게 외쳤다.
“6대대를 데리고 왼팔을 맡게!”
“알겠습니다!”
크루거 경이 말을 선회해 6대대와 함께 골렘의 왼팔로 돌진했다.
그렇게 두 개의 대열로 나뉜 기마대가 골렘의 하중을 무너트리기 위해 움직였다.
* * *
“이익!”
고모라는 이를 갈았다.
스켈레톤은 물론 사력을 다해 만든 골렘조차도 놈들의 앞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하고 있었다.
‘도움도 안 되는 것들!’
특히 해적들은 몸에 박혀 있던 유혹의 돌을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죽어 버렸다.
‘그걸 전부 빼앗기다니…….’
뉴 빌드에서 유혹의 돌을 내어 준 건 이 마을이 중요 거점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런 데다가 유혹의 돌을 전부 빼앗겼다. 골렘까지 사용한 배수진도 얼마 가진 못할 것 같았다. 설사 골렘이라고 해도 오라를 사용하는 실력자들로 득실거리던 그 병력을 막는 건 아주 잠깐일 테니까.
한데…….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고모라는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멸망 이후 다시 모든 게 복원된 것이 얼마 전인데, 그사이에 병력을 재정비해서 다른 성을 지원하려 군사를 일으켰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 많은 몬스터까지 전부 토벌을 마쳤다면, 분명 자신들의 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랄 터인데?’
도통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일단 이 상황을 그분들게 알려야겠어.’
고모라는 그분들이 이번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아니, 로일 영주 성에 포진된 모든 뉴 빌드가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방심하는 사이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게 될 거다.
자신처럼.
‘통신구, 통신구부터 찾아야 한다.’
마법 통신구는 가장 경비를 삼엄하게 해 둔 신전에 놓아 뒀다.
‘우선 그곳으로 가서…….’
하지만 그의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스륵!
뭔가가 날아온 것이다.
‘그년이다!’
흠칫 하며 물러난 고모라의 눈앞으로 얼음 창 여섯 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쐐액!
기습적인 공격.
고모라도 황급히 마법을 구현하며 물러났다.
채채채챙!
허공에 구현된 화염 창 6발이 날아온 얼음 창을 막으며 함께 흩어졌다.
“헉……헉.”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낸 고모라의 시선이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는 은발의 여인을 향했다.
“날 어떻게 쫓아왔지?”
제이나가 허공에 ‘아이스 스피어’를 재차 구현하며 대답했다.
“베이콥 영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내게 너를 전담하라 말씀하셨지. 처음부터 내 목표는 지금까지 너였다.”
골렘이 소환되는 순간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고모라가 이를 갈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태연한 척 했지만 더는 몸을 피할 수 없을 거 같다.
아까 본 제이나의 화염 장벽.
거기서 느껴진 마나량은 4서클 그 이상이었다.
‘나보다 강하다.’
그런 데다가 뉴 빌드의 높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골렘까지 써 버린 마당이니, 고모라는 제이나의 시선을 돌릴 만한 다른 대비책이 없었다. 이젠 정말 죽을 각오로 임해야 했다.
‘오냐, 이판사판이다.’
생각을 마친 고모라가 제이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럼, 피할 데가 없겠구나.”
“알면서 물러나는 건 두렵기 때문인가?”
“웃기는군. 두렵다면 이곳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잘됐구나. 그럼 하나 묻자.”
제이나는 찬영을 바라볼 때와는 정반대의 차가운 눈빛으로 적을 노려봤다.
“넌 암흑 마력이 아닌 마나를 쓰던데……. 뉴빌드에 속한 마법사라는 얘기겠지. 하면, 플로딘을 아나?”
순간 고모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그분을 어찌 알지?”
오히려 다시 묻는 고모라에게 제이나의 눈동자에 살의가 뒤섞였다.
“안다는 얘기구나.”
“헤이스트!”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제이나가 땅을 박찼다.
‘놈을 반드시 생포해야 해!’
죽여선 안 된다. 저 마법사를 죽이게 된다면 제이나는 플로딘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포하는 건 죽이는 것보다 힘들다.
“어림없다!”
그때 고모라가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한 번 죽을 작정이었다. 한 번은 죽어야 몸속에 박힌 유혹의 돌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테니까!
그리만 되면 마나량에선 밀리지 않을 거다!
“슬로!”
이를 눈치 챈 제이나가 황급히 마법을 걸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법이 무효화됐다.
‘슬로가 안 통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이나가 눈을 부릅뜨자, 고모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네년이 슬로를 사용할 줄 알았다!’
같은 서클의 마법이라면 몸에 적용되는 마법을 1회 튕겨 낼 수 있는 ‘매직 바운스’를 사용한 건 순전히 도박이었다.
플로딘에 대해 묻는 걸로 보아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았고, 생포하기 위해 슬로를 걸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네년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슬로를 무효화시킨 고모라가, 들고 있던 단검을 자신의 심장에 내리꽂으며 외쳤다.
이제 곧 죽음이 다가올 테고, 다시금 부활해 아까보다 훨씬 높은 마나량으로 저년에게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그 순간, 고모라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너 역시, 그럴 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 중력이 고모라의 사지를 옭아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