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자동보상-96화 (96/248)

#96

하늘의 균열.

제이나에 의하면 잿빛 종말이 펼쳐질 때와 비슷한 광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빛의 색이 바뀌었단다.

잿빛이 아닌 본연의 빛이 가진 색으로. 종말과 복원 사이의 차이라면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잠들었던 신성 왕국이 다시 열렸다.

* * *

찬영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누워 있고 싶어도 누워 있는 게 아니다. 겨우 팔을 움직일 여력밖에 없어서 못 움직이는 거다.

그사이 팔에 붕대를 동여맨 제이나가 침대 머리맡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잘 잤어요?”

“네, 아주 푹요. 언제 여길 온 건지 기억도 없네요.”

“도착한 후부터 계속 잠들어 계셨으니까요.”

찬영이 멋쩍게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나 봅니다.”

말 그대로다. 르리에에서 귀환한 직후부터 계속 잠만 잤다.

그럴 만도 한 게…… 마나 탈진, 체력 소진, 부상 등 제대로 의식을 차리기가 힘든 상태였다. 거기다 긴장까지 풀렸으니.

‘……말 다 했지.’

사실 이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한다. 까딱하면 글라투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까.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어.’

정말이다.

갓피스 두 명의 추가 지원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혼자 글라투를 상대해야 했을 거다.

‘그나저나.’

“그 이후에 얼마나 지난 거죠?”

“돌아온 건 반나절 정도 돼요.”

“그래요?”

“네, 그사이에 신관들이 다녀갔는데 나흘 정도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네요. 그분은 더 쉬라고 하셨지만…….”

“예? 신관 말고 누가 더 있습니까?”

이상했다.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힐링 마법을 사용하는 건 보통 신관들이다.

그들 말고 또 누가 있지?

스륵.

의문에 답한 건 천막 휘장을 걷어내며 들어온 영주였다.

“나일세! 내가 더 쉬라고 했지!”

“그러셨습니까?”

나직이 묻자 다가온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는 받지 않겠네. 일주일은 푹 쉬게.”

“예, 뭐…….”

당분간 쉴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막상 일주일이나 쉬라고 하니 조금 답답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냥 신관들이 하란 대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한마디 더 거들자, 영주가 도끼눈을 떴다.

더 말하면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입을 닫았다.

“마음에 드는군.”

그제야 흡족하게 웃는 영주. 그가 누워 있는 찬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질 걸세. 그 일을 위해 쉬어 둔다 생각하게.”

“네, 알겠습니다.”

찬영이 대답했다.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대륙의 일부인 신성 왕국이 모두 복원됐고, 이젠 찬영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지금은 이 걸 고민할 시간으로 대체할 생각이다.

마침 영주가 돌아섰다.

“이만 나가 보겠네.”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던 영주가 따라오는 제이나 경에게 신신당부했다.

“휴식기를 가지는 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꼼짝 말고 옆에 붙어 있게.”

* * *

영주의 엄포 덕에 같은 천막 아래, 함께 있게 된 두 사람.

찬영이 눈을 들어 옆에 앉은 제이나를 바라봤다. 아직도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왜요? 뭐 묻었나요?”

시선을 느낀 그녀가 물었다.

“아니, 뭐…….”

사실은 예뻐서다. 그냥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직설적인 편이 아니라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색했다.

그래서 웃기만 했다.

‘바보도 아니고, 이거야 원.’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불편한가요? 우리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아마 그녀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나 보다. 그 날의 입맞춤. 그리고 교감했던 그 순간 이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하긴, 그건…….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날의 일을 없다고 말하긴 싫다. 충분히 신중했고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누운 채 그녀를 끌어당겼다. 갈 길 잃은 그녀의 눈이 보인다. 부끄러워서일 거다. 그녀의 가까워진 숨소리를 느끼며 말했다.

“후회합니까, 그날의 일을?”

“아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습니다.”

기다렸던 대답이다.

찬영은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후 다시 그녀를 놔줬다.

“제 대답입니다. 우리…….”

얼어 버린 그녀에게 덧붙였다.

“연애합시다.”

* * *

제이나가 잠깐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뜬 사이, 찬영은 이불 안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친……. 연애 합시다? 연애……를 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굴이 뜨거워진다. 어색하면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될 것이지, 어울리지도 않는 폼을 잡고 이런 소리를 했는지…….

“하.”

막말로 글라투 앞에 있는 게 나을 지경이다. 한참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들려온 목소리.

“음? 뭐하십니까?”

시야 한 편에 들어온 이규복.

찬영이 순간 당황했다.

“별거 아닙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양 씩 웃는 이규복. 그는 최근 부담하고 있던 13편대 책임자에서 내려왔다. 새 파견 편대장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내려온 덕분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아무튼 별게 맞는 것 같지만 아니라니…… 잘 알겠습니다.”

찬영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입을 더 열어 봐야 평소와 다르게 낯이 많이 뜨거워질 것 같다.

“좋아요, 그건 그렇고 전 이젠 찬영 씨만 따라다니게 됐어요. 이 말씀 드리려고 깨셨단 얘기 들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네. 또다시 화제의 중심거리가 되셨잖습니까? 저야 좋죠. 찬영 씨와 일하는 게 복잡한 서류보단 나으니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 하다.

신성 왕국의 재건이 지구의 높은 사람들에게도 호기심, 설렘,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등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곳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의 곁에서 정보를 얻어 가는 게 훨씬 좋은 선택이라 판단한 것일 테다.

늘 느끼는 거지만 V.O.의 운영은 딱히 부담스럽지 않고 현명하다.

어차피 필요한 정보들이야, 이규복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으니까.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럼 이런 저런 정보와 일 얘기를 먼저 할 법도 하건만 이규복은 그러지 않는다. 찬영은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완쾌하려면 나흘 이상은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한다던데요?”

“다른 데는요?”

“이상 없다고 하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쉽지 않았을 싸움이었을 텐데…….”

이규복 덕분에 글라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디와는 사뭇 달랐던 놈이다.

굳이 표현하면 놈은…….

‘지능형 몬스터였어.’

교활하고 상대를 속일 줄 알았다. 특히 그 부식 능력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여러 공격 패턴을 훈련해 두지 않았다면 부식 능력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이번 싸움이 승리한 건 그간의 경험, 노력, 모든 걸 쏟아 부었기에 얻을 수 있는 승리였다.

“찬영 씨?”

“아, 네.”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 버린 모양이다.

다시 이규복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이것저것요.”

진지한 찬영의 눈빛을 보며 이규복이 씩 웃었다.

“어떤 이것저것요?”

“뭘 그렇게 음흉스럽게 물어보십니까?”

“이것저것이 아니라 한 분…… 아닙니까?”

“예?”

어이없어 하는 찬영에게 이규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 봤습니다.”

뭘?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새 이규복이 말을 이었다.

“이리로 오는 길에 제이나 경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몇 번을 뒤돌아보시던데요?”

순간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잠자코 이규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이규복도 대답 못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는 찬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분이 붙어 다니실 때부터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참…… 제이나 경 이야기는 떠보려고 방금 지어낸 겁니다. 평소답지 않게 왜 이렇게 잘 속으십니까?”

찬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당했다.’

“저, 그게…….”

뭔가 수습하려고 말을 꺼내긴 했는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 주워 담아 무엇하랴?

찬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사람, 작정하고 왔나 본데…….’

“제가 졌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말에 이규복이 기쁘게 웃었다.

사실 규복은 찬영과 제이나가 서로 호감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다 싶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건 참 행복하고 축복인 일이다. 자신이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일까? 문득 떠나간 그녀가 덩달아 생각났다.

‘보고 싶네.’

가슴 한편에 서글픈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새로 사랑을 시작한 사람 앞에 괜히 초를 치고 싶진 않다.

“경사네요.”

이규복의 넉살에 찬영도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한참 웃으면서 그간의 일들을 얘기하던 중, 찬영이 지구의 상황을 물었다.

“괜찮답니까?”

현 시각.

대륙의 복원으로 시끄러워질 지구의 상황이다.

“난리도 아니랍니다. 지구의 20%가 시드 대륙으로 덮였으니 그럴 만도 하죠.”

“20%라…….”

쉽게 말해 20%지, 신성 왕국이 얼마나 큰지 대번에 말해 주는 설명이었다.

한 귀퉁이인 알폰 지방의 토벌만 해도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젠 왕국이다. 쉽지 않은 길일 것 같다.

“영주님께서는 우선 협약서들을 가지고 수도로 가신다고 하신다고 하더군요.”

“왕…….”

“네, 신성 왕국의 총 결정권자가 다시 복원됐으니 그에 따른 협약서 보완 준비를 해야 할 참이겠죠.”

“그럼 모든 펌이 영주님과 함께 움직이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협약 관련 안건을 담당한 실무자들이 팀을 이뤄 움직이겠죠?”

찬영이 시선이 이규복을 향했다.

당신은 같이 안가냐는 눈빛.

이를 눈치챈 이규복이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협약서 관련 실무에선 손 뗐어요.”

“그렇군요.”

대답하며 생각에 잠긴 찬영. 그도 그럴 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대리님.”

“예.”

“채비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채비요? 무슨……?”

“저 역시 수도로 갈 것 같아서요.”

찬영이 수도로 간다면 그의 전담으로 근무하게 된 이규복도 수도로 함께 가야 한다.

이규복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찬영 씨가요?”

“아마도요.”

그 대답에 이규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에 잠긴 그에게 말했다.

“왕이든 누구든, 복원이 어떻게 된 건지 그 중심에 있던 제게 직접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건 또 그러네요. 아니, 그럴 게 확실해요. 당연한 걸 잠시 잊고 있었네요. 그래서…….”

이규복이 찬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이제 어떻게 움직이실 겁니까?”

찬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수도로 간다면 영주를 따라가면 그만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갈 길을 정해야 한다, 늘 그랬듯.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미 찬영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이규복. 그도 그럴 게 찬영은 늘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그러신 김에 한국이나 한 번 다녀오시지 그러세요.”

“한국이요?”

“네.”

찬영은 잠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 있는 집을 비워 둔 게 얼마나 됐더라?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꽤 오래된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이규복이 물었다.

“고지서 낸 게 기억이나 나세요?”

찬영의 얼굴이 굳었다.

“꽤 쌓였겠네요.”

건강보험부터 시작해서 아파트 관리비에 이것저것…….

갑자기 현실에 돌아가 버린 느낌이다.

“한번은 가야겠네요.”

몸이 좀 낫고 나면 앞으로 계획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가질 겸. 지구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거동 자체가 힘든 상태라.

이규복이 그 말에 동의했다.

“가시게 되면 함께 움직일게요. 저야 뭐, 이제 찬영 씨 매니저나 다름없는 업무가 되어 버려서요.”

“성공하긴 했나 봅니다. 능력 있는 매니저까지 두게 되다니…….”

“하하, 부담스럽지 않은 칭찬 잘 받고 갑니다.”

이규복은 그 말을 끝으로 신성 왕국의 변화와 맞물려 현재, V.O. 측과 맺고 있는 계약서의 여러 가지 변동 사항이 있을 거라고 전달해 줬다. 하지만 조항 몇 가지 바뀌는 정도여서 크게 신경 쓸 건 없었다.

“그만 쉬세요.”

그쯤 되자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고 느꼈는지 이규복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영이 의아한 눈치로 물었다.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농담에 피식 웃은 이규복이 말했다.

“늘 오늘 같이 평화로우면 바랄 게 없겠네요.”

“그렇게 될 겁니다.”

반드시.

이규복이 가벼운 미소로 화답하며 천막을 나갔다.

곧 텐트 안에 실로 오랜만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나, 정적은 찬영에게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늘 내일을 준비하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슬슬 봐야겠지…….’

피곤함에 절어 잠시 미뤄두었던 창들이 눈앞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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