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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10화 (110/248)

# 110

#110.

영주성에 위치한 접견실.

맞은편 대기실에 앉아 있던 찬영은 힐끗 보이는 ‘3회 차 9회’ 문구를 응시했다.

‘시간 빠르네.’

르리에를 다녀온 게 7회일 때인데 벌써 9회가 됐다. 그새 이틀이 흘렀고 서 있는 장소는 알폰 지방이 됐다.

“들라십니다.”

마침 들려오는 접견실 행정에 의해 모두가 반응했다.

그중 이규복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가실까요?”

김지수가 그 뒤를 뒤따르고 찬영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쫓았다.

“이게 누군가? 하하!”

찬영이 접견실에 들어서자 영주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어후!’

피할 틈도 없이 영주와 찰싹 붙어야 했다.

영주가 곁에서 떨어지며 물었다.

“고향에 다녀온다는 말은 제이나에게 들었네. 별로 놀라지도 않았지. 자네가 일주일 동안 쉬라는 내 명을 거스를 줄 알았거든! ‘감히’ 말이야.”

찬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몸이 완벽히 나아서 움직이긴 한 거지만 어쨌든 명을 어긴 건 사실이다.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 일인가? 별 탈 없이 멀쩡하면 됐네. 한데, 다녀온 일은 잘 마무리되었나?”

“예, 잘 정리됐습니다.”

“그래, 때론 뒤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 잘했네.”

“일주일을 가득 채워 쉬진 않았지만요.”

“무엄하긴…….”

격의 없이 찬영과 얘기를 나눈 영주는 그제야 이규복과 김지수를 돌아봤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질문에 이규복이 김지수를 쳐다보았다. 김지수는 적응이 빨랐다.

수련생 신분으로 배워 온 신성왕국의 예법에 따라 영주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김지수라고 합니다. 양찬영 각성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반갑소. 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예, 물론입니다.”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영주가 다시 찬영을 쳐다봤다.

“미인이군, 자네가 뽑았나?”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영주가 음흉한 눈빛으로 찬영을 바라봤다.

“다행이군. 자네가 미인을 뽑았다는 걸 제이나 경이 알면 단언컨대 자네는 몸 성히 걸어 다니지 못할 게야.”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의 의중이 어딜 가리키고 있는 건지 모르는 눈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면서 그러나? 나도 듣는 귀가 있고 눈이 있다네.”

능구렁이 같은 영주를 보며 찬영은 혀를 내둘렀다.

이럴 땐 정말 못 당해 내겠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알았지. 축하하네. 제이나 경 같이 유능한 여인의 사랑을 받게 된 걸.”

찬영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영주가 껄껄 웃었다.

“갓피스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일개 남자로구만!”

잔뜩 신난 영주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접견실을 가득 채웠다.

영주는 정말 기뻤다.

‘누가 데려가나 했는데 말이지.’

남자 한 번 만나 보지 않은 제이나 경이 언제 짝을 찾을까 궁금했었다.

한데 그 짝이 함께 복원의 기틀을 가져온 찬영이다.

솔직히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둘을 맺어 주고 싶었는데…….

‘잘 됐군.’

오랜 지인이자 제이나 경의 친삼촌인 로덴 공작이란 산을 넘어야 하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도와줄 작정이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친구지.’

이제껏 봐온 찬영은 두려움 앞에서 물러난 적이 없는 남자였다.

어떤 변수에도 늘, 침착히 대처하며 영주인 자신보다 왕국 복원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찬영이라면 언제든 합격이다.

‘더구나 제이나 경이 좋으니 된 것이지.’

웃음을 거둔 영주가 찬영에게 넌지시 덧붙였다.

“잘해 주게, 꼭.”

이건 진심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찬영이 나직이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암, 그래야지.”

대답과 함께 다시 영주석에 착석한 영주.

“잡담은 이만 하면 된 듯 하고…….”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좀 나눠 보세. 수도로 가야 한다는 것은 제이나 경이 말해 주었겠지?”

이미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제이나에게 충분히 들은 바가 있기에 찬영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어진 건 아니다.

“이방인인데다가 갓피스가 되었으니 제법 혼란이 일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폐하께서도 그 부분에선 분명 놀라실 걸세. 하지만 우린 이미 멸망을 겪었지. 더 놀랄 일은 없네. 그저 힘을 합치느냐, 합치지 않느냐의 선택만 남아있을 뿐.”

듣고 있던 찬영이 물었다.

“받아들이실까요?”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영주님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폐하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네.”

그 말에 유독 이규복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아직 대면해 본 적 없는 신성 왕국의 왕좌에 있는 인물.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영주에게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특별 인가가 생길 만큼의 고급 정보였다.

그새 영주의 말이 계속 됐다.

“그분은 자비로운 분이시지. 늘 왕국의 안위뿐 아니라 대륙의 땅의 안위가 지켜지길 바라셨네.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삼국 간의 10년 평화 조약까지 체결하신 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영주는 진정으로 왕을 존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분이었다.

“작금의 폐하께서는 여신의 신탁을 직접 받으신 분이네. 신의 뜻을 최우선시하는 교황께서도 그분의 뜻이 신과 가까이 있다고 믿을 만큼, 폐하의 명령은 강력한 권위가 있지. 그런 분이…….”

영주가 찬영을 쳐다봤다.

“멸망을 겪고 다시 이 땅 위에 재림하셨네. 그로 인해 저 멀리 멸망을 가져올 적을 대비해야 할 것이라는 그분의 생각이 좀 더 공고해지셨을 걸세.”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찬영은 영주가 뭘 믿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왕이 지구에서 온 이방인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두 집단은 평화롭게 손잡을 수 있을 거다.

특히 찬영은 베이콥 영주를 크게 믿었다.

‘이미 한 번 겪은 분이니까.’

최초의 문화 충돌을 겪은 영주다. 그는 왕의 혼란을 일부나마 덜 느끼게 할 수 있는 좋은 조언자가 될 거다.

그렇기에 찬영은 이번 수도 방문에 영주의 역할이 굉장히 클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나도.’

제이나의 말대로 왕은 새로운 갓피스의 등장을 호기심 있게 지켜볼 거다. 그러면서 한 때, 제이나의 동생 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반신반의하겠지.’

그건 자신에 대한 의심이기도 하겠지만 갓피스란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찬영은 레인을 용서했을 때처럼, 그리고 글로리의 마음을 얻었던 것들을 통해 전보다 나은 조언을 해줄 자신이 있었다.

남은 대륙 복원은 누구 하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모든 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 싸움에 속하게 된 사람들의 신뢰가 모여야 가능하다는 것을.

“돕겠습니다, 뭐든.”

“당연하지. 그댄 누가 뭐라 해도…….”

영주가 씩, 웃었다.

“베이콥 가의 갓피스가 아닌가?”

* * *

접견이 끝나고……

김지수가 대기실로 돌아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이를 본 이규복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그냥 긴장이 좀 풀려서 그럽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영주와의 짧지만 강렬한 대화들이 생각보다 중압감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찬영도 그녀의 반응이 이해됐다.

“누구라도 그럴 법 하죠. 한 지방을 책임지는 분이시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 역시 처음엔 생각지도 않은 일로 여러모로 부담스러웠거든요.”

찬영은 처음 영주를 알현하고, 갓피스로서 감당했었던 짐들을 그녀를 보며 잠깐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찬영이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한 뒤 이규복을 쳐다보았다.

“이틀 뒤에 뵈면 되겠군요.”

“네, 그동안 저희는 도른 광장에 있는 지부로 가 봐야죠. 최근 알폰 지방의 동향도 살피고 수도로 떠날 준비도 하고요.”

찬영이 손바닥에 놓인 우올로를 들어 보였다.

이를 통해 연락하겠다는 말.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예, 그러겠습니다. 그동안은 그럼 어디에 계실 건가요?”

찬영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김지수가 입을 떼자마자 이규복이 팔꿈치로 그녀를 툭, 밀었다.

“뭘 그런 걸 물으십니까?”

“아…….”

그제야 찬영이 어디로 갈지 깨달은 김지수가 더 입을 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제이나에게 갈 거 뻔한데, 뭘 따로 물어보냐는 뜻이었다. 영주도 모자라 이규복까지 그러자 찬영은 할 말을 잃고 섰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두 손 두 발 다든 찬영이 두말 않고 몸을 돌렸다.

이럴 땐, 얼른 빠져나가는 게 상책인 것 같다.

“갑니다.”

그때, 뒷모습을 지켜보던 김지수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외쳤다.

“마음 편히 행복하게 다녀오세요.”

찬영은 대답 대신 혀를 내둘렀다.

진짜 졌다.

* * *

제이나가 우려 낸 차가 담긴 찻잔을 가져와 앉아 있는 찬영 앞에 놓았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예, 영주님 좀 말려 주실래요?”

그녀의 집무실을 찾아온 찬영이 토로했다.

“그건 제 권한 밖이거든요. 영주님은 제 고용주나 다름없으니까요.”

마주 앉으며 대답하는 그녀.

“답답한 현실이네요.”

평소답지 않게 귀여워 보이는 찬영의 넉살에 그녀가 슬그머니 미소를 보였다.

제이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평화롭다.

늘 몬스터 속에 있다가 그와 겪기 시작한 이런 소소한 삶이 그녀는 낯설면서도 기분 좋았다.

이게 다 찬영이 나타난 덕분이다. 사실 예전엔 미래를 꿈꿀 땐 한 번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디서 싸우고 있을지를 떠올렸다.

그래서 누구든지 바라마지않는, 서로의 하루를 얘기하는 이런 소소한 생활 같은 건 꿈도 안 꿨다.

하지만…….

‘이젠 하고 있지.’

모든 게 마술 같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와 많은 일을 겪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제 아버지의 일만 해결된다면 그와 미래를 꿈꾸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좀 더 그와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무슨 생각해요?”

“아, 별거 아니에요.”

찬영이 미소 짓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조금 표정이 굳어 있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찻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먼저 얘기를 꺼냈다.

“평화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런 모든 게.”

“하긴. 제이나는 이렇게 쉬는 게 오랜만이겠죠?”

“살면서 처음인 것 같네요. 한동안 이렇게 여유롭게 있어 보는 게.”

삶을 돌아보는 것 같은 그녀의 회한에 찬영은 문득 그녀의 이전 삶이 궁금해졌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요.”

“마법 병단의 단주가 되는 게, 정말 원하던 꿈이었었나요?”

“찬영 씨는요? 제가 알기로는 몬스터를 잡는 일을 했었다고 들었는데.”

“저요?”

“네.”

그 얘기를 듣고 찬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꿈이라.’

이곳까지 오게 되면서 지나온 삶을 반추해 봤다. 프로게이머라는 원하는 꿈을 접은 이후부터 돈이란 걸 모으는 데에 모든 사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적성을 찾았다면 찾은 거 같다.

“꿈인 건 잘 모르겠고, 그게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기회요?”

“네,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한 실망감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실망감은 저에게 달라지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기회가 왔고, 그걸 잡았더니…… 모든 게 바뀌었죠.”

찬영은 당시 느꼈던 감정, 선택들에 대해 모든 걸 털어 놨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여린 모습들이었다.

찬영이 말을 이었다.

“생각지 못하게 찾아온 일이었지만 잘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노력하고 싶은 새로운 직업이 생긴 거죠.”

“만족하나요?”

“네, 후회 하지 않아요. 이젠 더 잘해 내고 싶어요.”

그래야만 많은 걸 지킬 수 있다. 그녀도, 그녀의 고향인 이 땅도. 그리고 자신의 고향과 그 모든 걸 포함한 자신의 삶도!

말을 마친 후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부럽네요…….”

찬영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지켜봐 주기만 했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잠자코 있는 찬영에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선택할 수 없었거든요. 알폰 지방으로 와야만 했죠.”

찬영은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며 느꼈다. 그녀가 한 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든 얘기를 꺼내려는 거 같다고.

그리고 그 느낌이 맞았다.

이런 일을 그녀가 어떻게 감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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