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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11화 (111/248)

# 111

#111.

“알폰 지방에 온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어요.”

그녀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듣는 입장에서 담담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자상하셨죠. 저와 레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셨어요. 어머니를 일찍 여읜 저희를 늘 안쓰러워하셨거든요.”

그녀의 눈빛이 회상에 젖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한때의 기억들이 그녀를 절로 웃음 짓게 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친과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그녀는 큰 화재가 번졌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멸망이 다가왔어요. 안전한 곳 따위는 없었어요. 모든 곳이 혼란스러웠으니까. 뉴 빌드가 활동하기엔 최적의 시대였죠.”

그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활활 타오르던 그날의 성. 아니, 성뿐만이 아니었다.

“화재가 일어났고 아버지께서 다스리던 영지가 모두 불탔어요. 아버지는 친위대마저 모두 화재 진압 병력에 포함시키셨고 영지를 지키는 기사, 마법사들 모두가 화재 진압을 위해  성을 떠나셨죠.”

찬영이 물었다.

“그럼 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정규 병력은 마법 병단의 단주였던 플로딘밖에 없었어요.”

“그랬군요…….”

“네, 하지만 아무도 예상 못했었죠. 단시간에 연쇄적으로 솟구쳐 오른 화재들이 오랫동안 계획된 일들이었다는 걸.”

곧 눈동자에 스며들기 시작한 서늘함. 그것은 분명 살의였다.

“그는 많은 걸 준비했죠. 저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하실 거라 짐작하고 모든 계획을 준비했어요. 뉴 빌드가 찾아왔고…… 그가 모든 걸 통제했죠.”

찬영은 문득 카슬라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녀가 말하는 그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것 같았다.

“플로딘이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덕분에 어렵게 살아남았어요. 잿더미가 되어 버린 성을 망연히 바라보던 우리를 삼촌이 구해 주셨죠.”

“그자는?”

“사라졌어요.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자의 시신은 못 찾았죠.”

“아…….”

찬영은 이제야 알았다.

그녀가 왜,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날 결정했죠, 공작 영애의 삶을 끝내기로.”

제이나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찬영은 한동안 숨 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어.’

원한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을 거다. 그 일념으로 하얏트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테고, 젊은 나이에 한 영지의 마법병단 단주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단주로서의 삶은 기회 같은 게 아니었어.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필연이었던 거지.’

피하고 싶어도 그때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 일을 끝내야만 하니까.

그게, 평온을 되찾을 유일한 길이니 말이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해 주고 싶었다.

탁.

찬영의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겨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경직됐었으나 그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찬영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만큼 찬영의 품은 따뜻했다.

그때.

주르륵.

제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주책이네.’

알면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 * *

탁.

얼마 후, 찬영은 그녀의 집무실을 닫고 나왔다. 우는 그녀를 달래주고 잠깐의 이야기를 나눈 후였다.

‘쉽게 잊힐 것 같진 않네.’

그렇게 펑펑 눈물을 쏟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간 막혀 있던 감정의 둑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하긴…….’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동생에겐 강인해야져야 했을 테고, 남들에겐 아버지를 잃은 딸의 모습을 보일 여유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적들과 싸워야 할 마법사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것 외에는.

그래서 그녀가 더 안쓰러웠다.

그리고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녀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걸음을 옮기는 찬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가야 할 곳이 생겼다.

* * *

베이콥 기사단, 제1 훈련장은 기사단 숙소와 인접해 있다.

그러다보니 위치상 제1 훈련장은 정식 기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훈련장이 됐고, 각성자나 정규 병사들은 웬만해선 ‘베이콥 훈련소’ 인근에 있는 훈련장을 애용했다.

한데, 오늘 그곳에 웬일로 이방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양찬영. 최근 가장 높은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갓피스가 아니십니까?”

기사단 5대대장 로버트가 찬영을 제일 먼저 알아봤다.

그는 일전 지하수로에 투입됐던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찬영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뤘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로버트는 누구보다 찬영을 존중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찬영도 정중히 화답했다. 정신없던 나날이었으나 찬영도 그의 얼굴을 얼추 기억해 냈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베이콥 기사단 5대대의 대대장 로버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훈련장까지는 무슨 일로……?”

인사를 하면서도 로버트는 그의 행보가 의아했다. 여긴 찬영이 머무는 방과도 꽤 멀리 떨어진 훈련장이다. 직접 찾아오려면 한참 걸어와야 한다. 오히려 훈련장이 필요했다면 각성자들이 있는 곳이 나았을 거다.

‘왜 여기까지?’

그 때문에 로버트는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찬영도 그 눈빛이 뭘 뜻하는지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아, 네.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로버트 경을 뵙고 싶어서요.”

로버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저를 말입니까?”

그가 반문을 던진 사이, 각자의 훈련에 여념이 없던 기사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이 빠지게 찬영이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찬영이 멋쩍게 코를 긁었다.

이렇게 모든 시선이 한꺼번에 쏠릴 거라고 예상하고 오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쑥스러움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잠시 말끝을 흐리다 결국, 마저 얘기를 꺼냈다.

“한 수 배우고 싶어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로버트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미 함께 동료로서 싸워 본 결과, 그의 능력은 충분히 강하다. 특히 그가 보인 한 번도 보지 못한 검술은 분명, 장비에 마나를 덧입히는 ‘오라’란 것을 검 전체에 씌울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소드 익스퍼트 이상이었어.’

그것도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뉘는 단계 중 최상급이라고 추측될 만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가 뭘 배우러 왔다는 걸까? 로버트는 찬영의 의중이 정말 의아했다.

“제게 무엇을? 검에 있어선 저희에게 배울 게 없으실 텐데요.”

“아뇨,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검도 배우면 좋겠지만…… 오늘은 검을 배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오슬로 구릉의 레인저인 벡 부대장을 아시죠?”

“예, 저와는 좋은 친구 사이지요.”

“한 때는 함께 레인저 생활을 하셨다고 제이나 경에게 들었습니다.”

“그런 날도 있었지요. 한데 그것은 왜?”

“제가 대대장님께 배우고 싶은 게 검이 아니라…….”

찬영이 손을 들었다.

지잉!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검은색의 활.

나호스의 활이었다.

‘이제야 꺼내네.’

한동안은 꺼내들 일이 없어 묵혀뒀던 장비다.

그도 그럴 게 나호스의 활을 획득한 후부터 지금까지, 궁술을 배울 만한 엘프나 레인저가 주변에 없었다.

엘프들이야 카일이 있는 헤일로에 모두 모여 살고 있고, 레인저들은 빠른 기동력을 활용해 알폰 지방 전선 곳곳을 오고 다니며 수많은 정보들을 영주성에 전달한다. 찬영이 레인저를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즉, 궁술을 배우려면 직접 카일이 있는 헤일로 골짜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로 출발하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지금, 다녀오기가 애매한 상황.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게 한 때 레인저 생활을 오래 하다 기사로 전향했다는 로버트를 찾은 것이었다.

‘제이나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몰랐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앞으로 나호스의 활을 쓰려면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 여러모로 배워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물론 배우는 거야 로버트가 허락해야 가능하겠지만.

“어려운 일이군요.”

이윽고 입을 떼는 로버트의 눈빛엔 난감함이 서려 있었다.

당연했다. 이제 그의 주력 무기는 검, 시간이 날 때마다 검을 수련하며 여가 시간이 될 때나 아주 가끔씩 활을 잡는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궁술을 가르쳐 달라는 찬영의 부탁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왜 어려우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활을 놓은 지 너무 오래돼서 그렇습니다. 누굴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가지고 있는 장비만 봐도 이미 활을 잡아 보신 것 같은데…….”

“아, 그러셨군요.”

찬영은 그가 뭘 고민하는 지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제게 가르쳐주실 게 많으실 겁니다.”

그만큼 궁술에 대해 아는 게 없거든요.

* * *

저 멀리 표적지 하나가 보였다.

제 1 훈련장에 붙어 있는 궁술장이었다. 먼저 찬영의 궁술 수준을 판별한 뒤, 그에 맞는 교육을 시작하려던 로버트는 화살이 날아가자마자 헛웃음을 흘렸다.

“말씀하신대로군요.”

찬영이 들고 있던 나호스를 그대로 내려놓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예, 처음이라서…….”

찬영이 입을 떼자마자 날아가던 화살이 표적지를 지나쳐 100m 뒤에 있는 풀숲으로 쳐 박혔다.

로버트가 한숨 쉬었다.

풍향, 힘 조절, 기초 자세 등 그냥 기본조차 닦여 있지 않은 한 방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그를 가르칠 게 걱정이었으나 이젠 다른 게 걱정이다.

‘뭐부터 가르쳐야 되나?’

그는 분명 검에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궁술은 아닌 것 같군.’

그런데도 굳이 궁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오히려 이 시간에 검을 수련하는 편이 나을 터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검을 수련하는 게…….”

로버트의 제안에 찬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음 굳힌 일이라 마음을 바꾸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찬영은 무척 완고했다.

그의 반응에 로버트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뭐, 본인이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나?’

로버트는 더 말릴 생각 없이 가져온 자신의 활을 집어 들었다.

“저를 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로버트가 시위를 당겼다.

“궁술의 기초는 호흡입니다. 심법을 수련하실 때 주변이 고요해지는 걸 느껴보신 적이 많으시겠지요?”

“예, 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고요해지는 순간을 이용해 보세요. 당연히 화살에 마나를 덧입히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곧 당기고 있던 활시위가 ‘팅’ 하며 흔들리자, 시위에 고정되어 있던 화살이 쐐액 날아갔다.

그리고 결과는 찬영과 천지 차이였다.

단숨에 표적의 정중앙에 박힌 거다.

찬영은 굉장히 놀랐다.

장담컨대 그의 활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이미 이전에도 엘프들의 활 솜씨를 경험해 봤기에 보는 눈에 있어선 자신할 수 있다.

‘벡 정도의 실력자야.’

활을 놓을 만큼 검이 좋아진 계기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궁술은 벡에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찬영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오늘 활이 좀 잘 맞는 것뿐이지요. 다시 해 보시겠습니까?”

“예.”

찬영은 나호스의 활을 집어 들었다.

사실 처음 활을 쏠 땐 호흡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군대가 생각나네.’

군대에서 처음 총을 배울 때도 이것과 비슷했었다.

격발 직전 들이마신 호흡을 잠시 멈추며 고요함을 유지해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

‘그래, 이것도 어려울 것 없다.’

찬영은 눈을 반개한 채 두 가지 심법을 통해 마나를 몸 안에 휘돌렸다. 두 가지 심법을 통해 몸 구석구석을 휘돌기 시작한 마나.

하나의 호흡인 듯 보이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두 힘의 균형이 이뤄 낸 호흡이다. 서서히 고요해지기 시작한 사위.

찬영은 다시 나호스의 활을 들었다.

분명, 자세는 엉망일 거다. 하지만 적어도 로버트가 가르쳐 준 호흡의 의미는 정확히 수행할 생각이다.

‘흔들림 없이…….’

찬영은 호흡을 유지하며 화살 끝을 바라봤다. 그러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던 화살 끝이 점점 부동을 갖춰 간다. 흔들림 없는 완벽한 고요.

‘지금!’

찬영은 확신했다.

이 순간이야말로 로버트가 말한 때라고.

탁.

찬영이 활시위를 놓았다.

쐐액!

단숨에 날아간 화살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날아갔다.

쌔앵!

찬영은 아쉬워했다.

“아…….”

이번엔 제대로 맞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아쉬워한 건 찬영 뿐이었다.

로버트는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생전 처음 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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