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
“끅, 끅!”
한쪽 눈을 잃은 해적을 냉담히 내려다봤다.
놈은 고통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쐐액! 서걱!
찬영은 놈의 남은 눈까지 마저 베었다.
“으악!”
두 눈을 모두 잃자 해적이 두려워하며 엉금엉금 물러났다.
“제발, 제발, 꾸륵, 살려 줘…….”
피를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녀석.
“너희들도 그랬나?”
“제발…….”
놈은 딴 소리를 했다. 당연히 안 그랬을 테니 딴 소리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거다.
“계속 빌기나 해.”
그래도 용서를 구할 수 없을 거다.
그게, 지금의 네 위치다.
잔뜩 화가 난 찬영의 얼굴이 일그러진 그 때.
“죽어!”
옆에서 도끼가 떨어졌다.
콱!
아내로 보이는 여인이 도끼를 들고 휘두른 것이다. 힘이 많이 실리진 않았으나, 눈 먼 해적의 목을 내려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툭!
여인은 도끼 자루를 놓은 후 눈물을 터트렸다.
뒤따라 진입한 로우지가 울고 있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다친 데 없어요? 오, 하느님!”
같은 여자로서 이 참상을 믿기 힘든 로우지는 피 비린내의 역겨움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나 보다.
“……개새끼들!”
W.A.L. 소속의 이성 따위는 이미 던진 지 오래인 양, 그녀의 눈동자에는 적의만이 가득했다.
그건 찬영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천인공노할 만한 자들이었다. 무슨 일인지 지켜보기만 하려 했다. 하나, 자행되는 폭력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이곳에 자리 잡은 자들이 뉴 빌드와 관련 있다는 확신이 있는 상황에는 그 분노가 더욱 컸다.
‘몬스터가 개입되어 있는 걸로 봐서 뉴 빌드가 이 일에 관여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놈들과의 대면이 잦을수록 지독한 야욕에 몸서리났다.
“크륵…….”
그사이 숨통을 옥죈 신성력 쇠사슬에 서서히,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어가는 나머지 두 해적.
‘홀리 웨폰.’
그 둘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찬영이 신성력을 통해 아슬란 형태로 만든 검으로 한 놈의 목을 내리찍었다.
자비는 없었다.
이럴 각오도 없이 들어선 게 아니다.
남은 건 목이 졸려 있는 마지막 해적 한 명.
놈에게 검을 돌릴 때쯤, 여인을 위로하던 로우지가 옆으로 다가왔다.
“준비됐어요.”
“예, 시작하시죠.”
찬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문 밖의 망을 봤다. 당장 베고 싶으나, 놈을 제거하는 건 본래 하려던 일을 마무리 짓고 해도 늦지 않다.
“메모리 디텍트.”
그녀의 손에 은은한 휘광이 감돌더니, 동공조차 손이 흘리는 색과 동일해졌다.
기억을 읽어가는 과정일 거다. 그동안 찬영의 시선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여인과 마주쳤다.
“누, 누구시죠?”
격렬했던 상황이 지나자, 여유가 생긴 건지 그녀의 눈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의식이 혼미한 남편을 안은 그녀의 질문에 찬영은 베이콥 영주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그들을 안심시키기 적절할 타이틀 같았다.
“……그래서 알폰 지방에서 온 겁니다.”
이를 들은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밀려드는 희망에 안도한 거다.
“흑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누구든 나섰을 거라고 생각한다.
“후우…….”
그때쯤 로우지의 동공이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적의가 담긴 말을 내뱉은 그녀.
하나, 목소리에 조금 힘이 빠진 것 같다.
‘창백해졌군.’
방금 사용한 이네이트로 인해 정신, 혹은 체력적 소모가 상당한 거 같다.
하지만 적의가 가득한 눈빛은 그대로다. 오히려 기억을 읽기 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알아낸 게 있으십니까?”
“많이요.”
“어떤……?”
“이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은 바오트 해적 소속이 맞아요. 쿠벡 섬에 자리 잡고 있다가 전란 사이에 주변 중소 해적들을 집어삼키며 성장한 거죠. 이곳을 장악한 녀석들도 그중 하나였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여인을 쳐다봤다.
“부인,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녀의 처지가 어땠는지 확실히 알게 된 로우지가 찬영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며 지금의 상황을 전달해 줬다. 험한 일을 당한 그녀가 겪은 일을 대놓고 크게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초지종을 전부 들은 찬영의 눈동자에 살의가 스쳤다.
“뼛속까지 썩은 녀석들이군요.”
“맞아요. 죽어도 시원찮은 녀석들이었더군요.”
꿀꺽, 말을 마친 그녀는 피 비린내에 구역질이 났지만 억지로 꾹 참았다.
그러는 사이 찬영이 말했다.
“그럼 놈들은 지방에 속한 마을 곳곳에 미리 자리를 잡고 영주성의 병력들을 분산시킨 겁니까?”
로우지가 대답했다.
“예, 맞아요.”
놈들은 교활했다. 먼저 해적이 출몰했다는 소문을 로일 영주가 있는 영주성까지 퍼지게 했다. 그 후 지방에 속한 마을 각지로 퍼져 마을 자치대를 제거해 마을 사람인 척 가장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파견 나온 기사들과 정규군이 적대시할 리는 없을 터, 놈들은 그 점을 노려 그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건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로일 영주의 병력 규모를 분산시켜 각개 격파했고 안정적으로 규모를 키울 수 있게 됐다.
혼란 속에 이들을 따르는 해적 앞잡이들이 생겨나는 건 금방이었다.
“놈들의 규모는 상당해요. 이미 여러 마을에 걸쳐 바오트 연맹이 생겨났을 정도인 것 같네요.”
찬영이 반문했다.
“해적 연맹인가요?”
“그렇겠죠.”
“지도자는 누굽니까?”
로우지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군다 바오트요.”
찬영은 앞으로도 계속 들을 이름 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렇겠지.’
즉, 누구라도 나서서 해적에게 착취당하는 영지민을 구해 내야 했다.
찬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군다 바오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로우지가 기절한 해적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어디까지나 이자의 기억을 토대로 알아낸 정보니까요.”
“하긴…….”
아무래도 중요한 정보는 알 것 같지도 않은 조무래기이다 보니, 해적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만을 알 것이다.
하나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하수인이라고 할지라도…….
“마을 병력 배치에 대한 기억은 없었습니까?”
여길 장악하고 있으니 충분히 남아 있는 기억이 있을 거다.
로우지가 대답했다.
“물론 있죠.”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찬영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네 개의 탑 주변으로 병력 배치가 되어 있어요. 한때 신전이었던 첨탑이 베이스캠프인 것 같아요.”
“나머지는요?”
“몬스터를 방패막이로 세워두고 망루 두 개를 전면 배치 해 놨어요. 그것 외엔 세 명의 해적이 각 구역마다 순찰을 도는 것 같아요. 인원 체크 같은 거죠.”
“그럼 방금 죽인 녀석들이…….”
“맞아요. 이 구역의 순찰대였던 셈이죠.”
“소식이 끊기면 조만간 추가 증원대가 몰려오겠네요.”
“틀림없이요.”
말을 마친 로우지가 떨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찬영도 그 점에 충분히 동의했다. 이들을 그냥 두고 갔다가는 몰려오는 해적에 의해 전부 죽게 될 거다.
그 꼴을 볼 순 없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찬영이 우올로를 켰다.
치칙!
“대리님, 들리십니까?”
-예. 그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안 좋아요. 많이.”
-이런. 그럼, 가신 일은 완수하신 겁니까?
“완수는 했는데 상황이 썩 좋지 않아서요. 영주님께 출정 준비를 부탁드려 주세요.”
-때가 됐군요.
“예, 움직이실 신호는…….”
찬영이 스툼을 내려다봤다.
“자연히 아시게 될 겁니다.”
* * *
10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녀가 해적 무리에 갇혀 있었다.
안대를 하고 있는 소녀는 손을 바동거리며 풀썩 쓰러졌고 거친 해적의 손이 소녀를 다시 일으키며 외쳤다.
“얻어맞기 전에 일어나! 크큭!”
소녀는 일어나지 못하고 빌었다.
“보내주세요……. 제발요. 흑흑, 엄마!”
“이년이!”
소녀 옆에 있던 해적이 채찍을 치켜들자.
“어허, 참…… 애한테 그런 걸 들면 쓰나?”
입을 연 거구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한때, 마을 신전의 교구를 맡는 주교가 예배를 올릴 때 쓰던 단상 자리였다. 하나 단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여신상도 온갖 낙서와 핏물로 가득했고 죽어 있는 시신도 벽면에 걸려 있었다.
터벅터벅.
단상을 걸어 내려온 거구의 털보는 요하임.
조그만 부크 해적을 이끌다가 군다 바오트에게 신임을 얻어 중요 거점인 라쿤 마을에 자리 잡은 해적이었다. 키가 2m에 이르는 요하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정상적으로 큰 손은 소녀의 머리를 한 손에 감싸 쥐고도 남았다.
“흑흑, ……엄마.”
울기 시작한 소녀.
요하임이 소녀를 달래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착하지? 안대도 풀어주마.”
요하임이 안대를 풀자 울먹이던 소녀가 훌쩍거리며 조금씩 울음을 멈춰갔다.
“이리 온.”
따뜻한 목소리에 소녀가 쭈뼛거리자 요하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괜찮다. 가까이 와 봐.”
소녀는 계속 머뭇거렸다.
요하임은 참을성 있게 소녀를 기다리며 끌어안아 주겠다는 양, 두 손을 뻗었다.
이곳에서 소녀가 기댈 곳은 없었다. 나쁜 사람인 걸 알면서도 다가가는 건 소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두렵게 주위를 둘러보던 소녀가 한 걸음씩 요하임에게 다가가자 이를 흐뭇하게 보던 요하임이 말했다.
“그래, 착하지. 그럼, 옷부터 벗어 볼까?”
순식간에 변하는 요하임의 표정. 웃고 있던 미소가 지워지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소녀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네?”
순간 소녀가 자리에 꼼짝 없이 얼어붙었다.
요하임이 다시 말했다.
“아저씨 말을 잘 들어야 집에 보내 줄 거야. 얼른 옷 벗으렴.”
요하임은 어린 소녀를 데리고 노는 걸 즐기는 변태였다.
“아, 안돼요!”
아이가 다시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요하임의 표정이 굳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눈동자.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위압감이었다.
“왜 안 돼. 미친년아.”
반항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통을 잡아챈 요하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쾅!
“대장!”
막 요하임이 소녀를 데리고 놀려고 할 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해적이 그를 방해했다.
“이 개새끼가!”
방해 받는 것에 화가 난 요하임이 성난 눈을 보이자, 소식을 가져온 해적은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시계탑에 부, 불이 났습니다!”
“불이 왜 나?”
“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 기분 더럽네! 한창 좋았는데…….”
머리를 잡은 소녀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보던 요하임이 소녀의 어깨를 툭 옆으로 밀쳐 버렸다.
“아악!”
쓰러진 소녀에게 등 돌린 요하임이 털 달린 외투를 입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넌, 조금 이따가 놀아 줄게.”
스릉!
커다란 낫을 집어든 요하임의 근육이 꿀렁였다.
* * *
화르륵! 쿵!
불에 탄 시계탑이 한 층, 한 층 무너지고 있었다.
“물을 가져와!”
채찍을 든 해적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소집된 마을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서서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해적들이 물을 기르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투덜댔다.
“대체 어떤 개새끼가 불을 지른 거야?”
“몰라. 이 새끼들 중 하나겠지. 다 죽여 버릴까?”
“그랬으면 재미야 있겠다. 야야, 대장 온다!”
말하고 있던 해적들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요하임이 나타났다.
“이건 어떤 개새끼 짓이지? 알아냈냐?”
요하임이 묻자 해적 두 명이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푹 고개 숙인 해적들.
“죄, 죄송합니다.”
요하임이 탐탁지 않은 눈치를 보이며 말했다.
“지랄하네……. 됐고, 여기 모인 놈들 중에 열 놈만 데려와 봐.”
기다렸다는 듯 열 명이 딱히 기준 없이 잡혀와 나란히 무릎이 꿇렸다.
불타는 시계탑 앞에 선 요하임이 불을 끄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주목!”
그 외침 한 번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들려오는 건 시계탑 타는 소리와 마을 사람들의 울먹이는 신음 소리뿐.
“솔직히 말해 봐, 누가 했냐? 지금 나오면 팔 하나만 자르고 넘어가마. 안 나오면 하나씩 죽인다.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잘 알거다.”
끌려 나온 사람들의 가족들이 안 된다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요하임은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안 나오는구나. 너희 서로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
건들거리며 귀를 후빈 그가 낫을 들고 말했다.
그 순간 마을의 진입로에서 날 선 괴성이 들렸다.
-키에에엑!
그 소리를 들은 해적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건 요하임도 마찬가지.
눈을 빛낸 요하임이 해적들에게 외쳤다.
“트랩 터지는 소리 났었냐?”
해적들이 고개를 젓자, 요하임이 해적 하나의 멱살을 낚아채 외쳤다.
“고모라 님 깨워라. 트랩이 해체됐다고 전해! 웬 개새끼들이 나타난 거 같다고!”
“아, 알겠습니다!”
요하임의 명령을 받은 해적이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해적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자마자 요하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어떤 자식들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적들 중 일부가 요하임을 향해 소리쳤다.
“대, 대장님! 시계탑 위에 누가 있습니다!”
“뭔 개소리야! 적이 나타났다니까 두려워서 벌써 허깨비가 보이냐? 시계탑에 있으면 누가 있다고…….”
서서히 고개를 쳐든 요하임.
그의 시야 한 편에 부서져 내려앉기 시작한 시계탑 최상층부가 들어왔다.
한데…….
“미친.”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분명했다.
검붉은 물체가 불타는 시계탑 안에서 걸어 나왔다.
아니, 나오고 있었다.
“뭐야?”
놈이 보고 있던 순간 사라져 버렸다.
‘어디 갔지?’
믿기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시계탑을 보던 그때,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 모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