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연계기.
기술과 기술을 연결해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기예를 뜻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과 기술을 연결시키는 의미의 기예를 개방 시킨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이네이트의 개방과도 같았다.
쐐애애액!
허공을 가득 메운 점액들. 단순히 피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하늘을 덮은 해일이 따로 없다.
콰콰!
높이 솟아올라다 낙하하는 녹색 점액들. 하나라도 적중하는 순간 온몸이 부식되어 버릴 거다.
미끄러지는 순간 끝이다. 찬영의 눈빛이 칼날보다 예리해졌다.
그간의 전투로 더 견고해진 침착함은 이 급박한 상황에도 그를 한 발 더 움직이게 했다.
“진공나찰보, 염왕초혼심법.”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이 변화를 일으켰다.
타탓!
허공에서 수 바퀴 회전한 찬영의 발끝에 서린 마나.
발을 두른 얇은 마나 위로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위잉!
마나는 화염 수레바퀴가 되어 맹렬히 휘돌았다.
‘됐다!’
마나가 꿈틀거렸다, 당장 움직이라는 듯이.
쾅!
곧 발끝에서 터진 충격파와 함께 시작된 폭발적 가속도. 지상의 섬뢰보 아니, 그 이상이다.
짜릿한 가속도로 인해 질주하기 시작한 찬영.
찰나 간, 폭발적 속도가 주는 황홀경은 어마어마했다.
쐐애액!
속도감에 의해 끓어오른 전율이 온몸의 솜털을 전부 곤두서게 한다. 하늘 사이를 가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이 자신을 스쳐가는 것 같은 기분!
콰콰!
그 뒤로 찬영을 당장 뒤덮을 것 같았던 녹색 점액들이 일제히 지상에 추락했다.
순식간에 내려앉으며 땅을 부식시키는 점액들.
-키에엑!
찬영을 놓친 그롭 버그들이 적의 가득한 울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다시 두 번째 녹색 점액을 쏘아 올리려 촉수를 벌리는 그롭 버그들.
전투를 최대한 피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늦은 것 같다.
‘어림없지.’
그러니 여유를 주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파밧!
두 기술의 연계기가 또다시 빛을 발했다.
파밧!
체공한 상태에서의 급속 방향 전환, 그 후 또다시 하늘을 질주하는 폭발적 가속도. 마치 하늘이 그의 도약을 위한 디딤대라도 된 것 같다.
찬영은 거침없이 하늘 곳곳을 밟고 또, 밟으며 솟아올랐다 추락했다 질주하기를 반복하며 그롭 버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키에에엑!
웅웅.
곧이어 공기 찢는 소리를 내며 발동한 스툼, 그리고 헬레.
염왕초혼심법과 진공나찰보가 일으킨 가속도, 그 위에 스툼의 에어 펀치로 접근하는 찬영.
가속의 가속을 얹으니 그의 공격은 그야말로 섬광!
쾅!
제일 먼저 에어 펀치에 가격당한 그롭 버그의 견고한 집게와 몸통. 놈은 박살 난 자동차처럼 찌그러지며 반으로 ‘쩍’ 하고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번져 가는 불길.
화르륵.
헬레의 서클 번이 발동했다.
-키에엑!
이를 본 다른 그롭 버그들이 괴성을 지르며 맹렬히 달려든다.
찬영이 눈 깜짝할 새 손에 쥔 아슬란을 고쳐 쥐며 몰려든 그롭 버그를 겨눴다.
싸울 생각이 없던 이전이라면 몰라도, 피할 수 없게 된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콰직!
그를 중심으로 불어 닥친 북풍이 그롭 버그를 향했다.
* * *
“괘, 괜찮으신가요……?”
또 다른 이웃의 이름은 아리자. 누가 봐도 글로리와 같은 종족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스스로를 볼 수 없기에 어떤 몰골인지 알 순 없지만 깔끔한 차림은 아닐 거다.
“오시는 동안 힘겨운 전투가 있으셨나 봅니다.”
덧붙이는 아리자. 그를 보며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진짜 전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예?”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반문하는 그를 보며 찬영은 그가 글로리에게 아직 전해 듣지 못한 얘기들을 전달해 주었다. 이를 듣자 그는 경악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시, 시간이 없겠군요.”
“예,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대답한 후 찬영은 아리자의 표정을 살폈다. 아리자는 꾹 닫은 입술과 함께 눈을 들었다.
“글라투의 가혹한 폭력이 가져오게 될 여파보다는 기회가 있을 때 싸워 보는 게 이제껏 우리가 가진 꿈이었습니다. 물러설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글로리의 예상대로였다. 아리자와 같은 프롤은 찬영의 싸움에 합류하지 않고 글라투가 승리할 경우 자신들에게 미칠 여파를 걱정했고, 이는 싸움을 택하게 만들었다.
글라투의 지배를 유지하게 만들었던 폭력과 힘이 이젠 프롤들이 항거하는 이유가 된 거다.
“자, 이리로……!”
찬영은 아리자의 안내에 따라 그가 가진 지하 광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 광산에 있는 건 경계 포탑의 포 제작에 필요한 오르벤 광석.
“캐낸 광석은 이쪽에 따로 보관해 둡니다.”
광산 근처에는 그가 세운 수많은 창고가 있었고 그 창고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오르벤 광석이 존재했다.
그 양은 찬영의 인벤토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
이를 보자 한 가지 생각이 또렷해져갔다.
‘이 싸움…….’
해볼 만하겠어.
* * *
-07 : 00 : 30
찬영은 남아 있는 시간을 올려다봤다.
이제 저 30초가 지나면 남은 시간은 단 7시간. 수송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더 이상 수송에는 큰 의미가 없다.
50km 안에 있는 이웃이란 이웃은 전부 한데 이송시켜놨고 50km 바깥은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수송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50km까지가 르리에 땅의 끝이다.
오두막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모든 50km 바깥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검은 벽에 막혀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지나갈 수 없다. 즉, 모일만한 사람은 전부 모였다는 얘기.
경계 포탑을 짓기 위한 자원 또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거다.
거기다 여기 모인 80명의 프롤은 르리에로 살며 농사꾼, 대장장이, 광부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해 온 재주꾼들. 그로 인해 경계 포탑의 설치 소요 시간은 이제, 도타도 예상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아무튼 인적, 물적 자원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을 다 한 것 같네요. 당장은…….”
곁에 다가온 제이나 경의 목소리. 그로 인해 상념에서 깬 찬영이 그녀를 돌아봤다.
조금 파리하게 질린 안색. 마나의 과다 사용 때문이다.
“조금 쉬지 그러세요.”
찬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는 이번 수송에 의해 어깨 죽지에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그녀가 가진 회복 포션으로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문제는 외부 상처가 아니다.
그녀의 마나 회복이 급선무다. 찬영은 잔소리를 한마디 더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평소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눈빛에 묘한 웃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요? 뭐, 묻었습니까?”
“아뇨.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어떤……?”
“지금 이거 단순한 동료애인가요?”
아님, 호감이냐? 꽉찬 돌직구의 의미가 담긴 그녀의 질문.
잠깐 그녀를 바라보던 찬영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요.”
곧 그녀의 눈에 스쳐가는 한 줄기 아쉬움이 보였다.
‘미안해요.’
함께 많은 사경을 넘으면서 싸웠기에 이젠 그녀의 눈만 봐도 안다. 방금 그녀가 던진 농담 섞인 진심을 찬영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담담히 이를 넘긴 건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그녀를 좋아하면 두려움이 생길까 봐 걱정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속에서도 혼자 남길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걱정할 테고 신경도 쓰일 거다. 그렇기에 덜컥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다.
그래, 어쩌면 그녀라는 좋은 사람을 잡지 못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엔…….’
사랑이 조심스럽다. 사랑으로 인해 찾아올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게 좀 더 용기가 생긴다면 그 땐 그녀에게 물어볼 거다. 곁에 서도 되냐고…….
그사이 제이나도 민망했던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제 준비하시죠.”
“예.”
그녀가 말하는 준비가 뭘 뜻하는지 모를 리 없다.
영주에게 받아 온 전투 물자들을 포탑 주위에 포진시킬 생각인 거다.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재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경계 포탑들을 둘러봤다.
“대형 트랩들부터 시작하시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대형 트랩들은 포탑에서 최대한 멀리 설치해 둬야 트랩의 여파가 미칠 때 우리 쪽의 피해가 없다.
그 얘기에 제이나도 이의 없는 눈치.
대신 그녀는 걱정되는 바를 하나 꺼냈다.
“사방이 훤히 뚫린 평야지대나 다름없어서 방어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네요.”
“예,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요.”
찬영의 말대로였다.
50km 이내의 다른 지역도 돌아봤지만 적을 방어할만한 좋은 지역적 환경을 갖춘 곳은 전무하다.
다른 이웃을 수송시키는 데 찬영의 오두막 다음으로 가장 중심 지역이라고 할 만한 게 글로리의 구획이다. 수송 혹은 이송을 하는 데 제일 적합한 지역으로 한 건 가장 최상의 선택.
둘 모두 이를 알기에 현재 가진 조건 안에서 적들을 막아 낼 궁리를 해야 했다.
“서두르죠.”
찬영이 먼저 앞장섰다.
* * *
제이나가 땀을 닦았다.
“후우.”
대화 직후 두 사람은 세워진 포탑들을 중심으로 전면전을 치를 준비를 마쳤다. 전투 물자가 넉넉하진 않았으나 영주가 알뜰살뜰히 챙겨 준 물자로 최대한 버텨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동하는 데엔 많은 마나가 필요했기에 제이나와 찬영은 둘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남았죠?”
“이제…….”
-04 : 05 : 23
“네 시간 정도 남았네요.”
찬영이 타이머에 남은 시간을 얘기해 주자, 그녀는 조용히 툴챠를 고쳐 잡았다.
“이제 좀 쉬어야겠군요.”
당연한 얘기다. 그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지금까지 쏟아 부었다. 타우린을 호위하며 수많은 수송, 이송을 끝냈고 적을 대비한 트랩을 모두 설치해 뒀다. 남은 건 그녀가 이제껏 사용한 마나의 회복이다.
이곳에서 전투에 투입될 만한 사람은 오로지 그녀와 자신뿐. 그녀가 얼마나 이 전투에서 얼마나 활약해 줄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의 휴식은 가장 필요한 일 중 하나.
“찬영 씨도 어서 쉬도록 해요.”
“네, 그래야죠.”
맞는 얘기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 역시 휴식이 필요하다.
단, 휴식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지만.
“그럼…….”
마나 회복을 위해 쉬겠다며 자리를 뜬 그녀.
“예.”
대답과 함께 찬영도 가까운 공터에 털썩 앉아 바빠서 잠시 신경 쓰지 못했던 창부터 살폈다.
이번 연계기 사용으로 인해 획득하게 된 골드 1급 박스부터 개봉하기 시작했다. 아껴둘까 싶다가도 전투에 필요한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어서 바로 상자를 열기로 결정했다.
-골드 1급 박스가 개봉되었습니다.
플래티넘 급 박스의 바로 아래 단계의 박스이니, 어느 정도 기대가 되는 게 사실이다.
띵!
익숙한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하나의 창.
“음……?”
-빌이 빚은 항아리
가치 : 3,999
설명 : 제작 도구로 쓰입니다. 사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도구.
사용 방법은 이제까지의 제작 도구와 큰 차이가 없다. 합성, 강화 모두가 그렇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4천에 근접한 수준의 아이템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것.
‘당장의 내겐 필요하지 않아.’
지금 가지고 있는 장비만 봐도 그렇다.
스툼, 헬레.
그리고 아쿤다의 표창과 아슬란, 공진 등.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만 해당할 뿐 여기 모인 다른 이웃들에겐 그렇지 않다. 이웃들에겐 무기가 필요하다.
‘……그들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생각을 하면 이번 제작 도구의 등장은 굉장히 반갑다.
‘이것들로 전력을 강화시키자.’
찬영은 수송을 다니며 획득한 아이템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워낙 높은 가치의 적들을 상대한 탓인지 아이템들 중엔 4천 대에 가까이 근접한 아이템도 있다. 이 정도라면 좋은 품질의 장비 등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혹, 좋은 품질의 보석이라도 나온다면 환영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찬영의 양손이 빠르게 아이템들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