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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15화 (115/248)

# 115

#115.

“흐음.”

편지를 읽고 난 영주의 눈동자의 수심이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지에 의하면 로일 영주께서…….

“고립되었다는 건가?”

영주의 시선이 찬영에게 향했다. 일행들을 뒤에 둔 찬영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

“예, 일지 내용에 의하면 몬스터 떼와 바오트 해적이 비슷한 시기에 움직인 것 같습니다.”

바오트 해적. 그들이 누군지는 찬영도 잘 모른다.

그러나 병사가 남긴 일지에 따르면 망루를 저렇게 만든 건 바오트 해적들이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영주성이 몰려든 몬스터 떼에 의해 고립되자, 어찌 된 일인지 해적들이 몬스터 떼를 데리고 다니며 지방 전역을 휩쓸었단다.

일지엔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쓰여 있었다.

이 때 크루거가 영주에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 귀환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빅토르 지방의 사정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크루거가 해야 할 임무의 우선순위는 영주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그게 왕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주도 그 뜻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왕국의 백성을 모른 체 할 수 없네.”

크루거 단장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영주님의 안위 또한 중요합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자네와 함께 온 것 아닌가?”

“하오나…….”

“지금은 내 안위만 고려할 수 없는 상황일세.”

충직한 신하의 마음을 잘 아는 영주는 크루거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찬영을 쳐다봤다.

“나머지 정찰에 의하면 망루를 포함한 이 근방에선 어떤 적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더군.”

찬영과 함께 정찰을 다녀온 W.A.L.의 일원들도 그렇다고 했다.

즉, 현재 사절단이 있는 반경 4km 안까지는 몬스터를 포함한 어떤 적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마틴 숲을 넘어서부터는 크루거 경의 말처럼 곧장 전투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

“대비해야 하네.”

영주는 계획대로 빅토르 지방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한 눈치였다. 크루거 경도 더는 영주를 설득하길 포기하고 조언을 해 왔다.

“하면 저희가 선봉을 맡아 전략적인 구획에 전초기지를 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이나가 의견을 보탰다.

“그러자면 라쿤 마을이 가장 낫습니다. 숲과 가까운 고지대에 위치한데다가 마을 후방에 험준한 절벽이 있어 경계해야 할 구획이 적습니다.”

“수비하기 용이하겠구려?”

크루거의 반문에 제이나가 대답했다.

“예, 단, 우리가 요충지로 쓰기에 용이한 만큼, 점령하기도 까다롭습니다. 마을로의 진입이 협소하고 한정적이에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를 들은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W.A.L.의 사절단의 의견도 함께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긴밀히 논의하던 W.A.L.의 일원들은 결국 후퇴하는 쪽을 택했다. 새로운 협약도 좋으나 목숨을 던져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즉.

“새로운 토벌 계획을 세우자는 얘기로군.”

찰스가 대답했다.

“예, 그것이 저희 W.A.L.의 의견입니다.”

“알겠네.”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찰스가 그윽한 눈길로 찬영을 돌아봤다.

“양찬영 각성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자코 있던 찬영이 눈을 들었다.

찰스의 질문은 꽤나 의외였다.

W.A.L.의 일원들끼리 내린 결정을 가지고 질문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물어본 질문에는 대답해 줘야겠지.

“저는 오히려 가야 한다고 봅니다.”

찰스가 호오, 하며 되물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라……. 굳이 물으신다면 우방의 어려움을 방관하는 게 평화적 교류를 위한 첫 스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찰스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의 뒤에 선 W.A.L.의 일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찬영이 W.A.L.의 일원들을 보며 말했다.

“전 여러 나라의 뜻을 조정해 온 여러분처럼 이번 결정 후 여러분께 생길 손익 과정의 여파를 다각도로 고려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이건 압니다.”

찬영이 영주를 돌아봤다.

“우리의 우방이 무너진다면……. 지금처럼 손해 득실을 따지는 건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될 겁니다. 머지않아 두 번째 서먼 홀 사태를 맞이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또한…….”

그의 시선이 이번엔 찰스를 향했다.

“우리와 교류를 결정하는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수도에 계신 왕국의 폐하께서……. 아!”

말을 잇던 찰스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찬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을 보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 챈 거 같다.

“폐하께 이야기를 전달하는 건 영주님들이시죠. 손익을 접어 둔 우리의 이야기가 나을까요? 아니면…….”

찬영이 먼 산을 응시하듯, 숲 너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위험에 처한 백성을 두고 다시 퇴각한 우리의 이야기가 나을까요?”

사실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건 그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얘기가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을 고려하면 때론 당연한 것마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

W.A.L.의 일원들이 후퇴하잔 의견을 내놓았을 때, 분명히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당연하다.

그들이 조정하고 해내야 할 협약의 임무는 굉장히 부담스럽다.

‘나라도 그랬겠지.’

하나, 지금의 이 얘기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었던 건지 그들이 상기하길 바랐다.

찬영이 걸음을 옮겨 말에 올라타고 있는 영주에게 다가갔다.

“영주님.”

“듣고 있네.”

미소 지은 영주의 대답과 함께 찬영이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W.A.L.에게 조언도 마쳤으니 그에 따라 감수해야 할 책임을 짊어질 거다.

“선봉을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영주가 대답 대신 선봉을 달라 했던 크루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겠나?”

찬영의 연설 아닌 연설에 감명 받은 크루거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 친구라면 인정하겠습니다.”

찬영이 마주 웃은 뒤 찰스를 쳐다보았다.

“결정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W.A.L.의 일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 * *

스슥!

야음을 틈타 열댓 명의 무리가 숲 속에서 은밀히 움직였다.

사백의 병사가 일제히 움직이면 분명 소음이 생긴다.

그리 되면 역습을 당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에 찬영을 비롯한 선봉이 먼저 움직인 거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라쿤 마을 근방.

탐지 마법을 펼치던 3소대 마법사들이 돌아왔다.

제이나가 모여 있는 열댓 명의 별동대에게 말했다.

“탐지 마법으로 총 스물네 개의 중소형 트랩이 발견됐어요.”

찬영이 물었다.

“옵저버 감지 결과는 어때요?”

“마나 보유량은 E급 던전 수준으로 판별돼요. 하지만 무시할 만한 마나 보유량은 아니에요. 트랩 뒤에 몬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니까요.”

찬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마을 근방에 트랩과 몬스터가 서로를 보완하며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예상했던 대로다.

‘뭔가를 경계하고 있구나.’

알폰 지방의 병력이 넘어올 걸 예상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로일 영주의 병력을 대비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둘도 아니라면 로일 영주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병력이 여기까지 상주했다면, 진작 알폰 지방에 도움을 요청했을 거다.

‘일단, 마을에 내려가 봐야 알겠지.’

생각을 정리한 찬영이 제이나에게 물었다.

“마법사 분들도 트랩 해체가 가능한가요?”

“예, 가능해요. 괜히 전투 마법사가 따로 있는 건 아니죠. 대신 삼십 분 정도가 걸릴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염려 말아요.”

말을 마친 제이나가 3소대와 함께 트랩 해체를 위해 떠나자, 찬영과 남은 스무 명의 인원은 주위를 경계하며 트랩 해체 후 작전을 분담했다.

“로우지 씨.”

“네.”

W.A.L. 소속의 여성 각성자인 로우지가 입을 열었다. W.A.L.도 결국 합류를 택한 것이다.

찬영이 푸른 눈동자를 가진 로우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로버트 경과 함께 움직이세요. 다른 분들도 로버트 경의 지휘에 따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녀의 이네이트는 자신의 정신력과 마나의 소모로 상대의 기억을 읽고 삭제하는 정신 계열 마법이다. 단, 목표 타깃이 로우지의 정신과 마나 수준 이상의 능력자라면 통하지 않는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래도 정보를 캐는 데 이 사람만한 적임자는 없어.’

그녀를 통해 현재 마을 최신 정보를 습득할 생각이었다.

“로버트 경,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이틀간의 훈련 덕택에 부쩍 가까워진 로버트는 그와 호흡을 맞추는 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오히려 보좌관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하며 좋은 조언가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제게 병력을 전부 맡기시면 갓피스님께서는 어떻게 움직이실 계획이십니까?”

로버트의 질문에 찬영이 나머지 계획을 공유했다.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영주님의 병력을 안내하는 역할을 할 겁니다. 그 전엔 만나는 몬스터부터 쓸어버려야겠죠.”

로버트가 대답 대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납득했다.

하긴 당장 누가, 그를 막을까?

* * *

한 시간 반 정도 흐른 뒤 제이나가 돌아왔다.

예상보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이나가 말했다.

“트랩 주위를 경계하는 녀석들이 있더군요. 들키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였어요.”

찬영이 물었다.

“누구였나요?”

“사람이 아니에요. 모두 몬스터였어요.”

“그랬군요.”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다.

‘몬스터가 트랩 뒤에 교묘히 배치되어 있다? 어떻게?’

의아해하던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스머쉬라는 몬스터 열 마리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더군요. 그런데 놈들 목에 그게 있었어요. 차원의 돌…….”

뉴 빌드는 유혹의 돌이라 부르는 차원 다리의 원천.

그게 또 다시 등장한 거다.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럼, 이 마을도……?”

듣고 있던 로버트 경이 이를 갈았다.

“뉴 빌드가 나타난 거 같군요.”

찬영이 동의했다.

로버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틈을 줬다간…….”

찬영이 뒷말을 대신 이었다.

“지원 병력이 올 수도 있겠군요? 혹은 지방 곳곳에 있는 적들이 더 골치 아프게 나올 수도 있을 테고요.”

그리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 로일 영주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 판국에 복잡한 상황에 엮일 수 있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까다로워질 거다.

지금은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반항할 겨를도 없이 제압해야 하겠네요.”

“그러려면 스머쉬를 단숨에 제압해야 해요. 하지만 쉽진 않을 거 같아요. ‘피어’를 사용하는 녀석들이거든요.”

제이나가 조언을 해 왔다.

처음 듣는 단어에 찬영을 비롯한 각성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어가 뭐죠?”

“마법의 일종이에요. 마나를 음파처럼 실어 보내, 상대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평정심을 깨트리는 거죠.”

“하나라도 놓치면 경보 역할을 하겠네요.”

“네.”

이쯤 되니 찬영은 고민스러웠다.

‘영주님의 병력과 함께 한꺼번에 움직여서 몬스터를 제압하게 된다면 분명 소란이 일거야.’

사백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별동대만 운용하는 것도 걸리는 게 있다.

마을로 진입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스머쉬를 하나라도 놓칠 경우가 그렇다. 놈들이 경보 역할을 할 테고, 마을에 있을 뉴 빌드가 모든 동료에게 통신을 시작할 거다.

그건.

‘좋지 않은 첫 단추야.’

찬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그럼 어떡하지?

그때, 로버트가 조언했다.

“길목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찬영은 무슨 의중으로 이런 얘기를 던졌는지 금방 눈치 챘다.

그는 지도상으로는 진입 불가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를 말하고 있는 거다.

“절벽을 활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예, 녀석들도 그곳엔 어떤 방어 대책도 세워 놓지 않았을 겁니다.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긴 힘든 험준한 장소니까요. 물론 저곳을 오르려면 저는 하루 종일 걸리다 못해, 놈들에게 들킬 겁니다. 하지만…….”

로버트가 찬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갓피스님은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이죠.”

결정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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