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
쐐애애액! 휘이익!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후웁!”
로우지는 헛바람을 들이 삼켰다.
‘오, 맙소사…… 하느님!’
밑을 내려다볼 여유도 없다. 아니, 업혀 있는 신세라 내려다볼 수조차 없다. 그럴 수 있었더라도 그러진 않았겠지만!
잔뜩 겁에 질린 로우지가 찬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찬영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반동을 주며 절벽 위를 오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여기는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떨어지는 천 길 낭떠러지의 중간 지점.
기억 관련 이네이트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신체 능력을 가진 로우지가 버티기엔 분명 고된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체득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을 가진 그녀를 반드시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
푸스스!
절벽에 붙은 돌을 쥐고 몸을 지탱한 찬영은 떨어지는 돌가루를 반대편 손으로 툭 털어내며 힐끗 옆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등에 닿는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져서 물어봤다.
그러자 쌕쌕거리며 붙어 있던 그녀가 등껍질에 숨은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묻지 말고 얼른 가요. 제발.”
찬영은 짐짓 웃음을 지은 뒤 다시금 절벽 위를 올려다봤다.
‘후우.’
아직도 갈 길이 머니, 그녀 말대로 어서 가야 한다. 찬영은 운무가 낀 상층부를 올려다보며 다시 손을 뻗었다.
푸스슥!
순간 발을 기대고 있던 돌이 부서지는 게 느껴졌다.
‘음?’
그냥 바깥쪽이 부서진 게 아니다.
분명 쪼개지고 있다. 직접 돌아보지 못했지만 예민해진 감각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꽉 잡아요!”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대처해야 해!’
뭘로?
찬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혼자였다면 블링크를 통해 단거리 순간 이동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링크는 마법을 구현한 사람만 이동이 가능하다.
그녀만 추락시키고 싶지 않다면 이건 불가능하다.
그럼, 스툼을 통한 에어 펀치는?
‘아니. 지금으로서는 최악의 한 수가 될 거야.’
스툼도 커다란 소음을 동반하는 장비다.
잠입을 하려는 지금, 스툼을 사용한다는 건 대놓고 잠입을 하겠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
하면 남은 건 하나.
파짓!
그사이 발끝의 돌이 완전히 부서졌다.
이젠 움직여야 한다.
“어, 어?”
당황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중으로 드러누웠다.
부웅!
빙글, 몸을 돌리면서 훤히 내려다보는 절벽 아래.
휙휙.
진공나찰보를 택해 허공을 박찼다.
펑! 펑!
찬영은 두려웠지만, 이제껏 겪은 수많은 경험이 있다. 차분히 하면 된다, 늘 그랬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부드럽게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쐐액!
허공을 디딤대 삼아 방향을 선회한 찬영이 그 탄력을 통해 다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리던 그때.
스르륵!
그녀의 손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안 돼!’
등지고 있던 몸을 틀어 황급히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기절했어!’
스치듯 확인한 눈이 반쯤 감겨 있다. 허공에 몸이 던져진 동안 혼절한 게 틀림없다.
쐐애액!
설상가상. 균형을 잃었다.
콰콰콰!
진공나찰보는 마나와 몸의 타이밍이 계속 맞아 들어가야 하는 예민한 제어가 필요한 이네이트다. 추락은 당연했다.
쐐액!
그뿐만이 아니다. 밀려드는 풍압에 떠밀린 그녀가 점점 손끝을 벗어나려 했다.
‘속도가 점점 붙는다!’
이대로 가다간 처음 출발한 곳까지 금세 도착하게 될 거다.
둘 모두 온 몸이 뭉개진 채로.
‘어림없지!’
그러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니다.
눈을 부릅뜨고.
‘공진.’
전투가 아니면 꺼내들지 않으려 했던 카드를 꺼냈다.
검붉은 망토가 순식간에 찬영의 몸을 둘러쌌다.
‘광화.’
시야가 방금 전보다 명료해졌고 훨씬 여유가 생겼다.
스텟 300% 상승 덕분이다.
파밧!
우선 로우지부터 챙긴다.
탁!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멀어져 가는 절벽을 올려다봤다.
‘일단, 속도부터 줄여야 해!’
모든 면에서 300% 상승한 육체의 한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온 몸을 둘러싼 검붉은 전신 슈트가 근육을 가득, 조여 왔다.
‘진공나찰보, 염왕초혼심법.’
다시 허공을 박찬 찬영의 발끝에서 붉은 수레바퀴가 일어났다.
파지짓!
로우지를 끌어안은 찬영이 눈 깜짝할 새, 절벽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절벽은 그저 착지 지점일 뿐.
쾅!
절벽을 부수며 착지한 찬영의 발끝이…….
치칫!
푸른빛의 빙하를 일으켰다.
그때부터였다. 찬영이 세로로 세워진 일직선의 절벽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절한 이상 배려하며 움직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촤르륵!
그러자 달려가며 깨져가는 얼음 파편이 발뒤꿈치를 통해 낭떠러지 아래로 흩날렸다. 그 후 두 사람이 운무로 진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우에엑!”
절벽에 오른 뒤에 정신을 차린 로우지는 무릎을 꿇고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참기가 힘들었다.
삽시간에 일어난 고속 이동에 견디지 못한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멀미를 일으킨 거다.
“후우, 후우.”
그렇게 땅에 한참 동안 고개를 박고서야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쉬며 대자로 드러누웠다.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차라리 뛰어내리는 걸 택하겠어요.”
“지금 로우지 씨 상태를 보면 아마 누구도 다시 하길 권하지 않을 겁니다.”
“천만다행이군요.”
혀를 내두른 그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절벽 주변은 뿌연 안개로 가득했다.
“이제 어쩌죠?”
찬영이 절벽 뒤, 분지 속에 숨어 있던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생하신 만큼의 보람을 거둬야겠죠.”
“그만한 보람이 될는지 모르겠네요. 워낙, 고생을 심하게 해서.”
로우지가 걸음을 옮기는 찬영의 뒤를 따라 걸었다.
* * *
뎅뎅!
한때 신전 역할을 하던 종이 마을 전 구역에 울려 퍼졌다.
종은 본래 4개가 있다.
1개의 신전 종이 울리면 시계 첨탑에 있는 3개의 종이 마을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함께 울려 준다.
원래라면 여신을 향한 예배 시간을 알리는 게 역할로 울리던 종이기에, 이 종이 울리고 난 후의 마을은 평화롭고 활기찼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인 오른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뎅!
종이 울리자마자 그는 딱딱해지다 못해 곰팡이가 핀 빵을 쥔 채 아내를 쳐다봤다.
아내는 떨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제발.’
그도 입술을 떨었다. 영지에서 파견된 소수의 기사들이 마을의 자경단과 함께 전부 교수형에 처해진지 한 달째.
영지 전역을 온화하게 다스리던 로일 영주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갔다.
당연했다. 마을을 장악한 해적 떼에게 대항하려 했던 신관들조차 목 매달린 기사들 옆에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교황에 의해 파견 되는 성기사들 또한 기다려 보았다.
그러다가 잿빛 멸망이 찾아왔다. 당시엔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거면 차라리 소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금 생지옥 위에서 깨어났다.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눈을 떠 보니 모든 게 그대로였다.
해적들은 여전히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고 어디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그냥 날 죽여 줘요…….”
빵을 놓은 그녀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오른은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것 말고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 줘서 정말 미안해.”
아내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오른은 그 이유를 잘 안다.
아내가 해적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게 보름 전이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 흘렀고, 아내는 또 다시 해적들 손에 끌려갈 거다. 사실 지금의 종은 그런 의미다.
해적들이 마을의 여자들을 일부 데려가겠다는 것. 하지만 더욱 잔인한 건 놈들의 행태였다.
놈들은 남편이 있는 아내도 데려갔다가 몹쓸 짓을 해 놓은 뒤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키며 주기적으로 여자들을 번갈아 끌고 갔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가진 수확물, 재산 등을 모두 압수해 가고 생존 할 수 있는 극소량의 식량만 내주는 거다.
생지옥의 악순환이다. 사실 같이 죽으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악마 같은 놈들!’
놈들은 마을의 누구라도 자살을 택하는 즉시, 자살한 인원수대로 마을에 있는 다른 사람을 죽이겠다는 불특정 연좌제를 선포했다.
죄책감이란 감정을 이용한 거였다.
“조금, 있으면 그들이 몰려올 거예요. 오른. 나, 나 너무 무서워요.”
“알아. 알고말고…….”
오른은 아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더 뭐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끝날 거라고?
아니, 그 따위 개같은 희망은 이미 집어치운지 오래다.
이제 놈들에게 끌려가 추악한 꼴을 당할 아내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이젠 더는 안 되겠다.’
“도저히 못 참겠어. 여보.”
오른의 눈빛에 결연함이 스쳤다.
스륵!
아내에게서 떨어진 오른이 벽난로 옆에 붙은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벌목을 해 왔다. 가업을 이은 건 오른도 마찬가지다. 힘은 웬만한 정규 병사 뺨친다.
그가 양손으로 도끼 자루를 콱 쥐며 다시 아내를 돌아봤다.
“반항하는 건 자살이 아니잖아.”
어차피 이 꼴을 당할 바엔 죽을 각오를 하는 게 낫다.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의 대문이 부서지며 해적 세 명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선 해적이 레이피어를 뽑으며 말했다.
“종이 울렸는데, 뭣들 하고 있어? 작별 인사라도 나누나?”
비아냥거리던 해적이 도끼를 든 오른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저 당돌한 새끼 좀 보게?”
그러자 그를 따라온 두 명의 해적이 피식 웃으며 오른에게 다가갔다.
“으아아!”
오른은 힘이 좋았다.
하지만 힘이 좋다고 잘 싸우는 건 아니었다.
“지랄하네.”
가볍게 도끼를 피한 해적이 지나치는 오른의 발을 가볍게 걸었다.
툭!
쿠당탕!
도끼와 함께 바닥을 구른 오른의 곁으로 두 명의 해적이 채찍을 꺼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누워 있던 오른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으악!”
비명과 함께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튀었다.
그럼에도 해적들은 신이 나선 낄낄거렸다.
“안 돼요! 안 돼!”
두려움에 떨던 오른의 아내가 쓰러져 있는 오른에게 소리치며 달려가던 그때.
“어딜 가, 이년아!”
레이피어를 든 해적이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 바닥에 넘어트렸다.
“아악! 이거 놔!”
힘없이 쓰러진 오른의 아내가 발버둥치자 레이피어를 옆으로 내던지 해적이 그녀를 강제로 뒤집었다.
“흑…….흑! 제발요, 제발. 시키는 대로 다할게요. 저이만 살려 줘요. 제발!”
해적이 그녀의 치마를 뒤집으며 대답했다.
“네년 하는 거 봐서.”
“그럴게요. 제발…….”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해적이 다시 그녀를 정면으로 돌리며 허리띠를 풀었다.
“그럼, 기어 와서 빨아. 네년 남편이 보는 앞에서.”
오른을 밟고 서 있던 두 명의 해적이 맞장구쳤다.
“꼴좋네!”
“어이, 보고 있냐?”
툭, 툭 쓰러진 오른의 얼굴을 건드리며 말하는 해적 한 명이 기어가기 시작한 오른의 아내를 보며 말했다.
“그래, 기어가면서 잘 생각해. 지금 그게 너희 위치에서 해야 할 행동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등 뒤에서 황금빛을 띤 쇠사슬이 쐐액 날아들었다.
“크헉!”
“큭!”
반항할 겨를도 없이 목이 졸린 두 명의 해적이 순식간에 그들이 부수고 나온 문이 있는 방향으로 끌려갔다.
지이익!
반항해 보지만 아무 소용없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남은 한 명의 해적이 자신의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외쳤다.
“너, 뭐야?”
대답은 작은 표창이었다.
쐐액!
소리 없이 날아간 표창이 해적의 오른 눈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해적은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차마 쓰지 못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휘두르기도 전에 눈이 꿰뚫린 것이다.
지징!
표창이 오른쪽 안구를 뚫고 벽에 박혔다.
“끄악!”
비명을 지르며 피가 흘러넘치는 눈을 부여잡은 해적.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리턴 블레이드.’
날아갔던 자리 그대로 다시 돌아간 표창이 휘청거리는 해적의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크아악! 이 개새끼! 죽인다! 누구야, 누구야! 너!”
무릎을 꿇고 쓰러진 해적이 한쪽 눈을 잃고도 발버둥 쳤다. 놈은 자기가 만든 핏물을 한 손으로 철퍽, 짚어가며 일어나려 애를 썼다.
저벅저벅.
그사이 찬영은 황금빛 쇠사슬에 목이 졸려 있는 두 명의 해적을 질질 끌며 그 해적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뉴 빌드와 같은 인간들을 베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분명 사람을 베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자들을 베지 않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묻지 마.”
알기 전에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