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이는 당장 주위를 둘러싼 그롭 버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키에엑!
여왕을 잃은 덕에 아까와 같은 집단행동을 보이진 않았으나 놈들은…….
쾅! 쾅!
더 크고, 파괴력이 강해졌다.
놈들을 하나하나 벨 때마다 느껴지는 반탄력이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
하지만 지금의 차이는 미세한 차이가 아니다. 극명한 힘의 우열이 있다. 공격력 10% 정도로 승패가 뒤집어지진 않는다.
찬영은 무아지경으로 아슬란을 휘두르고 가진 장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래비티 필드 30회 중첩重疊.”
콰쾅!
얼어 버린 그롭 버그의 몸통 위로 중력이 내려앉자, 산산조각 나는 수십 마리의 그롭 버그들.
그게 끝이었다.
아슬란을 다시 휘두르려 눈을 치켜뜨자 보이는 건 평야에 깔린 그롭 버그의 사체들뿐.
끝났다. ……적어도 동쪽은.
“후우, 후우.”
전투 직후 조금 여유가 생긴 찬영은 거친 숨을 몰아쉰 뒤, 눈앞에 떠 있는 창을 힐끗 올려다봤다.
‘망령의 군대라…….’
이 문구를 또 볼 줄은 몰랐다.
이건 뉴 빌드에게 조종당하던 몬스터들을 일컫는 뜻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 당시 지하 수로에서 조우한 몬스터들은 뉴 빌드의 군대를 일컫는 게 아니라 글라투의 군대를 가리켰던 게 틀림없다.
‘어째서?’
둘 사이에 어떤 연관점이 있는 걸까? 글쎄, 모를 일이다. 아직은 어떤 것도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직접 놈과 싸우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찬영이 본진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땅을 박찼다.
* * *
그사이 본진은 동쪽을 제외한, 서, 남, 북이 모두 몬스터에 의해 둘러싸였다.
하지만 드넓게 포진된 몬스터 떼의 선봉 부대는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지 오래. 진군하는 몬스터 떼, 전방에 수북한 시신들이 쌓였다.
그럴 만도 했다. 영주에게 지원받은 전투 물자인 대형 트랩들이 1차적으로 폭발해 버렸고 그 위로 5m 길이의 포신을 가진 초급 경계 포탑이 지름 500mm의 마나탄을 쏘아 댔으니…….
특히 이 마나탄은 일반적인 마나탄이 아니라 산탄 형태였다.
과거 찬영이 사용했던 마나 산탄과 같은 형태의 포탄이다. 회전력과 함께 커다란 구체가 자잘한 알갱이처럼 허공에서 분사되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마나탄이 낙하하는 순간 피할 수도, 막아 낼 수도 없다.
회전력에 추락하는 속도까지 가미된 작은 마나탄을 막으려면 한 때 찬영이 조우했던 가시굴레의 4배 정도 되는 방사 방어력을 갖춰야 한다. 방사 방어력이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가 이 포탄을 감당해낼 리 만무하다.
더구나 동쪽은 홀로 출정한 찬영에 의해 고요한 상태. 동쪽에 자리 잡은 2개의 경계 포탑은 사정거리가 닿는 족족 나머지 방위의 몬스터 떼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포탑 안에 자리 잡은 프롤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졌다.
“기가 막히는데!”
“우린 살았어! 살아남을 거라고!”
처음엔 물경 천이 넘는 몬스터 떼 앞에 겁에 잔뜩 질렸던 프롤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중급 포탑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던 제이나 역시 지속적인 포격에 의해 사기가 드높아졌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승리할 수 있어!’
현재 전황만 보더라도 몬스터 떼는 대규모 접근이 불가능했다.
아니, 오는 동안 족족 차단되고 있다.
그 성과가 아직 중급 포탑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고무적이다.
현재 중급 경계 포탑은 9m 길이의 길쭉한 포신을 내민 채 장거리 포격에만 동참하고 있을 뿐.
24m의 포탑 안에 자리 잡은 다양한 공격 장비를 아직 개방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갓피스여! 남쪽 1차 저지대가 뚫렸다고 하오!”
경험 많은 제이나의 조언을 따라서 각 포탑마다 상황을 알기 위해 깃발 수신호를 택한 프롤들은 1차 저지선이 뚫렸을 경우, 포탑에 나 있는 창 사이로 붉은 깃발을 흔들기로 했다.
즉, 남쪽 경계 포탑에서 흔든 붉은 깃발이 서쪽 중급 경계 포탑에 알려진 거다.
수신호 전달을 맡은 프롤의 보고에 제이나가 조용히 이맛살을 구겼다.
‘그럴 리가?’
현재 서쪽 반경에 몬스터들은 지리멸렬하고 있다.
상황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분명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이런 낙관적인 상황에 갑자기 1차 저지선이 뚫렸다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
그녀가 다시 물었다.
“수신호가 확실히 왔나요?”
“맞소, 분명히 붉은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소!”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남쪽의 전황은 확실히 볼 수 없다.
이곳은 서쪽. 남쪽을 보려면 남쪽에 등지고 있는 2개 포탑 사이로 동태를 살펴야 한다.
‘가야겠어.’
현재 남쪽에는 글로리가 있다. 새로운 갓피스가 된 그를 믿고 있긴 하지만, 만약 1차 저지선이 뚫렸다면 쉽지만은 않을 거다.
그녀가 찬영이 맡기고 간 타우린을 쳐다봤다.
그사이 그녀의 손길이 익숙해졌는지 타우린이 눈망울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바라봤다.
“날, 좀 도와줘야겠어. 타우린.”
-음모오오!
타우린이 준비가 됐다고 말하는 양 크게 울었다.
* * *
남쪽은 레드 아이의 출몰 지점.
글로리는 1차 저지선이 뚫린 걸 확인하자마자 포탑 창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보인다. 놈이!’
오랫동안 자신의 트레이드 족은 놈에게 강탈당하고 복속 당해야만 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매번 놈의 탐욕에 죽거나 다쳤으며 혹은 그 자리에서 중독 당해 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글라투!”
경계 포탑의 4m쯤.
작은 창에 자리 잡은 글로리가 적의 서린 눈빛으로 선봉에 선 글라투를 노려보았다.
스륵.
1차 저지선을 뚫고 나온 글라투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잔털 하나 없는 황갈색 면의 둥근 얼굴. 그 안에 자리 잡은 흰자만 있는 세 개의 눈이 글로리를 향했다. 동시에 벌어지기 시작한 붉은 입술.
씨익…….
포식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다.
이를 마주친 글로리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저 눈이 마주치기만 했는데도 손이 떨려 온다. 글로리는 결국 놈과 눈을 다 마주치지 못하고 창 뒤로 숨어 버렸다.
‘……두렵다!’
머리는 떨쳐 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지만 몸이 반응하고 있다. 평생을 복속당한 트레이드 족의 운명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더욱 짙은 미소와 함께 글로리에게서 시선을 뗀 글라투.
놈이 4m 가 넘는 거대한 거구를 다시 내딛었다.
쐐액!
동시에 낙하하기 시작한 경계 포탑의 포탄.
콰콰콰쾅!
낙하하는 동안 잘게 나뉜 마나 포탄들이 비가 되어 추락한다.
“감히……!”
그가 낮게 울며 거대한 네 개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쫙 펼쳐지는 녹색의 물갈퀴들. 이 물갈퀴들은 헤엄을 치기 위한 게 아니다.
물갈퀴 달린 네 개의 손에서 뻗어져나간 나선형의 녹색 파장이 낙하하는 포탄들을 일제히 부식시켰다.
순식간에 힘없이 녹아내리며 소멸되어 버린 포탄들.
콰콰쾅!
그사이 그의 파장이 닿지 않은 장소에 떨어진 포탄이 글라투의 뒤를 따라오던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글라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그가 노려보는 건 2차 저지선을 넘어선 남쪽에 자리 잡은 2개의 포탑뿐. 잔챙이들의 죽음 따위야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탐욕의 글라투. 호수 옆, 늪에 사는 자.”
일인 군단이다.
* * *
그동안 글로리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자책했다. 그저 멀리서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버렸다.
‘이게 아닌데!’
이 순간 찬영이 해 줬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격은 스스로 증명하는 거라고.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은…….
‘내 그릇을 인정한 꼴이 되어 버렸지.’
지금의 결의라면 글라투 앞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름 여유도 생겼고 평온함도 찾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 개의 흰 자위와 마주하자마자 덜컥 겁이 났고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기회만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날 봐요.”
그때 느껴지는 손길. 그 손길에 놀란 글로리가 눈을 들었다. 시야 한 편에 들어온 건 어느 때보다 차분한 표정의 제이나. 주저앉아 있던 글로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1차 저지선이…… 뚫렸소.”
“네, 수신호를 통해 알고 왔어요.”
“그가……! 그가 오고 있소.”
“네, 맞아요. 조금 있으면 2차 저지선까지 지나칠 겁니다.”
제이나는 방금 전 포탑 창밖을 통해 본 광경을 쉽게 잊지 못했다.
‘분명 부식시키는 능력이었다.’
놈이 가진 네 개의 손에 포함 된 능력이 틀림없다.
지금이야 날아오는 마나 포탄을 부식시키며 진군하고 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포탑까지 부식시킬지도 모른다.
더는 접근을 허락하면 안 된다. 누군가 그 길을 막아서야 했다. 제이나는 이 순간 글로리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2차 저지선 뒤가 바로 이곳이죠.”
글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이 수전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크게 떨렸다.
자신의 양손을 교차해 꽉 잡은 채 경직된 귀를 세운 글로리.
그의 긴장됨이 제이나에게도 느껴졌다.
두려울 건 당연하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공포를 오연히 마주 서기란 분명…….
‘쉽지 않겠지.’
제이나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싸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아니오. 나는…… 싸워야……!”
글로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제어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벌벌 떨리기만 할 뿐, 손끝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다.
제이나가 일어나려 애쓰는 그를 위로했다.
“이 싸움이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는 글로리 씨, 당신 덕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 정도는 쉬어 가도 됩니다.”
괜찮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일어난 제이나.
“미안하오. 나는…… 나는…….”
뒤따라 일어나지 못한 글로리의 눈에 죄책감이 서렸다. 이를 본 제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부터는 제 몫인 걸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물론 글로리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억지로 전투에 밀어 넣는 건, 그의 두려움을 더 자극시킬 뿐이다.
많은 전투 중 이런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보통은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나, 첫 전투를 경험할 때 두려움이 몸을 지배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필요한 게 있다. 호흡을 다스릴 조금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유라는 게 생기면 이를 통해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게 될 시간을 가진다.
이때 선택은 둘로 나뉜다. 상황이 좋아지길 막연히 기다리며 계속 두려움에 떠는 쪽.
혹은, 공포가 발목을 붙잡고 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이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닫는 쪽.
제이나는 그가 후자를 깨닫길 바라며 자리를 떴다.
‘그가 운이 좋게 후자를 깨닫는다면…….’
아마 그는 명료하게 알게 될 거다. 공포라는 건 물리적으로 아무 제약도 줄 수 없는 허상뿐이라는 것을.
* * *
저벅저벅.
거구를 옮기며 세 발로 걸어가는 글라투.
이미 그의 뒤는 쑥대밭이다. 따라오는 몬스터는 고작해야 서른 정도. 그마저도 날아오는 포탑에 산산조각 나고 있다.
하지만 그 강력한 포탑들마저도 글라투의 걸음은 멈출 수 없다.
그때였다.
툭.
“인비저블 핸드.”
갑자기 생성된 투명한 손이 처음으로 글라투의 두 발을 붙잡았다.
찰나 간 우뚝 선 글라투. 그의 흰 눈동자들이 빠르게 적을 찾았다.
“헤이스트.”
그 틈을 타 글라투의 우측으로 쇄도하는 제이나.
이를 본 글라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갓피스여.”
그녀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본 글라투가 양손을 뻗는다.
그러자 정면으로 날아가는 파장.
지잉!
달려오던 제이나의 몸이 파장에 그대로 닿은 그때였다. 글라투가 인상을 썼다. 그녀의 몸이 녹아내린 게 아니라 픽, 하고 촛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4서클의 인비저블 더블.
즉, 분신이었다.
“슬롯 1개 개방. 콜 라이트닝, 슬롯 2개 개방. 중첩 콜 라이트닝.”
5서클 뇌전 마법의 2개 중첩.
제대로 맞으면 아직까진, 제대로 살아남은 몬스터를 못 봤다.
글라투가 분신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녀는 낙하하는 포탄의 범위에서 떨어져, 멀리서 글라투를 겨눴다.
……됐다!
그리고 시작된 어마어마한 전류 더미.
쾅!
전력을 다한 벼락이 글라투에게 정확히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