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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02화 (102/248)

# 102

#102.

“누가 속삭이고 있다는 겁니까?”

“글쎄. 내가 알 리 있겠소? 하지만 무시할 수가 없었지.”

“그럴 이유라도?”

“있지. 그 목소리가 갓피스가 되던 당시에 내 귀에 들렸던 목소리와 같았다면…….”

순간 찬영의 눈이 커졌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셨겠네요.”

“맞소. 그리고 그 이유가 뭘까 직접 대면하고 싶었지.”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찬영은 진심이었다.

별들의 대화부터 올드 원의 침략 이유, 노티스 여신의 존재 유무 등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글로리에게 전달 된 목소리가 가리키는 장소에서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에 관련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즉, 이건 또 다른 기회인 셈.

“함께 가시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 *

굴의 통로는 비좁지도, 넓지도 않았다. 딱 찬영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

그 외 불편한 건 없었다. 어두운 건 가지고 있는 마나를 사용해 충전시킨 케어 라이트로 주위를 밝혔고 나풀거리는 먼지야 아직 사용 횟수가 남은 마스크로 쾌적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못 보던 새 글로리가 이런 땅굴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꽤나 놀랍다.

“언제 이걸 다 구축하셨습니까?”

나직이 중얼거린 그때.

쿵!

곡괭이로 앞에 놓인 흙벽을 단숨에 부숴버린 글로리가 나풀거리는 흙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어 가며 말했다.

“자 여길 보시오.”

글로리의 말에 찬영이 고개를 내밀어 흙벽 안쪽을 들여다보자, 새로 파야 할 지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통하는 땅굴 통로가 나타났다.

이를 본 찬영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직접 판 게 아니셨군요. 이 지하 통로는 이미…….”

“존재했던 거지.”

뒷말을 대신 덧붙인 글로리.

그가 곡괭이를 거꾸로 툭 바닥에 내리꽂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이런 식의 작업이었소. 나는 지층 표면만 곡괭이로 파낼 뿐. 정작 안쪽의 통로는 이미 존재했었지.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단 얘기요.”

이제야 여러모로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찬영이었다.

‘하긴, 며칠 만에 이런 통로를 일궈 낸다는 건…….’

아무리 트레이드족이라도 힘든 일이다.

포탑 설치 당시처럼 모든 트레이드족이 합심한다면 모를까, 글로리 혼자서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어쨌든.

“누가 만들어 놓은 통로일지는 끝까지 살펴봐야 알겠군요.”

“그럴 것이요. 아마도…….”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땅굴 탐사.

찬영은 글로리에게 착굴 장비를 빌려서 본격적으로 그를 도왔다.

물론 타우린이나 도타가 함께 있으면 작업 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통로는 녀석에게 너무 비좁고, 도타는 혹시나 모를 변수를 염려해 밖에 대기시켰다.

만약 땅굴이 무너질 경우, 밖에서 도와줄 만한 동료가 있으면 여러모로 좋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하지만 통로를 파고 깊이 들어갈수록 굴이 무너질 걱정이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작업이야 걸어가며 가끔 나오는 막다른 흙벽을 부수는 것 정도였다.

그러던 중 밝은 빛을 내는 광물, 오르도 광석을 발견한 직후.

“여긴 안 무너질 거요.”

글로리가 확신했다.

찬영은 그의 얘기에 의아했다.

“왜죠?”

“여길 보시오.”

글로리가 흙에 묻혀 있는 광석 일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딘 암석을 아시오?”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본 적은 있습니다.”

포탑을 설치하던 공사 현장을 봐왔기에 어느 정도 아는 거다. 찬영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글로리가 암석을 툭 치며 말했다.

“어느 지점부터 천장에 아딘 암석과 우로크 나무 기둥이 보였소. 그리고 그곳은 다른 곳에 비해 지반이 약해 보이더군.”

설명을 들은 찬영도 뭔가 감이 잡혔는지 그에게 물었다.

“아딘 암석과 우로크 나무가 자칫 굴이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지반의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맞소. 그 둘은 충격, 하중 등 가해지는 힘을 분산시키는 데 최고의 재료들이거든,”

“안 무너지겠다고 확신하신 건 이 때문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글로리가 찬영을 향해 물었다.

“점점 궁금해지지 않소?”

찬영은 그 말에 동의했다.

깊은 통로 끝에 뭐가 기다리는 걸까? 뭐가 있기에 오랫동안 지반이 무너지지 않게 지켜온 걸까?

찬영이 다시 걸음을 뗐다.

계속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직접 캐내는 수밖에.

* * *

다시 착굴에 임한 둘은 곧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봤다.

마지막 흙벽이 무너지자마자 드러난 새로운 통로.

그건 통로가 아니었다.

석굴石窟이었다.

아딘 암석이 빼곡히 자리 잡은 커다란 부지의 동굴.

-푸스스.

흙먼지를 걷어내며 동굴 안으로 진입한 찬영이 뒤따라 들어오는 글로리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군요.”

글로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찬영 또한 통로의 끝에 아딘 암석 동굴만이 기다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적어도 갓피스와 관련 있는 뭔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탕을 치고 나니 조금 허무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이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기엔…….

‘많은 게 석연찮아.’

찬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글로리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군. 이 모든 게 괜한 짓이었다고?”

납득할 수 없다는 양 중얼거린 글로리가 암석 동굴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암석으로 가득한 벽면, 천장 어디에도 눈에 띄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았다. 글로리는 직접 암석을 밟고 기어 올라가 천장까지 확인해 봤다.

다시 내려온 글로리가 의아해했다.

“분명 내 귀에 똑똑히 들렸소. 이곳을 찾아가라고 말이지. 하지만…….”

다시 주위를 휙 둘러본 그가 말했다.

“내가 틀린 것 같군.”

그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우린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전 글로리 씨를 믿으니까요.”

그가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나? 분명 목소리가 들렸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이게 확실한 사실이라고 봤을 때…….

‘갓피스와 연관 있는 장소라는 건 확실해.’

단지 우리가 못 찾고 있을 뿐인 거다.

‘그럼 놓친 게 뭘까?’

거기서부터 출발해 보는 게 낫다.

찬영이 글로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이 공간에 숨겨진 뭔가가 있다면 어디에 숨겼을 것 같습니까?”

글로리에게 이 질문을 던진 건 함께 생각해 보자라는 의중만 있는 게 아니다.

아딘 암석의 특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라면 암석이 주위에 가득한 이 석굴 안에 뭔가를 감출만 한 포인트를 잘 찾을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나라면……?”

“예, 제가 글로리 씨의 말을 믿는다는 건 이 장소에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뭔가가 남아 있다는 걸 확신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봐야죠.”

독려 섞인 조언에 힘입은 글로리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눈빛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소. 아딘 암석의 특질 중 하나는 돌을 쳤을 때 속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난다는 거지. 방금 전에도 샅샅이 뒤져봤지만 모두 같은 소리를 냈다오. 혹시나 했지만 함정 같은 건 없었소.”

천장과 벽면을 둘러볼 때를 말하는 거다.

찬영의 눈빛이 덩달아 무거워졌다.

‘하긴,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니다 싶으면 고집을 포기하고 물러날 때도 있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때라는 생각이 안 든다. 포기하기엔 그만큼의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

‘좀 더 있어 보자.’

적어도 이 장소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 될 때까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찬영은 암석 한 면에 다가가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과 벽면은 글로리가 모두 확인해 봤어.’

아니면 환영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걸까?

‘아니야.’

마법과 신성마법 등 각종 분야에 어느 정도 조예가 생긴 찬영의 눈으로 보아도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은 굉장히 평온했다.

심지어 D급 옵저버를 돌려 보았지만, 주위에 흐르는 마나보유량은 굉장히 적었다.

이런 공간 안에 환영 마법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D급 옵저버는 물론 마나를 느끼고 보는 내 모든 감각을 속일 정도의 환영 마법이라면?’

잠깐 고민하던 찬영은 내부의 마나를 일으켰다.

-아슬란.

그리고 생성되는 아슬란.

곧 심법을 통해 아슬란에 극소량의 마나가 흘러 들어가자.

쨍!

찬영이 이를 암석 위에 휘둘렀다.

충격을 주위로 분산시키는 암석이 일부 쪼개졌다.

아슬란의 날선 예기가 충격을 분산시키는 암석마저 일부 베어 버린 것이다.

이를 본 찬영은 확신했다.

‘환영 마법은 없어.’

주변에 보이는 환경이 만약 환영 마법으로 생긴 것이라면, 방금 전 자신의 마나에 베이는 건 암석이 아니라 환영 마법과의 충돌이었어야 했다.

즉 여긴…….

‘완벽한 현실.’

그럼 환영 마법이 있을 확률은 제외시킨다.

‘갈수록 첩첩산중이군.’

물론 그 덕에 막막함이 더해졌다. 지켜보던 글로리가 다가와 얘기했다.

“뭘 하고 있는 것이오?”

“환영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닌 건가 싶어서요.”

“음, 결과는……?”

“보시다시피.”

찬영이 쓰게 웃으며 말한 뒤 아슬란을 거뒀다.

정말 글로리의 말처럼 여긴 비어 있는 장소인 걸까?

이젠 그럴 가능성이 높아졌다. 천장, 벽, 마나, 혹은 감춰진 함정 등 숨겨진 게 없다.

‘이럴 거라면 무엇 하러 섬세한 설계로 이곳을 구축해 놓은 거지? 혹여 땅굴에 충격이 가해져봐야 천장과 벽에 깔린 암석이 진동을 분산시켜서 지반엔 조금도 충격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찬영.

자신도 모르게 뒷말을 육성으로 뱉고 말았다.

“안 갈 텐데?”

이제껏 고려하지 않았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땅?’

자연히 발아래를 내려다본 찬영.

그러고 보면 그동안은 암석이 놓여있는 장소에 집중하느라 정작 디디고 있는 땅은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옛말 하나 틀린 거 없다.

찬영이 고개를 홱 돌려 글로리에게 물었다.

“글로리 씨.”

“왜 그러시오?”

“이제껏 암석에 뭔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시고 움직이신 거죠?”

“그렇소.”

“그럼, 암석이 왜 자리 잡고 있을까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말씀드리지 않았소. 이해하신 줄 알았는데……?”

찬영의 의중을 모르는 글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신통찮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계속 됐다.

“그럼, 천장과 벽면에 깔려 있는 암석들은 어디로의 충격을 막기 위한 거죠?”

“당연히…….”

그제야 발을 디디고 있는 땅 밑을 내려다보는 글로리.

그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두 배는 커졌다.

“하! 당연한 걸 잊고 있었군!”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린 이제껏 암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는 까맣게 잊은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던 거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글로리가 땅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덮여 있는 흙을 파내기 시작하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어떤 문양. 그 문양은 찬영이 처음 보는 형태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슬슬 익숙해져가는 시드 대륙의 문자도 아니었다. 완벽히 낯선 문자였다. 하지만 글로리에겐 아니었나 보다.

“이건…….”

쥐고 있던 곡괭이를 옆에 던져두고 양 손으로 흙을 파헤치던 글로리.

그와 함께 드러나기 시작한 문자들을 글로리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여긴 글라투가 봉인해 놓은 내 선조들의 무덤이오.”

“트레이드족 선조들 말입니까?”

놀란 찬영이 물었다.

“그렇소. 이런 게 묻혀 있을 줄이야…….”

다리 힘이 땅 위에 풀려 주저앉은 글로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문자는 글라투가 사용하던 문자요. 프롤들은 모두 이 글자를 알고 있지.”

“읽어 봐 주시겠습니까?”

“일단 드러난 문자들만 읽으면…….”

곧 문자들을 자세히 살피며 더듬대는 글로리.

“사라진 트레이드족의 유산을 몇 가지 묻었다. 별 도움 되지 않는 하등한 물건들이다. 그러나 즐겁다. 놈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글로리의 말은 계속됐다.

“어리석은 것들. 제 선조의 것이 여기 묻혀 있는 것도 모르고 모든 유산이 사라졌다 믿다니.”

그 외 몇 가지 얘기가 있었으나 그건 글라투가 ‘프롤.’ 들인 트레이드족을 놀리는 글귀들이었다.

그러나 글로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

오히려 글라투가 남긴 글귀보다 선조의 유산이 남아 있다는 것에 더 고무된 눈빛이다.

“어떤 유산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게 그 유산으로 통하는 건 확실해 보이오.”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글로리와 함께 조금씩, 조금씩 지반의 흙을 걷어냈다. 그럴수록 지반에 자리 잡고 있던 숨겨져 있던 커다란 열쇠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문이었군요.”

선조의 유산을 되찾게 된 글로리가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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