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또 히든 퀘스트라고?’
찬영은 눈앞에 나타난 창을 쳐다봤다.
-히든 퀘스트 : 수송대가 되어라
-글로리에게 통성명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글로리와 교류하는 다른 이웃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글로리와 함께 다른 이웃들과의 교류를 마치세요.
-퀘스트 완료 조건
-50km 내 이웃 10명과 물물교환 하세요.
-물물교환한 재료를 도타에게 건네주세요.
-히든 퀘스트 완료 시 획득할 보상 목록
-물물교환을 마친 이웃에게 존경심 + 100을 획득합니다.
-1회 이상 물물교환을 마친 이웃과의 무역로가 생성됩니다.
-중급 경계 포탑으로 1회 업그레이드권(1회 업그레이드 시 시간, 재료 등은 소모 되지 않습니다.) 획득 가능
내용을 읽고 나니 이번 히든 퀘스트가 무슨 이유로 나타났는지 확실히 알았다.
‘일종의 연계 퀘스트구나.’
그도 그럴 게 글로리의 신뢰를 얻는 이전 히든 퀘스트를 통해 이번 히든 퀘스트가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봐도 무방했다.
‘큰 힘이 되겠어.’
보상 목록만 봐도 글라투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이 퀘스트는 반드시 수행해내야 한다.
그래야 도타 역량 이상의 물건, 즉 중급 포탑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오래 기다렸소, 자…….”
그때 다시 돌아온 글로리가 뭔가를 건네줬다.
“지도군요?”
찬영이 이를 받아들여 확인하자 미니 맵 정보가 축적됐다.
이웃이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도였다.
글로리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맞소. 이 지도는 아직 연락하고 있는 이웃들의 위치요.”
“놀랍군요. 영역을 벗어나시면 공격을 당하실 텐데 어떻게 이런 지도를……?”
궁금할 만도 했다. 글로리 또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수많은 언데드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웃들과 교류를 나눌 수 있었을까?
글로리가 별거 아니라는 양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다 티어 팔콘, 덕분이지.”
“티어 팔콘?”
찬영의 반문에 글로리가 대답 대신 휘파람을 불자 한 마리 매가 갑자기 하늘 위에 등장했다.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방금까진 없었는데 어디서 등장한 겁니까?”
순식간에 글로리 어깨 위에 안착한 매를 보며 물었다.
그가 매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 티어 팔콘은 투명화가 가능하오. 언제 어디서든 몸을 감추고 날 수 있지.”
“그래서 다른 이웃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었던 거군요.”
“맞소, 이 녀석 덕분이지…….”
한 쪽 눈가에 눈물 자국처럼 생긴 흰 반점을 가진 매는 그 진심을 아는 듯 날개도 푸덕거리지 않고 차분히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글로리가 티어 팔콘의 목 언저리를 쓰다듬은 후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지도를 직접 내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소?”
“짚이는 바는 있습니다.”
“뭐요?”
“포탑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다른 이웃을 통해 공수할 수 있게 도와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맞소.”
그의 대답에 찬영은 무척 기뻤다.
단순히 예상한 부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도움으로 인해 히든 퀘스트의 완료와 여러 조력자들을 얻을 수 있게 될 거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 삼조의 결과까지 낳는 셈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이웃들의 도움을 이끌어 내야 가능한 얘기가 되겠지만.
“가능하겠습니까?”
이를 걱정한 찬영이 물었다.
“무엇이 말이요?”
“다른 이웃들께서 우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선뜻 나서지 않으실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소.”
다부지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당신이 그 이유요.”
“제가요?”
찬영 또한 이번만큼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들의 선택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의아해하는 사이 글로리가 다시 말했다.
“글라투는 당신이 자신의 땅을 다녀갔다는 것만으로 화가 단단히 났을 거요. 그럼 당신이 힘없이 무너진다면 그다음은 누굴까?”
“이 땅에 계신 다른 분들이겠죠.”
“맞소,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당신의 편에 선 이유 중 하나지. 싸우나, 싸우지 않으나 그의 분노를 견뎌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그리고 그건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렇군요…….”
찬영은 글로리의 대답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기다렸던 건 갓피스가 아니라 스스로 항거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자, 어서 서둘러 움직입시다.”
그새 앞장 선 글로리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때보다 강한 활력이 흘러넘쳤다.
기다린 바였다.
* * *
글로리는 그때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먼저 도타와 대화를 나눠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리스트를 작성했고 리스트를 만든 이후에는 찬영에게 필요한 재료를 갖고 있는 이웃들의 위치를 가까운 순서에 맞게 순차적으로 알려줬다.
계획이란 밥상을 차려 준 거나 다름없다. 그럼 남은 건 이를 행동에 옮길 차례.
찬영은 제이나, 글로리와 함께 어떻게 움직여야 효율적일지 의논을 나눴다.
머리를 모아 상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찬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분들도 현재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겠네요.”
“맞소, 최근 내 심경의 변화, 선택들에 대해 다들 알고 있고 모두 그 결정을 지지한다고 알려 왔소.”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이렇게 되면 일이 한결 쉬워진다.
‘좋아, 그럼…….’
이미 이웃들의 결심이 섰으니 남은 건 그들의 수송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느냐다.
찬영이 제이나를 쳐다봤다.
“제이나 경.”
이미 찬영이 부를 걸 알고 있었던지 제이나 경이 담담히 물었다.
“수송 인원을 나눌 생각이신 거겠죠. 맞습니까?”
이쯤 되면 이심전심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네.”
찬영이 웃으며 대답하자 제이나 경이 말했다.
“그럼 마차는 제가 직접 끄는 편이 낫겠군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여러모로 그편이 낫다.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마차로 재료들을 수송해 오시면 됩니다. 북쪽과 동쪽에 포진되어 있는 분들을 부탁합니다.”
“그러죠.”
그럼 서쪽과 남쪽은 오로지…….
‘나의 몫이야.’
이렇게 되면 수송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수송이 1회, 2회 쌓일 때마다 서서히 포탑 작업 진척도 또한 빨라질 거다.
“그럼 그대들이 다녀올 동안 나는 저 친구를 도울 길을 찾겠소.”
이어서 글로리가 포탑 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한 도타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래주시겠습니까?”
찬영도 그 부분에 있어서 전혀 이의가 없었다.
도타 혼자 진행하는 것 보다 그의 도움이 있다면 작업 진척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출발하죠.”
곧 각자 할 일이 정해지자 찬영은 도타를 데려와서 타우린에게 필요한 얘기들을 건넸다.
-음모오…….
다가가자 몸을 미는 타우린.
애정표시다.
녀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며 미리 오두막에서 도타를 통해 수확해 온 약초를 꺼내 타우린의 먹이로 내주었다.
우물우물.
그 후 도타에게 제이나 경을 좀 도와주라는 얘기를 건네 달라 했고 이를 들은 타우린은 별 반항 없이 의견에 따라줬다.
그리고 남은 약초는 제이나 경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타우린이 좋아하는 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두막에서 캐온 것들이에요.”
“이건 왜?”
“타우린의 체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하나씩 주셔야 합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런 용도군요.”
“예, 지친다 싶으면 하나씩 내주시면 될 겁니다.”
“그럴게요.”
“그리고 또…….”
찬영은 그 직후 최근 만났던 언데드과 몬스터인 리턴 데드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해 줬다.
“리턴 데드는 빙결에 쥐약이더군요. 조우하게 되면 반드시 빙결 마법을 사용하세요.”
이게 끝이었다.
더는 찬영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남은 건 조심하라는 덕담 몇 마디를 서로 나눌 뿐. 그러나 제이나는 그걸로 부족했던지 찬영에게 헤이스트 등의 몇 가지 보조 마법을 걸어 줬다.
백 마디 말 대신 묵묵히 몸에 스며드는 보조 마법.
“고마워요.”
찬영은 달리 그 말 말고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거면 족했던지, 그녀가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를 보여 준 후 마차 위에 올라탔다.
* * *
그때부터 남은 건 그냥 죽자 살자 달리는 거였다.
숙련도 면에서 많은 성장이 있었던 이동 계열 이네이트는 성장에 대한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콰앙!
발 한 번 내딛을 때마다 쭉쭉 앞으로 나아가는 도약력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리턴 데드들이 어김없이 곳곳에서 땅을 헤집고 기어 나왔다.
-구에에엑!
지킬 게 있거나 부딪쳐야 할 이유가 있는 거라면 모를까, 지금과 같이 수송에만 목적이 있는 임무일 경우엔 리턴 데드 따위 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가볍게 놈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아가며 질주했다.
그러나 글로리 구획에서 남쪽 5km 지점을 지났을 때쯤, 열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한 번씩 모습을 비추던 리턴 데드들이 차츰 자취를 감춰 갔다.
아니, 오히려 바닥을 기어 나온 다섯 마리 가량의 리턴 데드는 마치 뭔가를 피하듯 찬영을 쫓아오지 않고 반대편으로 사라져갔다.
달려가던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대체 뭐 때문이지?’
느낌이 서늘했다.
이제껏 몬스터를 상대해 온 경험상, 몬스터는 한 번 시야에 걸린 타깃은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혹은 타깃이 죽을 때까지 계속 쫓아온다.
‘한데 방금 전 리턴 데드는 분명…….’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 보통 같았다면 쫓아오기 마련.
스륵.
곧 달리던 것을 멈춘 찬영이 휑한 평야를 둘러보았다. 단순한 직감이라고 생각하기엔 리턴 데드의 행동이 불길할 정도로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한데.’
어느 순간부터 리턴 데드가 한 마리도 안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놈들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왜지……?’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찬영은 손을 뻗어 아슬란을 쥔 뒤 단숨에 땅을 내리 찍었다. 그건 그간 쌓인 본능에 의한 결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사각지대에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직감.
콰직!
그리고 검 끝에 뭔가가 걸렸다.
쐐액!
이를 느끼자마자 아슬란을 뽑으며 땅을 박찬 찬영. 그러자 아슬란 끝에 묻은 녹색 체액이 사방에 튀며 주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냥 스며드는 게 아니다. 체액이 닿은 자리가 거멓게 변해갔다.
‘독!’
부식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생각에 접어든 찰나, 방금 전까지 찬영이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촉수가 드릴처럼 회전하며 땅 위로 솟아올랐다. 그냥 서 있었다면 순식간에 저 날카로운 촉수에 꿰뚫려 버렸을 거다.
‘대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지상을 내려다보던 찬영의 눈에 서서히 땅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커다란 집게벌레가 보였다.
-그롭 버그
-가치 : 8,200
리턴 데드보다 한 수 위. 심지어 방금 전의 그 촉수 속도는 찬영이 상대한 그 어떤 몬스터보다 빨랐다.
-키에에엑!
곧 땅 위로 완전히 드러난 7m 짜리 그롭 버그는 집게 사이로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울었다. 그러자 그 울음소리에 반응하듯.
-키에에엑!
3, 4m짜리 동일한 그롭 버그들이 땅 속을 뚫고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젠장……!”
잡히는 순간 몸이 절단 날 것 같은 집게에다 등에 달린 수십 개의 촉수들은 당장 찬영의 몸을 꿰뚫고 속박하려 대기 중이었다.
‘우선 피한다.’
어차피 목표는 다른 이웃을 방문해 그를 안전히 수송하는 일.
여기서 싸우는 건 괜한 소모전이다.
체공한 상태로 허리를 회전했다.
쐐액!
때마침 날아오는 수십 개의 기다란 촉수들.
빠르다! 하지만 피할 수 있다.
타탁.
그동안 쌓아 온 진공나찰보의 숙련도라면!
파앗!
진공나찰보를 발동한 이 순간 머리카락 한 올이 잘려나갔다.
촉수는 방심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당해 버렸을 공격 속도,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계속 변화했고 성장했다.
“염왕초혼심법.”
로이크가 남긴 심법을 통해 마나를 끌어내자 열세 번째 별이 남긴 정수 하나가 진공나찰보와 만났다.
진공나찰보를 펼칠 때만큼은 프라이가 남긴 심법보단 로이크에게 전수받은 염왕초혼심법이 훨씬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곧 편안함이 깃드는 두 발.
가시 굴레 당시보다 훨씬 능숙해지고 차분해진 걸음걸음이다. 마나의 제어가 능숙해진 만큼 염왕초혼심법으로 펼치는 진공나찰보는 최고의 방어 수단이자 최선의 이동 수단이 된 거다.
타타탁!
순식간에 촉수들을 피하거나 그 위를 밟으며 다시 허공에 몸을 띄운 찬영.
찰나 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진공나찰보의 숙련도가 50% 달성되었습니다.
-숙련도 최초 50% 달성 업적으로 인해 골드 1급 박스를 획득합니다.
-숙련도 50% 달성으로 인해 진공나찰보와 염왕초혼심법 사이의 연계기가 개방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 좋은 소식도 잠깐이다.
찬영은 이를 확인할 새도 없이 허공을 향해 몸을 던져야 했다. 그 뒤로 찬영의 몸을 뒤덮고도 남을 녹색 덩어리 수십 개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