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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00화 (100/248)

# 100

#100.

끼익.

이규복의 SUV가 멈춰 선 곳은 잠실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다 왔네요.”

“여기가 어디에요?”

“음…….”

삐익!

차문을 잠근 이규복이 승강기가 있는 문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V.O.의 프라이빗한 장소라고 보시면 돼요.”

“V.O.의 관계자들만 출입 가능한 장소인가 보네요.”

“꼭 그렇진 않아요. 일반 사람들에게도 오픈 되어 있죠. 여기 파스타가 진짜 맛있거든요.”

“아, 그래요?”

“네. 대놓고 프라이빗 레스토랑이라고 소문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

가볍게 웃은 이규복이 말을 이었다.

“보통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몇 개의 룸은 계약이나 미팅을 위해 늘 비워 둬요. 몇 곳 있죠, 이런 데가.”

“여기가 그중 한 곳이고요.”

“네, 맞아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강기 앞에 섰다.

오늘은 본래 군 계약 건의 담당자였던 오 중령과 미팅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듣자하니…….

“오 중령님만 참석하는 게 아니라죠?”

“네. 도 중령이라는 분도 같이 나온다고 하네요.”

“도 중령?”

“아, 네. 도인준이라는 이름의 중령님이신데 여러모로 좀 유명한 분이라네요.”

“어떤…….”

“남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분이요.”

“그래요?”

“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띵.

마침 내려온 승강기. 이규복이 먼저 그 안에 들어가며 말했다.

“적어도 법적 테두리 안에서 찬영 씨를 옭아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찬영이 뒤따랐다.

“네.”

잘 압니다.

* * *

룸 안에 들어가자 미리 와 앉아 있던 오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두 분 다.”

“예, 그렇죠.”

이규복이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뒤따라 찬영에게도 손을 건네는 오 중령.

“못 보던 새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진심이다. 찬영은 전보다 체격도 커졌고 키도 컸다. 거기다가 좋은 걸 혼자 먹는지 이젠 피부에서 광채까지 나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자, 앉으시죠.”

동시에 함께 앉게 된 세 사람.

이규복과 찬영이 나란히 앉고 오 중령이 그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식탁보 위에 올라와 있는 유리컵은 총 네 개.

이를 본 이규복이 물었다.

“오기로 하신 다른 분은……?”

“도 중령께선 조금 늦으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양반은 못되나 보다.

오 중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후 키 작고 단단해 보이는 체격을 가진 반백의 남자가 들어섰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힐끗 둘을 쳐다보더니 먼저 악수를 청했다.

“도인준이요.”

“이규복입니다.”

문 쪽과 가까이 앉아 있던 이규복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도인준의 손은 이규복을 지나쳐 찬영을 향했다.

명백한 무시.

찬영이 이를 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아직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이규복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손 떨어지겠소.”

계속 손을 들고 있던 도인준이 가볍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찬영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잠자코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거두시지 그러십니까?”

“뭐요? 하, 안하무인이구먼!”

찬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다.

하지만 이건 어렵게 마련된 자리. 목적으로 한 계약 파기는 끝내 놓고 나가야 했다.

거슬리는 그의 태도를 무시한 후 말했다.

“현재 V.O. 측은 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와 준 겁니다. 이 대리님을 외면하신 건 논의하기에 앞서 썩 좋은 태도처럼 보이진 않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당연한 이의 제기였다.

하지만 도인준은 그 말을 코웃음과 함께 모르쇠로 일관했고 오 중령은 마른침만 삼켰다.

사실 오 중령도 이 상황이 갑갑한 건 마찬가지였다. 상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도인준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도인준은 ‘펌’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군인 중 한 사람이다. 민간 펌에 많은 부분을 기대하기보다는 정부의 단독 정보 네트워크, 각성자 특수 부대 설립 등 정부 중심의 흐름이 되기를 바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의견이 꼭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자기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 센 군인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다.

특히 이 자리에서만큼은.

‘영주의 측근이 된 양찬영과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교분을 나누기 위한 자리건만…….’

어째서 상황을 나쁘게 이끌어 갈 게 뻔한 도인준을 자신을 도와줄 파트너로 파견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긴, 제대로 된 인사가 어디 흔했었나? 다 주먹구구식이지.’

아마 이번에도 사태 파악도 못 한 상관 하나가 도인준의 파견이라는 결과를 불러왔을 거다.

‘……망했군!’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자신은 도인준을 말릴 만한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권한에서 더 많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건 도인준이다. 그러니 최대한 분위기를 풀어 가며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여기 좋은 와인이 많다고 하더군요. 식사하시면서 한잔들 하시죠.”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오 중령의 노력에도 냉각된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찬영과 마주 앉은 도인준이 본격적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시작한 탓이다.

“기대는 하지 마시오. 사과는 없을 거요.”

찬영이 아까 전의 그가 했던 발언을 비판하며 대답했다.

“안하무인에겐 기대 안 합니다.”

그러자 싸늘한 눈빛을 보이는 도인준.

그는 찬영의 말에 따로 반박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본론을 꺼냈다.

“기대 안하다니 잘됐군. 어차피 나는 펌이라는 존재를 썩 좋아하지 않소.”

이규복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도인준.

그 시선에 이규복은 담담했다. 예상했기 때문이다.

소문대로다.

외골수.

자기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안하무인이었다.

이규복은 힐끗 찬영을 쳐다봤다. 찬영은 우선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우선 지켜보는 중일 거다.

이규복은 그가 굳이 나설 필요 없이 상황을 큰 소란 없이 정리하고 싶었다.

“솔직히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안다니 다행이군. 그러니 길게 시간 끌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피차, 얼굴 보고 있어 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그러시죠.”

이규복의 대답에 도인준이 가지고 온 서류 가방을 열어 몇 가지 서류들을 꺼냈다.

“군측 계약 파기 동의서요. 양찬영 각성자가 원하는 게 이거라고 알고 있는데.”

찬영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더 이상 유효 가능한 계약이 아니니, 깔끔하게 파기 하는 편이 낫겠죠.”

“해 드리지.”

도인준은 방금 보였던 날카로운 말투와는 달리 꽤나 순순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단.”

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군 측의 계약 파기와 함께 V.O. 측과의 계약도 파기되길 원하오. 당신도 그편이 낫지 않소? 계약 연장이 되었어도 한 쪽이 원하면 언제든지 파기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말에 이규복의 표정이 굳었다. 군측이 뭘 원하는지 알게 된 거다.

‘펌을 견제하기 시작한 거구나!’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 중의 일부는 펌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물밑 작업을 시작한 게 틀림없다.

그중 하나가 찬영과 V.O. 사이의 계약건부터 파기시키는 것일 테고. 어쩌면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보다.

계약 파기로 인해 부차적 수확이 없다는 건 군측 입장에서 꽤, 배 아픈 일이 될 테니.

이규복이 쓰게 웃었다.

“준비 많이 하셨네요. 계약 내용까지 알아내셨다면요.”

“그 정도야 뭐.”

별거 아니라며 으쓱이는 도인준.

그는 찬영이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차피 당신도 손익을 따질 것 아냐?’

대부분이 그렇다.

도인준은 찬영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득이 있으니까 V.O.와 계약하고 있는 거라고.

제법 돈도 만졌으니 정보를 넘겨주면서 V.O.으로부터 쏠쏠한 이득을 챙기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도인준은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이다.

“V.O. 계약 파기 후 계약을 할 거라면 우리 쪽에서도 V.O. 못지않은 계약 조건을 제시해 줄 수 있소. 어차피 돈이 오가는 건 똑같은 계약이니, 좀 더 득이 되는 쪽으로 이동하는 게 좋지 않겠소?”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죠.”

일부분 동의하는 바다. 정부와의 계약도 무효화가 되고 기존의 계약도 정리되면 자유롭기는 할 것이다. 세계 다른 유수의 펌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도 있을 테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재 등과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생길 거다.

“그러시죠, 대리님. 서류 챙겨 오셨습니까?”

흔쾌히 수락하는 찬영의 태도에 이규복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도인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다.

이대로 가면 찬영은 자유 계약 시장에 풀릴 테고, V.O.와는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가기 힘들 거다.

G.N.이야 이미 찬영과 좋은 관계가 아닌 게 사실이고…….

즉,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대형 펌과 멀어지게 된 셈이다. 아마 해외 쪽 펌을 알아보게 되겠지. 혹은 계약을 안 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좋다.

찬영이 대한민국의 속한 펌들과 멀어질수록, 정부는 그 펌들을 견제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즉 이런 껍데기뿐인 계약으로 찬영을 V.O.와 떨어트린 건 큰 수확인 셈.

도인준이 오 중령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봤다.

* * *

잠시 후 이규복은 찬영이 원하는 대로 계약 파기 서류를 팩스로 받아 왔다. 그리고 군 측에서도 파기 서류를 꺼냈다.

한껏 무거워진 분위기. 그 속에서 찬영이 조항들을 면밀히 살핀 후 서류 하나, 하나 빠르게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곧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도인준이 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이실 작정이요?”

슥. 슥.

말없이 마지막 사인을 마친 찬영이 이규복에게 빌린 펜을 그에게 다시 돌려주면서 도인준에게 대답했다.

“V.O.와 재계약을 할 겁니다.”

순간 정말 당황해 버린 도인준.

“뭐, 뭐요?”

그가 벌떡 일어나 룸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욕설을 퍼붓는 그에게 찬영은 같은 욕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한 그와는 상반된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기존 계약 건은 원하시는 대로 파기됐고, 새 계약을 어떤 업체와 할지는 제 권한 아닙니까?”

“그건……!”

“재계약에 관한 얘기는 없었던 걸로 압니다만. 아니었습니까?”

찬영의 시선이 이규복과 오 중령을 향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틀린 말이 없었다.

계약은 제대로 이행되었고 재계약의 선택권은 온전히 찬영에게 있다.

“하…….”

털썩.

자리에 다시 앉은 도인준이 물었다.

“좋아, 날 엿 먹이는 건 그렇다 칩시다. 그래도 V.O.와의 재계약보다는 다른 펌을 고르는 게 낫지 않겠소? 양찬영 씨 능력 정도라면야 뭐든…….”

가만히 듣고 있던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기준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제 기준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기준?”

“그래요. 기준. 굳이 V.O.라는 펌과 계약을 유지한 이유는 돈이나 명성 같은 단순한 기준 때문이 아니었어요. ‘신뢰’ 때문이죠. 그게 재계약을 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찬영이 이규복을 힐끗 쳐다본 후.

“대리님이 저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다시 도인준을 응시했다.

“……도 중령님은 저를 한참 잘못 보셨습니다.”

탁자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파르르 떠는 도인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번째는 뭐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잔뜩 엿 먹여 놓고 못할 말이라니……. 어이가 없군.”

비아냥거리는 도인준을 향해 일어나는 찬영.

혹시나 그가 무력을 쓸까 흠칫거린 도인준. 하나 찬영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룸을 벗어나며 덧붙였다.

“재수 없어서요.”

아, 시원해.

* * *

탁.

다시 차에 올라탄 이규복이 찬영에게 말했다.

“제대로 찍히셨네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한 찬영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가는 길이 다른 걸.”

이규복은 그의 대쪽 같은 성품에 새삼 감탄했다.

“허허…….”

헛웃음을 흘린 이규복.

문득, 그의 눈에 안전벨트를 한 찬영이 보였다.

“근데 그건 왜 하세요, 무쇠보다 단단한 분이?”

잠시 할 말을 잃은 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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